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 시.공의 경계를 넘는 유크로니아 시대의 철학 에세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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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푸른숲)이란 제목을 단 김용석의 책은 난생 처음 자
동차를 보게 된 두꺼비 토드를 소개한다. <그 멋진 자동차는 모든 이들의 정열을 불
러일으키듯 온 땅과 하늘을 집어삼키면서 쏜살같이 지나갔다. 토드는 꿈꾸는 듯한 어
조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 ·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꿈조차 꾸지 못했지!· · ·하지만 이제는 알았어. 이제는 완전히 알아버렸어, 이제
는 완전히 알아버렸다고!> 금속성의 괴물덩어리가 보여주는 아찔한 속도감에 넋을 빼
앗긴 토드의 중얼거림은 현대의 물질문명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암시해준다. 우물
안 두꺼비가 우물 밖을 보았으니 더 이상 우물 안은 매력적인 공간일 수가 없다. 이
제 두꺼비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졌다. 우물 밖으로, 세상의 길을 따라, 세상의 속도
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뛰어봐야 두꺼비지만 문명은 두꺼비를 두꺼비로 계속 놓
아둘 리가 없다. 두꺼비도 기획만 잘하면 기관차도 되고 자동차도 될 수가 있다. 언
제나 우물 안에서 촌스러운 두꺼비로만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
고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금빛 울음을 우는 곳'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은
변화의 속도를 늦추게 할 수밖에 없다. 향후 30년 이내에 세계 전체의 재화를 생산하
는 데 현재 노동자의 2퍼센트 정도면 가능하다는 예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대량실
업의 현실에서 변화는 이제 변화가 필연이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판단
아래에서 추억은 철없는 낭만주의자의 푸념에 불과하다. 빈틈없는 손익계산서가 추억
을 대체하고, 시장의 논리가 시의 논리를 압도한다.

시는 태생적으로 느린 장르이다. 곱씹어 보고 음미해야 하니 그만큼 속도에서 뒤쳐
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가 길어졌다는 역설은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옳
다. 시가 짧다는 것은 짧아진 만큼의 시간이 시 속으로 투여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
나 시가 속도를 지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시도 무서운 속도를 거느릴 수
있다. 시가 속도를 지향할 때,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은 의미다. 결국 남는 것은 이미
지와 리듬이다. 의미의 폐허 위에 리듬을 배경음악으로 이미지의 꽃밭이 펼쳐진다.
나비가 날고 꿀벌이 잉잉거리고 사과가 백설의 설경을 배경으로 탐스럽게 익기도 한
다. 바야흐로 별유천지 비인간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별천지의 세계에 적합한
인간은 '사고하는 인간'이 아니라 '유희하는 인간'이다. 유희의 논리는 단순하다. 왜
냐고 묻지 마라. 물으면 흥이 깨진다는 것. 따지기 시작하면 놀이의 즐거움은 반감되
기 마련이다. 의당 이런 문화적 토양 위에선 놀이의 문화가 개화한다. 할리우드 애니
매이션은 놀이의 문화가 얼마나 우람하게 성장했는지를 웅변해준다. 날로 번창하는
게임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가벼움이 나쁠 리 없다. 무거움과 진지함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
의 표정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과도한 가벼움은 어쩐지 수상쩍
다. 잔치가 흥겹기 위해선 한쪽에서 시비 거는 치들도 있어야 한다. 시비 거는 자들
에 의해 벌어진 틈, 그 약간 어색해진 잔치의 마당이 가타부타의 난항 끝에 다시 흥
성스러워질 수 있다면 가벼움도 한결 산뜻해질 수 있으리라.

박하사탕은 화한 느낌을 주는 사탕이다. 그러나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화하기는커
녕 껄끄럽고 무겁고 칙칙하기까지 하다. 이런 분위기는 배반이다. 모처럼 한국영화판
이 액션이다 코미디다 해서 백화제방으로 즐거운 꽃을 피우고 있는 판인데 왜 난데없
이 광주항쟁에 6월 항쟁에 고문경관이란 말인가. 잊을 건 잊어야지 왜 뒤를 돌아본
단 말인가. 왜 하필 무대도 가리봉동인가. 왜 그 구질구질한 공돌이 공순이의 터전이
란 말인가. 안양천 그 썩은 강에 달이 뜨던 곳, 촌스러움이 개딱지처럼 덕지덕지 붙
어 있던 곳, 우리가 거기서 벗어난 지가 언젠데 왜 다시 칙칙한 공간으로 우리를 끌
고 가는가. 왜 불편하게 하는가. 이 아찔한 속도, 이 휘황함이 못마땅하단 말인가.
왜 눈물의 5월을 다시 말하는가. 장화 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질퍽질퍽한 과거,
더 이상 아파서 걸을 수도 없던 과거로 왜 우리를 데려 가는가. 배반이다. 배반. 시
간이 과거로 회귀할수록 우린 무거워진다. 결국 우리가 잊은 건 없다. 인간의 바닥
에 지울 수 없는 때처럼 서려있는 고통의 기억.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뿌리였단
말인가.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하는 것, 무한속도 앞에서 시계(視界)는 제로가
된다. 모든 풍경이 그 하나의 소실점으로 빨려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비트 시대
의 젊은이들은 오토바이를 탄다.

우리가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청량리쯤에서 열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공안원들은 기
타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용케도 그것을 숨겨 대성리쯤의 강변에서 둘러앉아 기타 반
주에 도란도란 노래를 한 적이 있다. 꽁치통조림에 고추장 풀고 감자를 썰어넣고 새
우깡 안주에 소주 몇 잔. 모든 게 부족했지만 그랬었기에 모든 것이 간절했던 결핍
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가 놀던 강변으로 기차는 경적소릴 내지르며 달려가곤 했
다. 먼 꿈처럼, 아득한 기억처럼 기차는 그렇게 달려갔다.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가
다 아득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아직은 때묻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
간이, 역사가 우리를 아직은 밟고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곳에 가면 아직도 기차가 달린다. 하지만 그 소풍의 장소에 기타는 없다. 고막을
찢는 노래방 기기가 성능을 입증한다. 아줌마 아저씨들의 왁자한 춤판에 나를 먼곳에
서 선망하던 촌스런 이름의 첫사랑의 '순임'이도 없다. 그녀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
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한잔의 술에 취했으니 나쁜 기억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한
다. 속도에 취해 살았던 나날들, 사랑과 배신의 기억들, 나를 지나쳐 갔던 역사의 악
몽들, 그리고 내 손으로 저질러졌던 추악한 사건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생을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
다. 과거로 돌아가서 거기서 추억의 달콤한 즙을 야곰야곰 마시자는 게 아니다. 복고
의 추억은 반동이다. 복고의 추억은 변화를 무색하게 한다. 야만의 과거를 파스텔톤
으로 미화시킨다. 그러나 이창동의 복고는 그런 복고가 아닌 듯싶다. 제 존재의 뿌리
를 확인하는 복고는 나빠보이지 않는다. 탈주의 이름으로, 원심력의 힘으로 회전하
는 문화도 중심으로 이끄는 반성의 구심력에 의해 팽팽한 균형감각을 지닐 수 있으리
라. 역사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과거 또한 현재를 위한 과거, 미래를 위한
과거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잊자고 해서 잊혀질 일이 아닌 바에야 과거 청산은 정치가에게보다 차라리 예술가에
게 맡겨져야 한다. 예술은 기억을 통한 배출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각인된 고통
의 기억은 지우자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곪지도 않은 상처가 아물리는 없
다. 『박하사탕』은 아직 곪지도 못한 상처의 기록이다. 리듬과 이미지가 의미를 위
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아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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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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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전 영국 BBS 방송국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서 발견된 팔레스타인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예수의 모습을 복원한 적이 있었다. 뭉툭한 코와 거무튀튀한 얼굴은 여지없이 시청자들의 기대를 져버렸을 것이다. 파란 눈에 금발의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의 주장이다. 다소 선정적인 책제목이 거슬린다 해서 이 책을 놓쳐선 안 된다. 이 책의 제목에 목소리를 높여 주위의 이목을 끌어보겠다는 명민한 상략(商略)이 작용했다는 것은 지레짐작이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요란한 책 제목은 부실한 내용으로 이어진다는 선입견을 이 책은 깨끗하게 불식시킨다. 논의는 진지하고, 진지한 만큼 깊이가 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인 예수가 실제의 예수가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것은 서구인에 의해 '해석된 예수'일 뿐, 실제의 예수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다석 류영모. 함석헌, 그리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이래로 꾸준히 성장한 토착신학의 성과에 일정하게 빚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서구의 그리스도론이란 성서를 해석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 로마적인 세계에서 일반적이었던 신격화된 구원자 상을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라는 것이 안병무의 주장이었다. 안병무는 불교가 중국에 가서 그 문화에 섞이면서 선불교를 탄생시켰듯이, 예수교가 만일 서구의 그리스 로마 문명권 대신 중국 등 동북아 문화에 먼저 유입됐더라면 어찌됐을까 하는 점을 평소에 환기시켰었다. 모든 텍스트에 대한 읽기는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의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읽는 자'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면 이런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어느 종교를 갖게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만약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독일에서 났으면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서 났으면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인도에서 났으면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가 거기 태어나서 그 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종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백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백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미국 남부지방 KKK 단원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차별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 성경도 역사적,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역사적 과학적 정확성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나름대로 깨달음을 주기 위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을 비유와 은유로 구성된 하나의 철학적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피를 취하지 말라는 구절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받은 벌이 해산의 고통이기 때문에 산모의 고통을 덜기 위한 어떤 조치도 해서는 안된다는 교파 등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씌여진 축자적(逐字的) 의미만으로 성경의 의미를 고정시킬 때, 성경은 신비화․절대화되고 신학은 토론과 대화를 거부하는 닫힌 체계가 된다.

이 책은 시종일관 주류(主流)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과 배타주의적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성경은 한 점 한 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성경 무오류설, 타종교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종교 다원주의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하는 근본주의, 이런 신앙관을 가진 국가는 지구촌에 한국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서구만 해도 옛시대의 독선적인 `종교적 제국주의` 를 내던진 지 오래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가난한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런 배타적 신앙관을 벗어던진 지 오래인데도, 95%내지 90%에 해당하는 국내 기독교 신자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 탓이며, 이런 신자들은 서구에서 들려오는 신(新)신학의 소식을 사탄의 음모라고 규정하는 `대단한 영적 오만과 신학적 무지` 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잘못된 신관보다 차라리 무신론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비교종교학자이자 신자이기도 한 필자의 선언이다. 그러한 선언에는 배타적 신앙관을 가진 신자들의 신앙적 성숙과 성장을 바라는 필자의 간곡한 충정이 담겨져 있다.

올해로 회갑을 맞은 저자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이 같은 책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7년 캐나다 최대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가 기자회견을 통해 “예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 한인교회 목사들이 이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 유아기’와 ‘정신적 식민지성’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왕의 신학이론서들이 어렵고 딱딱하여 대중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쉽게 읽히면서도 선명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 어렵고 딱딱한 문제를 우화와 비유를 적절히 들어가며 풀어간 저자의 글솜씨가 글을 읽는 속도감을 누그러 뜨리지 않는다. 중간중간 나오는 관련서적 소개와 뒤에 실린 참고문헌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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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사회학 - 음주 공동체의 일상 문화
박재환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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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꽃나모 가지 꺾어 수(數) 놓고 마시고 북두성 기울여 창해수를 부어내어 도도한 취흥에 티끌 세상을 잊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말아라 내가 너의 벗인 줄 어찌 알겠는가, 나와 너의 경계를 잊는 물심일여의 흥타령을 불렀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술의 강도도 높아진다. 쌓이는 만큼 풀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요구가 술에 반영된다고 할까. 단조로운 일상은 탈일상의 욕망을 자극하는 법. 카피라이터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이용한다. 퇴근 후의 한잔, 그 속에 피어나는 여유와 웃음꽃, 이라는 컨셉트로 잔뜩 피곤한 근로자들을 유혹한다.

음주산업은 산업화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그리고 산업화가 자본주의로 발현되면 될수록 눈에 띄게 성장한다는 통계가 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1865년과 1885년 사이에 음주산업의 자본화가 거의 10배나 늘어났고 기업의 수는 4배, 그 종업원 수는 3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술의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5P 재인용)

넥타이를 풀고 기름때를 씻고 무슨 세례의식이라도 치르듯 마시라는 거다. 그리고 불쾌했던 기억, 씻으라는 거다. 당신이 실수했으면 내가 봐줄 테니, 내 실수도 좀 너그럽게 눈감아 달라는 거다.

김과장, 그 작자는 안돼. 밴댕이 콧구녕 같은 자식. 좁쌀할아범 뺨칠 녀석. 무수한 상사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상사에 대한 예우라는 의무조항이 깨진다. 욕망은 제 분수를 모르고 금기의 벽을 슬금슬금 넘기 시작한다. 서글픈 카니발이랄 수밖에. 객기가 술자리에 끼어 들고, 호기가 능청스럽게 술 한 잔을 건네 받는다. 이렇게 되면 논리는 물 건너 간다. 바람직한 토론문화를 이런 자리에서 기대해 본다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이다. 횡설이 수설이 되고 수설은 엇박자로 스텝이 꼬인다. 가볍게 한 잔 더하자는 2차는 어느덧 3차의 육향(肉香)을 찾아 하이에나의 길을 간다. 금기는 허물어지고 함께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은밀한 기쁨으로 둔갑시켜 나누어 갖는다. 이렇게 해서 공유된 죄의식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탈바꿈되고 추억이란 이름으로 갈무리된다. 죄를 묻는 것은 풍류남아로서 할 짓이 못되고 한 번의 실수쯤은 눈을 감아줘야 두주불사, 무골호인의대범한 사내가 된다. 속이 쓰려도 대범한 사내가 되기 위해 마신다. 골이 패도 쪼잔한 사내가 되지 않기 위해 마신다. 제 자신을 영웅으로 착각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내들.

그러나 아침이면 막강한 두통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햇살만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죄의식도 돌아온다. 뭔가가 께름직하다. 에라, 내가 뭐 사람이라도 죽였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자신을 용서해 보지만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축제로부터 일상으로의 복귀를 서두르자니 죽을 맛이다. 갖가지 해법이 동원되지만 혈관의 알콜 농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불안이 슬글슬금 숙취의 오전을 갉아대기 시작한다. 우우우우!

대체 이런 건 아닌데, 이런 식이어선 곤란한데, 뭔가가 잔뜩 꼬이기 시작한다.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나를 벗어버리고 훌훌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을 때, 그러나 늘 제 자리일 때, 마신다. 마셔서 나를 옷 벗어 버리듯 벗어버리는 거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더 많은 나를 잔뜩 껴입을 뿐, 나는 나로부터 한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 술은 잠시 나를 잊게 하였지만 술의 후유증은 엄청나게 나의 의식을 나에게집중시킨다. 고통은 육체를 자각하게 한다. 술로 해서 내 몸의 곳곳이 보인다. 나를 잊자고 마신 술이 오히려 나를 분명하게 일깨우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랴.

약(drug)이나 술 속에서 어떤 초월적 존재, 영성적 존재와 만났던 때도 있었나 보다. 세계의 문지방을 넘어가 우주의 숨소리를 들었던 때도 있었나 보다. 정말 그러긴 했었나 보다. 술 속에서 말이다. 그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 속에서 흑암으로부터 일어서는 권능과 천상의 쾌락을 얻었던 적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 생맥주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스텐드바에서 우리가 그것을 구할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의 술은 우리가 지극히 지상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두통과 함께 깨닫게 한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엎어놓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이곳이 결국 지상임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래, 술이 지상과 천상, 속계(俗界)와 성계"(聖界)를 이어주던 때가 있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술이 이어주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선배와 후배, 사용자와 근로자, 세일즈맨과 거래처, 평론가와 작가, 장인과 사위, 교사와 학부모. 술은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술은 금기를 깨니 서로에게 다리가 생긴다. 후배가 선배에게 한 마디 대든다. 형, 썅 그게 아니잖아.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뇌까린다. 사장님, 대체 우리들을 뭘로 보는 겁니까. 술은 이렇게 일상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윗분들께서는 그럴 때 자신의 관용성을 과시할 수 있으니 술자리가 그만이다. 아랫사람들도 나에게 윗사람에게 대들 수 있는 이 정도의 호기가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도 아니다. 업자와 거래처와의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과장님 제가 끝내주는 여자 있는데로 안내할 테니 과장님은 잠자코 있으세요>라고 하는 한 마디에서 공적인 관

계에 배제된 사적인 욕망이 어떻게 공적인 관계와 야합을 하며 나름대로의 영업을 개시했는지를 엿보게 된다.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목적성을 벗어버린 인간관계를 지향하고자 술을 대동시켜 본다. 그러나 쉽게 벗어버릴 일상이 아니다. 벗겨질 일상이 아니다. 이런 일상이 없다면 자본주의의 기둥이 뽑히고 서까래가 주저앉을 판이니 모든 과음은 자본주의의 적이 아니겠는가. 지나친 음주자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公敵)인 만큼 특별관리 대상이 된다. 그들은 라스베가스를 떠나야 마땅하다.

'피같은 술'을 마시니 나의 피와 너의 피가 같아진다. 음주는 문화적으로 '동일한 혈액형'(P.51)을 가진 배타적인 집단을 키운다. 그들은 끼리끼리 논다. 끼리끼리 놀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담화>를 만들어 낸다.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는 이렇게 해서 <공주>를 살해할 적개심을 키우게 된다. 초대받지 못한 슬픔과 초대받고 싶다는 욕망이 뒤범벅인 채 마녀들의 가슴에는 살해의 욕망, 전복의 욕망이 싹튼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키운 것은 살해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들의 식탁에서 같이 마시고 떠들고 싶다는 욕망, 바로 나눔의 욕망이었다. 같이 마시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같이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모든 회식의 자리에도 배타의 원리가 작동한다. 아무나 끼일 수가 없는 법
이다. 축제의 자리가 모든 이를 위한 자리였다면 회식의 자리는 어떤 이들을 위한 잔치일 뿐이다.

<술의 공동체는 근대의 합리적 정신이 추구하는 정신 바짝 차린 목적의식적이고 도구적인 관계들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오히려 제 정신을 잃는 그 순간, 소위 전형적인 원시의 합일과 공감을 통해 반드시 공동체의 양상을 띤다. P.78> 그랬던 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오늘날의 술자리는 여전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인사기록 카드에 무엇이 적히더라도 나는 상관할 바 없어, 라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 자유로운 사람이다. 백에 아흔 아홉은 여전히 감시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이 빠듯한 체계, 이 옥죄는 듯한 현실로부터 어떻게 판타지의 세계, 몽환의 세계, 어떤 논리로도 닿을 수 없는 피안의 감성으로 어찌하면 닿을 수 있을까. 가련하게 그는 술이라고 답한다.

입사식이다. 신고식이다. 환영식이다. 후배들은 선배의 술을 받아 마셔라. 신참은 고참들의 술을 마셔라. 남김없이 마셔라. 이제 너희들은 새로운 세계의 일원이다. 더 이상 구태의연한 과거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마셔라. 너는 이 술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술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우리들은 강하며 어떤 위험도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술의 권능이 우리와 늘 함께 할 것이다. 부수어라. 일탈하라.춤추어라, 소모하라, 탕진하라, 꿈꾸어라. 창조하라. 그러나, 술에서 솟는 것은 창조가 아니다. 마이클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극도의 피로이다. 광기도 없다. 패기도 없다. 그저 흐느적거린다. 피로할 뿐이다. 그저 잠들고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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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수첩 3 알베르 카뮈 전집 9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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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는 누구보다 사막을 사랑했다. 『작가수첩』(책세상)의 많은 구절은 사막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라고 말할 때, 카뮈가 그리워하고 있는 곳은 사막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장식도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호텔방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사막에 텐트를 치고 몇 일 동안 머물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담백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 밖에서는 구원이란 없다, 라고 말할 때의 카뮈는 무신론자요, 현세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지 않았다. 까뮈는『작가수첩』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낱말 열 개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세계, 고뇌,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가난의 고통, 여름, 바다”라고. 고독과 쾌활, 우울과 발랄이 하나로 뒤엉킨 모순의 인간, 부조리의 인간이었다. 그는 ‘정신의 사람’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누구보다 현세의 행복을 갈구했던 ‘육체의 사람’이었다.

    『작가수첩』에서 그의 현세주의는 도처에 나타난다. 그의 문장은 관념의 의상이 아니라 투명한 사물의 의상을 입고 있다. “ 저녁, 침묵, 까마귀들, 마치 루르마랭의 새들과 암코양이, 나의 눈물, 음악처럼.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배의 허리에 차는 물의 움직임을 따른다. 바다의 자유로운 삶과 이 몇 일의 행복.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지고 모든 것이 다 다시 만들어진다. 지칠 줄 모르는 빛 속에, 꽃무리와 기둥들로 뒤덮인 섬들 사이로 물 위를 날아다니며 보낸 이 황홀한 날들, 나는 그 맛을 입 안에, 가슴 속에 간직한다. 제 2의 계시, 제2의 탄생……”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념과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짜의 행복학이 아니라, 일체를 무효화시키는 사막, 그 정신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신생의 행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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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순례자 - 자연주의자 모노의 정신적 유언
테오도르 모노 지음, 안-바롱 옥성, 안인성 옮김 / 현암사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라고 말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다. 시련을 이겨내는 정신들에게는 마땅히 불모의 땅이 필요하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위대한 영혼들은 사막으로 갔다.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이라고 청마(靑馬) 유치환은 그의 <생명의 서>에서 노래했다. 위대한 영혼들이라고 해서 사막의 예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 그들에게 사막은 오히려 잔혹했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고 했던가. 사막은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킨다. 낮의 강렬한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면 사막은 초극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예수가 광야를 40일 동안 떠돈 것도 고통과 유혹을 초극할 힘과의 대면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 인간됨의 깊이와 폭이 그를 무력화시키려는 불과 모래의 시련과 맞닥뜨려 웅대한 인간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곳이 사막이다. 오래도록 사막은 초극을 갈구했던 성자들의 땅이지 않았던가. 

    사막을 성소(聖所)로 삼고 평생 사막을 탐험하며, 사막의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고, 돌을 채집했던 테오도르 모노, 그에게 사막은 연구의 공간이기도 했고, 고행과 자기 성찰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사막, 그곳엔 일체의 장식과 군더더기가 없다. 지극히 무심하고 단조로운 곳이 사막이다. 모노는 『사막의 순례자』(현암사)에서 “사막에서는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라고 썼다. 대추야자 몇 알과 낙타의 젖, 일상의 모든 잔가지를 쳐버리고 사막은 최소한의 것으로만 한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외형적인 치레는 배제된다. 사막은 아주 적은 것을 갖고 살 수 있게 하고, 또 잘 견딜 수 있게 한다고 모노는 말한다. 간디는 ’100년전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고 일갈하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소유는 지나치게 많다.

    사막에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다. 모노는 사막과 함께 하면 영원 즉 시간의 무한함을 매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라비아 불모의 사막을 거주지로 하고 있는 베두인들처럼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을 빈틈없이 계획할 까닭도 없다. 개구착(開口錯), 입을 뻥긋거려 봐야 인간의 빈틈을 노리는 모래에게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 묵묵히 한 발 한 발의 정진(精進)이 있을 뿐이다.

    불모의 땅에도 침묵만은 차고 넘친다. 소음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침묵은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 욕망으로 부글거리고 고통으로 삐걱거리는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며 우주는 천지운행을 침묵 속에 거듭한다. 소리는 공간에 어떤 육체적 질감을 갖게 하지만 침묵은 공간을 순수한 것으로 남겨두어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곳으로 존재를 확장시킨다. 그 느슨한 탈아의 체험! 저 우주의 영역 너머, 저 물질의 영역 너머, 신의 영역에까지 닿고 싶은 구도자적 욕망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사막을 찾게 한 것은 아닐까. 사막 그곳은 신과 더욱 가까운 곳이다.

    사막은 무엇보다 고독의 땅이다. 고독은 밖으로 열린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성(內省)의 눈을 갖게 한다. 고독은 무엇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일이다. 대체 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성취할 가치가 있는가, 고통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자유는 대체 무엇이며 의지는 또 무엇인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의 싸움은 충분히 치열한가, 사막의 고독은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한다.

    사막, 그곳에서는 내 살의 무게, 내 뼈의 무게만이 모래를 딛고 서있다. 고통에 민감한 육체, 그러나 어떤 끝을 보고 말겠다는 분투의 정신, 이것이 다다. 용기는 나의 사소함을 고백하는 자기 긍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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