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 시.공의 경계를 넘는 유크로니아 시대의 철학 에세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푸른숲)이란 제목을 단 김용석의 책은 난생 처음 자
동차를 보게 된 두꺼비 토드를 소개한다. <그 멋진 자동차는 모든 이들의 정열을 불
러일으키듯 온 땅과 하늘을 집어삼키면서 쏜살같이 지나갔다. 토드는 꿈꾸는 듯한 어
조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 ·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꿈조차 꾸지 못했지!· · ·하지만 이제는 알았어. 이제는 완전히 알아버렸어, 이제
는 완전히 알아버렸다고!> 금속성의 괴물덩어리가 보여주는 아찔한 속도감에 넋을 빼
앗긴 토드의 중얼거림은 현대의 물질문명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암시해준다. 우물
안 두꺼비가 우물 밖을 보았으니 더 이상 우물 안은 매력적인 공간일 수가 없다. 이
제 두꺼비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졌다. 우물 밖으로, 세상의 길을 따라, 세상의 속도
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뛰어봐야 두꺼비지만 문명은 두꺼비를 두꺼비로 계속 놓
아둘 리가 없다. 두꺼비도 기획만 잘하면 기관차도 되고 자동차도 될 수가 있다. 언
제나 우물 안에서 촌스러운 두꺼비로만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
고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금빛 울음을 우는 곳'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은
변화의 속도를 늦추게 할 수밖에 없다. 향후 30년 이내에 세계 전체의 재화를 생산하
는 데 현재 노동자의 2퍼센트 정도면 가능하다는 예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대량실
업의 현실에서 변화는 이제 변화가 필연이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판단
아래에서 추억은 철없는 낭만주의자의 푸념에 불과하다. 빈틈없는 손익계산서가 추억
을 대체하고, 시장의 논리가 시의 논리를 압도한다.

시는 태생적으로 느린 장르이다. 곱씹어 보고 음미해야 하니 그만큼 속도에서 뒤쳐
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가 길어졌다는 역설은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옳
다. 시가 짧다는 것은 짧아진 만큼의 시간이 시 속으로 투여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
나 시가 속도를 지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시도 무서운 속도를 거느릴 수
있다. 시가 속도를 지향할 때,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은 의미다. 결국 남는 것은 이미
지와 리듬이다. 의미의 폐허 위에 리듬을 배경음악으로 이미지의 꽃밭이 펼쳐진다.
나비가 날고 꿀벌이 잉잉거리고 사과가 백설의 설경을 배경으로 탐스럽게 익기도 한
다. 바야흐로 별유천지 비인간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별천지의 세계에 적합한
인간은 '사고하는 인간'이 아니라 '유희하는 인간'이다. 유희의 논리는 단순하다. 왜
냐고 묻지 마라. 물으면 흥이 깨진다는 것. 따지기 시작하면 놀이의 즐거움은 반감되
기 마련이다. 의당 이런 문화적 토양 위에선 놀이의 문화가 개화한다. 할리우드 애니
매이션은 놀이의 문화가 얼마나 우람하게 성장했는지를 웅변해준다. 날로 번창하는
게임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가벼움이 나쁠 리 없다. 무거움과 진지함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
의 표정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과도한 가벼움은 어쩐지 수상쩍
다. 잔치가 흥겹기 위해선 한쪽에서 시비 거는 치들도 있어야 한다. 시비 거는 자들
에 의해 벌어진 틈, 그 약간 어색해진 잔치의 마당이 가타부타의 난항 끝에 다시 흥
성스러워질 수 있다면 가벼움도 한결 산뜻해질 수 있으리라.

박하사탕은 화한 느낌을 주는 사탕이다. 그러나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화하기는커
녕 껄끄럽고 무겁고 칙칙하기까지 하다. 이런 분위기는 배반이다. 모처럼 한국영화판
이 액션이다 코미디다 해서 백화제방으로 즐거운 꽃을 피우고 있는 판인데 왜 난데없
이 광주항쟁에 6월 항쟁에 고문경관이란 말인가. 잊을 건 잊어야지 왜 뒤를 돌아본
단 말인가. 왜 하필 무대도 가리봉동인가. 왜 그 구질구질한 공돌이 공순이의 터전이
란 말인가. 안양천 그 썩은 강에 달이 뜨던 곳, 촌스러움이 개딱지처럼 덕지덕지 붙
어 있던 곳, 우리가 거기서 벗어난 지가 언젠데 왜 다시 칙칙한 공간으로 우리를 끌
고 가는가. 왜 불편하게 하는가. 이 아찔한 속도, 이 휘황함이 못마땅하단 말인가.
왜 눈물의 5월을 다시 말하는가. 장화 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질퍽질퍽한 과거,
더 이상 아파서 걸을 수도 없던 과거로 왜 우리를 데려 가는가. 배반이다. 배반. 시
간이 과거로 회귀할수록 우린 무거워진다. 결국 우리가 잊은 건 없다. 인간의 바닥
에 지울 수 없는 때처럼 서려있는 고통의 기억.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뿌리였단
말인가.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하는 것, 무한속도 앞에서 시계(視界)는 제로가
된다. 모든 풍경이 그 하나의 소실점으로 빨려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비트 시대
의 젊은이들은 오토바이를 탄다.

우리가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청량리쯤에서 열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공안원들은 기
타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용케도 그것을 숨겨 대성리쯤의 강변에서 둘러앉아 기타 반
주에 도란도란 노래를 한 적이 있다. 꽁치통조림에 고추장 풀고 감자를 썰어넣고 새
우깡 안주에 소주 몇 잔. 모든 게 부족했지만 그랬었기에 모든 것이 간절했던 결핍
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가 놀던 강변으로 기차는 경적소릴 내지르며 달려가곤 했
다. 먼 꿈처럼, 아득한 기억처럼 기차는 그렇게 달려갔다.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가
다 아득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아직은 때묻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
간이, 역사가 우리를 아직은 밟고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곳에 가면 아직도 기차가 달린다. 하지만 그 소풍의 장소에 기타는 없다. 고막을
찢는 노래방 기기가 성능을 입증한다. 아줌마 아저씨들의 왁자한 춤판에 나를 먼곳에
서 선망하던 촌스런 이름의 첫사랑의 '순임'이도 없다. 그녀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
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한잔의 술에 취했으니 나쁜 기억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한
다. 속도에 취해 살았던 나날들, 사랑과 배신의 기억들, 나를 지나쳐 갔던 역사의 악
몽들, 그리고 내 손으로 저질러졌던 추악한 사건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생을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
다. 과거로 돌아가서 거기서 추억의 달콤한 즙을 야곰야곰 마시자는 게 아니다. 복고
의 추억은 반동이다. 복고의 추억은 변화를 무색하게 한다. 야만의 과거를 파스텔톤
으로 미화시킨다. 그러나 이창동의 복고는 그런 복고가 아닌 듯싶다. 제 존재의 뿌리
를 확인하는 복고는 나빠보이지 않는다. 탈주의 이름으로, 원심력의 힘으로 회전하
는 문화도 중심으로 이끄는 반성의 구심력에 의해 팽팽한 균형감각을 지닐 수 있으리
라. 역사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과거 또한 현재를 위한 과거, 미래를 위한
과거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잊자고 해서 잊혀질 일이 아닌 바에야 과거 청산은 정치가에게보다 차라리 예술가에
게 맡겨져야 한다. 예술은 기억을 통한 배출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각인된 고통
의 기억은 지우자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곪지도 않은 상처가 아물리는 없
다. 『박하사탕』은 아직 곪지도 못한 상처의 기록이다. 리듬과 이미지가 의미를 위
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아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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