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황야의 7인(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버트 케네디 감독, 율 브리너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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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다릴 수 있는 자만이 용기 있는 자다.


 



 멕시코 접경의 한 마을. 농부들은 매년 마을을 노략질 해 가는 칼베라 일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결국 마을을 지키는 싸움을 시작하기로 하고, 7명의 총잡이를 고용한다. 마을에 도착한 7인의 총잡이들은 마을에 방어벽을 쌓고 총 쏘는 법을 훈련시키면서 칼베라 일당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이상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할리우식으로 리메이크했다는 영화 <황야의 7인>의 대략적인 스토리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쟁쟁한 스타들 중의 한 명은 베르나르도 역을 맡은 찰스 브론슨이다.  그는 직업적인 총잡이다. 우수가 짙게 드리운 냉정한 얼굴과는 달리 그는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 아이들도 베르나르를 좋아한다. "저도 크면 아저씨처럼 총잡이가 될 거예요." 아이들은 눈부신 사격솜씨를 가진 베르나르를 부러워한다. 그 부러움의 이면에는 비겁한 아버지들에 대한 분노가 있다. 자신들의 아버지들은 총을 잡고 싸울 줄도 모르고 그저 농사만 짓는다고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다. 이 아이들에게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겁쟁이가 전쟁터 한 가운데로 스며든단다. 진짜 겁쟁이는 너희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란다." 아이들은 왜 아저씨가 겁쟁이냐고 따진다. 그러자 베르나르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농부들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릴 줄 안단다. 씨를 부리고 기다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단다. 씨를 뿌리고 기다릴 줄 아는 용기가 없는 내가 바로 겁쟁이란다."



 어느 해에는 불볕 더위에도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지만 어떤 해에는 우기가 훨씬 지난 초가을의 폭우로 농사를 망쳐놓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자연은 믿을 수가 없다. 예측불가능한 자연을 믿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도박이다. 도박에는 당연히 자신의 밑천을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폭우나 우박으로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농부들은 씨를 뿌리고 기다린다. 그것은 분명 용기에 속한다.



 성철스님은 눕지 않고 자지도 않는 소위 '장좌불와' 수행을 팔 년 동안이나 행했다고 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행을 8년이나 했다니 입이 딱 벌어진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17세기 조선 시단(詩壇)에서 이름을 날렸던 김득신은 백이전(伯夷傳)은 1억1만3000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과 분왕(分王) 등은 2만 번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용기는 필요하다.
 반드시 총과 칼을 잡거나 주먹을 쓰는 자만이 '용기 있는 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황야의 7인>에서의 총잡이들은 용기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 그 결과를 겸허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독: 존 스터지스
출연: 율 브린너, 엘리 웰라치,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제작: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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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예요, 전 행복해요, 하지만 슬퍼요.
--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채 십분이 되기도 전에 우린 '사랑'을 운운하는 수많은 노랫말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담론의 양적인 결과에 비해 그 실질과 내용은 왜소해 보인다. 사랑의 담론이 이렇게 부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것들이 삶과 사물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과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 원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아케팅 차원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시장의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채 가지기 힘들다.

통속적인 사랑의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통속적이라는 것은 무반성적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사랑의 담론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한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가 결여되어 있다. 연인들이란 지극히 섬세한 어떤 것들을 쉴 사이 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하나의 느낌들이 극도로 민감해지는, 그래서 쉽게 깨어지기 쉬운 영혼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아니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다'라고 작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이 책의 문체는 롤랑 바르트를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라는 기존의 인식틀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미리 이데올로기화, 정치화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저 깊이 느낄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역자 김희영은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사랑의 담론을, 상상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의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라고

이 책은 그러므로 기특한 책이다.

남들에게 공개하기 아까운, 그래서 혼자 몰래 간직하고 싶기 만한 이 책을 열어 보자. 이 책은 제 몸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열어 우리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나는 내가 밑줄친 그곳을 열어 보이겠다.(바슐라르 읽기에서 고정된 나의 이런 어투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약간의 주석을 달겠다. 그 주석들은 언제나 그 책들이 나에게 촉발시킨 몽상과 사유의 흔적들이다.

참고로 이 책은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임을 밝혀두자. 이 책엔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이 등장한다. 그것의 대부분은 베르테르의 담론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사랑을 하는 모든 연인들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의 담론이다.

# 표시는 본문의 내용 그 아래는 감상적 주석

#장미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어우러진 어느날 저녁,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섬광을 교환하겠지. 모든 것은 긴 오열처럼 작별 인사로 가득한 채 ---보들레르

그와 내가 나누는 섬광은 무엇일까? 입맞춤, 아니면 어떤 느낌의 홍수, 아니면 부딪히는 눈빛들, 눈물에 반짝이는 불빛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일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 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본다. 내 육체의 어느곳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 부드러운 출혈, 채 사라지기 저에 고통을 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모. 나는 잠시나마 죽음의 뒤틀린 상념 속에 머무른다.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은 열망이 사납게 가슴 속에서 자라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격렬한 감정들. 즉각적으로 소모되고 싶은 이상한 충동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선 삶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매우 부조리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사랑 속에서 사람들은 부조리하다. 아픔의 본질은 그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안간힘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다. 그 창백함을 바라보는 존재는 초라하면서도 그 부조리함을 견디는 존재는 한편으론 위대하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과연 나를 위해 행복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 손을 뻗지 못하는 그런 기다림의 수동성이 존재를 달뜨게 한다. 다가설 수 없음이 부재를 향하여 맹렬하게 손을 뻗친다. 그의 부재가 확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다림의 자리는 뜨겁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즉, 갈망하다란 단어가...입김을 불 때마다 그 불완전한 입김이 서로 상대방의 입김에 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녹이는 것으로서의 포옹의 이미지. 그러나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의 감옥에서 나는 행복한 유폐자다. 그러나 '행복한'이란 말은 한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픈 행복이기에. 사랑의 찰과상이 주는 아픈 행복들.

#일생을 통하여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오로지 나는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사랑엔 멀티태스킹이 있을 수 없다. 내 욕망은 놀랍게도 오직 하나만을 요구한다. 둘은 희미하다. 오직 하나만이 강렬하다. 하나는 둘보다 강하고, 셋보다 격렬하다. 나는 무리중에서 오직 그만을 구별해낸다. 하나가 없는 모든 다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를 돌려다오.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나는 타오르는 나를 본다. 그 불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마저 태운다. 롤랑바르트는 말한다.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이성은 정열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런 우열이 정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사랑과 욕망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연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까? 욕망은 대상을 수중(手中)에 두려고 한다. 대상이 저항할 때, 그 저항이 불가항력적일 때 욕망은 스스로를 자학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그때 욕망의 큰 구렁에 자학의 늪이 고인다. 욕망은 단지 큰구멍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야만 욕망은 편안하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점 둘레를 넓혀 간다. 욕망은 확장적이다. 더 깊은 곳을 찾아서 손을 뻗친다.

#자신의 불행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계하는 어떤 고행의 행위를 시도한다.(생활방식이나 옷차림 등에서)

그는 격렬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버린 듯 멀리 있는 것들, 천문학과 해양학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는 은둔자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기도 하고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평소에 입지도 않던 스커트를 입기도 한다. 도발적으로, 그녀는 태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문다. 그들은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표면의 변화가 내적이고도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기를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세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위엔 하염없는 융합에의 욕구가 스며 있다. 세계가 변화하여 그와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 터무니없는, 불가능을 꿈꾸는, 슬프고도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렛 같은.

#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만을 느껴야 하는 등등.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복 또한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나는 지나친 불행과 지나친 행복을 경계한다. 날것 그대로의 삶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고통뿐인 사랑은 없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 감정의 질료들이 섞여 있다. 혼재되어 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람을 느끼면서도 때론 격렬한 어둠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일관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다.

#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림이란 시간 속에서 풍화되고 마모된다는 것, 시간 속에서 자신을 해체하는 것. 그런 아주 느린 소멸!

# 내 정념의 서정적 진술에, 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까? 지나침, 광기, 그것이 내 진실이며 힘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진실, 이 힘이 결국에 가서는 그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닐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바로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뜨려선 안 된다"(클로틸드 드 보)...그렇지만 정념을 (다만 그 지나침을)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맨 얼굴, 가면이 없는 얼굴이 진실일까. 그럴만큼 존재는 순수한가. 가면 속의 맨얼굴이 혹 더 교묘한 가면은 아닐까. 가면 없이 순수할 수 있는 존재란 오직 어린아이가 아닐까. 내가 나의 순수를 스스로 보장할 수 없을때 나를 가린다는 것은 미덕이지 않을까. 대체 어떻게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럴때 드러내기 위해 감추는 역설은 드러난다. 부끄러울 치[恥]란 글자는 귀[耳]에 마음[心]을 앉혔다.마음에 달린 귀가 우리의 욕망을 들을 때 우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귀는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귀가 너무나 열려있을때, 그 귀가 긴장감을 누그러뜨리지 않을 때, 마음은 질식한다. 때로 그 귀를 닫아야 할 때가 있다. 양심적인 것만이 우리를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이 우리를 비양심적으로 살게 할 어떤 권리나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 내가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육체는 조종할 수 없다...내 육체는 고집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육체를 육체로놓아 둬선 안된다. 말(혹은 이성)을 말로만 내버려 둬선 안된다. 그 둘을 통합한다는 것은 대단한 현명함을 요구한다. 우린 언제나 그 어떤 하나에 쏠릴 위험을 안고 산다. 누가 중용의 대가인가. 우린 스스로 그 대가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대중의 일원이 된다. 고고함을 꿈꾼다는 것, 불가능한 것을 소망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동화적 망상이어야 할까. 소시민임을 자처하면서 그 소시민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우린 신화적 힘과 권능을 탕진한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어디에 있을까.
내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 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축복이란 그런 것들이 아닐까. 닿을 듯 닿을 듯 손 닿지 않는 곳에서 그리움은 폭발한다. 널 그리고 그대를 내 그리움의 끝에 둔다.

# 안착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안착되었다"고 생각한다.그들은 모두 어떤 계약상의 관계의 실질적이고도 감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자신만이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여겨져, 부러움과 비웃음의 모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밤의 등성이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어떤 이들은 그 불빛 속의 휴식을 그리워 한다. 그들은 방이 그리운 것이다. 티끌처럼 점처럼 떠돌며 그들은 방이 그리운 것이다.나는 지금 내가 오래 전에 읽은 이하석의 한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절들은 나의 마음에 살러 왔다. 차가운 얼음들이 나의 이빨로 달겨들던 시절. 우리들의 자취방에 가득했던 스산한공기들. "...우린 늘 방이 그리웠지요. 그러나 우리의 방은/ 어디에도 없고, 티끌처럼 점처럼 우린 떠돌지요./ 때론 눈물의 집 속에 들어 내가 바깥을 내다볼 때,/ 내가 깃든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의 집은/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져버려요/ 세상 밖 어디에서 땅을 ㄹ어 세상 밖/ 어디에다 우리 집을 지을까요? 도꼬마리 청석 위/ 우리가 가구는 세상은 도시의 빈터만큼/ 눈물겨워요. 이 도시의 버려진 빈터에서/ 당신을 읽어요..."

# 충족된 연인은 글을 쓸 필요도,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쓴다는 것은 공허를 채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의 허기를 스스로 달래는 그런 노동. 새벽 쓰린 속을 달래려 곤로에 찬물을 얹으면 유리창에 달라붙는 새벽의 입자들. 부유하는 불빛들. 그러나 허기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허기는 보여준다. 그가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허기는 큰 구멍이다.

#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내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 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잘 감시된, 애정에 넘쳐 흐르면서 예의를 잃지 않는 이 처신에, 우리는 부드러움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개화된, 예술적인) 형태이다.

그를 본다. 그녀를 본다 냉정해지자고 다짐하는 그와 현명해지자고 다짐하는 그녀. 잘 감시된, 잘 관리된 애정 속에 자신을 세워 두자고 그들은 다짐한다. 품위를 잃지 않기를~~하며 그들은 다짐한다. 그런 다짐과 품위가 한낱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시대. 니이체는 말한다. "그대들이 대중의 일원이기를 멈추고자 한다면 단지 그대들의 안일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고. 우린 더 큰 세계의 싹이 아닌가.

# 손을 꽉 잡는다는 것--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려진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손가락 하나에도 수많은 기호를 담을 수 있는 그들. 그들은 너무 잘 느낀다. 지나쳐야할 것들마저도 놓치지 않는 그런 섬세함으로 그들은 상처 받는다.

#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사유는 언어다. 언어 없는 사유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유도 사유지만, 나는 내가 아는 사유로 사유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거나 조립하는 시는 헌정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나는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당신을 숨막히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한다라는.

그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때 새는 가장 극진한 소리로 울지 않던가.

# 나는 내게 상처를 주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며, 또 하나의 상처가 내도하여 그것을 잠시 잊게 할 때까지, 다른 이미지들로 양분을 주고 부양한다.

상처를 덧내는 사람들, 그 상처속에서 아픈, 그러면서도 달착지근한 즙액을 야곰야곰 갉아 먹으려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고통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갱생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하다. 어두운 자들에게 고통은 좌절의 양식이다.

# 한 영국 귀족이 <베르테르>에 의해 야기된 자살 전염병에 대해 괴테를 비난하자 괴테는 순전히 경제 용어로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당신네의 상업 체제가 수천의 희생자를 낳게 했는데, 왜 그 중 몇 명을 <베르테르>에 허용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것이 현대의 윤리다. 터무니없는, 내가 한번도 동의한 적이 없는.

# 살갗이 벗겨진,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사랑에 관한 한 그것은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지 깃털로 감싸인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랑은 그렇다.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말이란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다. 그러니 그 말의 현재밖에 있는 당신은 그 말에 묶이지 마라. 당신의 현재엔 또 다른 언술이 필요한 것이다. 책에 언급된 말들은 어떤 순간에만 헌신한다. 발화자의 상황과 문맥에 헌신한다. 당신에겐 당신의 문맥이 있다.....그러나 한입으로 두말을 해도 말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 사랑의 포옹은 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완전한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처럼만 보일 뿐이다.

# (사랑의 정념은 정신착란이다, 그러나 정신착란은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착란에 대해 말하며, 그리하여 이제 길들여졌다. 불가사의한 것은 오히려 정신착란의 상실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돌아갈 것인가?)

미셀 푸코의 난해함을 모두 감당하긴 힘들다. 그러나 <현대>가 위에서 말한 착란을 범죄로 몰고 있다는 데엔 그가 동의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내가 아는 미셀 푸코다. 곳곳에 처벌의 기제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러니 자신만만할 수 있는 연인들이 몇이랴. 통제된 곳에서의 축제는 엄밀히 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한부 외출에 불과하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뻔하게 들여다 보이는, 얕은 수작의 시간들. 거기에서 광기는 슬픈 속임수다. 어떤이들은 그 축제의 한복판에 슬쩍 유리구두를 벗어 놓음으로써 그 시간이 좀더 연장되기를 바란다.

# 나는 사랑의 상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나 상상적인 것은 불이 잘 안꺼진 이탄처럼 그 밑에서 타오르고 그리하여 다시 불붙는다. 단념한 것이 다시 솟아오른다. 잘 안 닫혀진 무덤에서 갑자기 긴 외침이 폭발한다.

그 불은 잘 안 꺼진다. 그 무덤은 잘 안 닫혀진다. 왜냐면 불을 꺼야할 당사자가 그 불이 완전히 꺼질 것을 두려워해서 가슴 속 어딘가에 불씨를 자꾸 숨기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방화자다. 타인의 충고를 듣는 척은 하지만 그는 애초에 불을 끌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꺼지려고 하는 불에 기름을 붓는다.

# 기진맥진 한 목소리, 희박한, 핏기없는 목소리, 세상 끝에 다다른 듯한 목소리, 그리하여 이제 차가운 물 속 깊숙이 잠겨가는 목소리. 목소리는 피곤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처럼, 이제 사라지는 중이다. 피로는 무한 그 자체이다. 끝내는 것을 끝내지 않는 것. 이 간략하고도 짤막한,너무도 드물어 퉁명스럽기조차 한 목소리, 이 멀고도 다정한 목소리의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마개가 된다. 마치 외과 의사가 내 머리 속에 커다란 솜뭉치를 처박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피곤할 땐 의미가 귀찮다. 여지껏 지탱해온 이성이 털푸덕 땅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들을 위로하겠다면 그가 칩거해있는 방의 열쇠를 멀리 던져 버려라. 누구도 그의 문을 열 수 없게.

# 축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의 모든 만남을 하나의 축제로 체험한다...어떤 엄청난 즐거움의 총체요, 향연......

어떤 사람이 말한다. 제길, 축제가 뭐 이래.

#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타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포 속에 인지한다....나는 영원히, 파괴불능인 채로 나 자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치는 것이며, 견고하기 때문에 미치는 것이다.

<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라고 최승자는 말한다. 그러나 <나>처럼 견고한 성은 없다.

# 옷...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만남 때에 입었던 옷이나 또는 사랑하는 이를 유혹할 목적으로 입는 옷 때문에 야기되거나 부양되는 모든 감정적 동요...나는 나를 열광케 하는 한 만남을 위해 나는 정성스럽게 화장한다.

그런 치장의 시간을 헛된 소비가 아니다. 독서의 시간만큼 그런 시간은 소중하다. 몸의 단장도 영혼의 단장에 못지 않음을 인정하자. 살아서의 초라함을 죽음으로 보상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난해주는 동지들이 있다. 물질의 소모에 집착하는 물질적 현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필요한 때만 손을 잡아주는 그런 통일전선을 경계하자. 그들은 소비만을 생각할 뿐이다. 일부 통합을 위해서 전반적인 야합은 있을 수 없다.

# 나는 한권의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에 대해 자신을 투사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밀착하여 책의 마지막까지 그 이미지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이런 동일시!!

바로 '이 책 속의 그는 나다'라고 그들은 동일시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그 책 속의 이미지를 온전히 자기것으로 할 수가 있다. <홍당무>를 읽으며 어떤 소년은 자기의 엄마가 의붓엄마라고 생각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추위, 그것은 어머니의 체온을 필요로 하는 어린애의 추위 타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를 안아 주어라. 그럴 때 그는 의외로 착한 소년이 된다.

# "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란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란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인 행위이다.

이해가 사랑의 전초단계라면 이 세상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논리 서적들이 범람할 것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

#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당신은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없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

'신께서 선악과에 대한 금지를 명하신 것이 곧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로 그 자유가 우리들의 기쁨의 원천이다.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통제할 수 있는 한 말이다.

# 견딜 수 없는 것. 사랑의 고통의 축적된 감정이 드디어 "이렇게 계속할 수 없어요"란 외침으로 폭발한다는 것.

잘 관리된 이성의 규율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런 단발마적인 절규......

# 자살의 상념, 결별의 상념, 은둔의 상념, 여행의 상념, 봉헌의 상념 등. 나는 사랑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해결책을 상상할 수 있으며, 또 끊임없이 상상한다...사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에 대한 환상적인 조작..사랑의 담론은 일종의 유폐된 출구이다...상념이란 항상 내가 상상하며 감동하는 하나의 비장한 장면, 곧 연극이다...때로는 작별의 장면, 때로는 한 통의 엄숙한 편지, 또 때로는 충만한 해후의 장면이기도 하다. 재앙의 예술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연극의 기원에 대한 이론의 하나로 위의 의견을 첨가하고 싶다. 혼자 버려둔 생각은 뭔 짓인들 못할까. 그를 죽이고,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고, 웅장한 스펙타클로 이별을 준비하고, 감동으로 격정적인 헌시를 바치고.

# 사랑의 우수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끝없이 사라진다. 마치 욕망이 이런 출혈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 사랑의 피로가 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 입을 크게 벌린 사랑, 또는 내 모든 자아가 대신 자리를 차지한 사랑의 대상에게 끌려가며 이전되는 것.

내 영토의 등기부엔 아직도 내가 소유주다. 나는 이전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전되지 않는다.

# 비틀기는 놀이가 아닌, 상투적인, 강박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의례적인 조작이다. 이처럼 다변에 사로잡힌 연인도 자신의 상처를 만지작거린다....이제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자의 역할, 그 역할을 나는 내 앞에서 연기하고 그러면 그것은 나를 울게 만든다. 나는 내 스스로의 연극 무대이다. 이렇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것은 더욱더 나를 울게 만들고, 그러다 울음이 멈추려 하면, 다시 울음을 솟구치게 할 가혹한 말을 자신에게 내뱉는다.....마지막 난장판에 이르는 그런 말의 즐김.

자신의 연기를 자신이 지켜 보아야 하는 그런 쓸쓸함. 타인들이 나처럼 나를 지켜봐 줄 순 없다. 그렇다 난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 침묵 중의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어머니, 침묵만 하는 어머니, 그 침묵이 편하면서도 두려운 것은 왜일까요.

#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소득의 밤, 정교하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비의 밤이다. 나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 사랑의 내부 안에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 방임의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오랜 시간 긴장해 있지 않았던가.

#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슈베르트 <눈물의 찬가>..눈물, 액체의 확산 속에 적셔진 육체..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육체의 메시지를 거두어 들이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눈물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해서 여지껏 나의 사유의 도구였던 말을 헌신짝 버리 듯 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말로 사유하고 그리워 하지 않았던가. 언어에 대한 불신도 하나의 상투적인 태도가 되어 버림으로써, 제대로된 논리마저 불신 받는 웃지 못할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잘 사고된 말은 성숙하지 못한 직관보다 더 절실 하다.

# 잡담. 사랑하는 이가 잡담에 휘말리거나, 또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그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픔...공동의 담론이 나의 그 사람을 빼앗아, 저기 존재하지않는 모든 사물들에도 적용되는 그런 보편적인 대체물의 핏기없는 형체로 되돌려 줄 때, 나는 마치 그 사람이 죽어, 축소되어, 언어의 거대한 능벽 안 유골단지에 안치된 것처럼 보인다.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는 없다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내밀하고 고독한 세계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정, 이것은 소유의 감정이 아니다. 그의 내부가 고요히 그리고 무한히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육체의 중심부, 심장까지), 주체는 더욱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주체란 내면성 그 자체이기에(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상처이다 닫혀지지 않는 근본적인 열림(존재의 뿌리까지)거기서 주체가 흘러나오며, 바로 그 유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주체로 설정한다.

상처는 어떤 중심점을 향해 타오른다. 거기에서 주체는 맹렬해진다. 격렬하게 흘러 나온다. 나무의 심장은 수액으로 가득차 있어 뜨겁다.

# 하나의 대담한 출현이 내 마음 속에 상처를 열게 한다....나를 명중하는 일시적인 자태...나는 내게 말해진 한 문장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문장이 내 욕망을 건드리는 그 어떤 것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추억처럼 내 마음 속에 살러 올 그 통사론적인 형태(그 틀) 때문이다.

어떤 문장은 내 마음에 살러 온다. 나에게 살러 오는 문장들을 위해 책을 연다.나는 행복한 벌집이 되겠다.

# 작업 중의 자세란,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순진성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 혹은 그의 무관심의(내 부재에 대해) 기호를 보내면 보낼수록, 나는 마치 사랑하기위해서는 기습과도 같은 고대의 유괴양식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누구를 의식하지 않는 저 방임된 몸짓,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자의 유연함,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미루나무 한 그루 같은 그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바라보고 싶은 이런 충동.

# 사랑의 담론은 방안을 돌아 다니는 파리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동요하는 문형들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Dust in the wind?

# 나는 메시지의 본질(이를테면 소문의 내용) 속으로 고통스럽게 파고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메시지의 근거를 이루는 힘을 의혹의 시선으로 신랄하게 따져보는 것이다....울림이란 완벽한 말듣기의 열성적인 실천을 의미한다...울림의 공간은 육체이다.

울림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바슐라르식으로 말해서 <말의 공기적 진실>에 참여하는 일. 나를 좀더 잘 울리는 공명통으로 만드는 일. 메시지의 주파수에 내 수신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

# 하이네는 말한다. "당신의 품 속에 웅크리기위해 나는 무덤 속으로 내려 갈 것입니다" 또 베르테르는 말한다 "사람들은 귀한 종류의 말(馬)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은 너무 열심히 달려 흥분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혈관을 물어뜯어 보다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걸세. 나도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네. 영원한 자유를 얻기 위해 내 혈관을 열어 젖히고 싶은 생각이"...자살!

이제 끝이 온 것이다.
베르테르여
다른 세상에서 그대의 피가 잘 돌거라
자유로와지거라


#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꿈꾼다...그리하여 나는 형용사가없는 한 언어에 도달한다. 나는 그 사람을 그의 자질에 의해서가 아닌, 그의 실존에 의해 사랑한다.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만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신뢰감이 상처 받기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 어떤 형용사도 덧붙임이 없이, 그것을 해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내가 즐기는 텍스트.

그런 단순성 속에 우리의 하루가 깃들기를!

# 다정한 몸짓은 이렇게 말한다. 내 육체를 잠들게 하는 너의 무엇도 즉시 소유하려 함이 없이, 너를 가볍게 조금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부디 그래 다오

# 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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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브리티 2005-01-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은데 8000원짜리를 20000원으로 부풀린 건 좀 너무했죠... 그렇지만 없으신 분들은 꼭 소장하기를 권하는 책.

겨울나기 2006-05-31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심을 찌르는 글들...크게 공감하면서 봤습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6-10-2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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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는 시간.



보르헤스의 틀뢴,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추상화된 언어로 불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어떤 공통적 성질을 추출하는 추상(抽象)의 작업은
결국 유(類)로는 환원될 수 없는 개체성을 버리는
사상(捨象)의 과정 속에서만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틀뢴, 그곳에서는 사물들은 개별성의 훼손됨이 없이
자기 고유의 이름으로 명명된다고 합니다.
틀뢴에서의 사물들의 이름은 그 개별적 사물만이 갖는
독특한 향기와 빛깔과 질량을 함유하겠지요.
하기사 4월의 라일락과 6월의 라일락을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우리들의 명명체계는 얼마나 허술하고 부실한 것인지요?
分類와 抽象의 위협으로부터
유일무이한 나만의 오리지낼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 틀뢴,
그곳에서 지금 창 밖에서 마악 꽃봉오리를 여는 라일락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었을까요?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는 華嚴論的인 명제는
틀림없이 나는 네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이 키워낸 부산물일 것입니다.)

모든 類와 種에 아랑곳없이
존재의 특이성이 남김없이 보장받는 곳 틀뢴,
언어의 모음과 자음들이
존재의 유일무이한 광휘를 찬양하는 데 바쳐지는 그곳에서는
사랑이나 우정은 망각에 저항하는 도착적(倒錯的) 열정으로
'이곳'만큼은 아프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현재의 바람이 '살아 있음'의 유구한 기쁨을 노래하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은 오늘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햇살 아래 한 순간을 살다가는 육체들은
열려진 가능성의 미래를 잊은 채
오직 현재를 유일한 기쁨으로 승낙할 것입니다.
그런 현세주의는 근사합니다.
우린 너무나 많은 희망의 노래에 길들여져 왔고
슬픔이나 절망의 초월적 권능을 과장하는 문화에
필요 이상의 상상력을 고갈시켰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희망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의미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보르헤스의 세계는
어찌 한 줄이라도 읽힐 수 있겠습니까?)

보르헤스의 주인공은
틀뢴의 백과사전 11권을 발견한 놀라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밤의 밤>이라 불리는 어떤 밤이 있다.
그날 밤은 하늘의 비밀 문이 넓게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진다고 한다.
만약 하늘의 비밀문이 열렸었다 해도,
나는 그날 밤은 그처럼
이상한 정신적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누가 깊은 숨을 들이 쉬며 쉬어 가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움은 그런 짧은 정지 속에서 기쁨의 순간을 연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틀뢴은 현실태로서 가능한 곳일까요?
모든 존재가 남김없이 자신의 독자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계가 참말로 있을 수 있을까요?
추상의 욕망이 무장해제된 세계,
만약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의 시간은 '이곳'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갈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을 포착하려는 꿈이
그것들을 뭉뚱그려 한데 묶으려는 추상의 욕망을 낳지는 않았을까요?)
'이곳'에서의 찰나가 '그곳'에서는 한 生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의 사물은 오래도록 자신의 광휘를 잃지 않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시간이 덧없이 흐르는 곳에서
기억은 망각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겠지만
느린 시간 속에서 의식은 하품을 하며
나른한 현재를 즐길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누워 있는 안락한 의자 밑으로
구름 한 점이 낙엽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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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 예문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규칙적인 수영과 조깅으로 복부와 종아리에 여전히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40대 중반, 그것이 하루끼의 이미지다. 그의 모든 소설의 장정은 조깅복 상의를 입은 그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신는다는 운동화와 조깅복은 하루끼의 단순한 기호물에서 그치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장은 그에게 불편하다. 그것은 무겁고, 무거운 만큼 보행을 늦춘다. 달리고 싶은 자에겐 조깅복과 운동화면 그만이다. 워크맨의 경쾌한 음악이 그로 하여금 구름의 보행을 닮게 할 것이다.

재즈에서 얼터너티브, 윌리엄 와일러에서 스필버그까지 아메리칸 문화의 뒷골목까지 하루끼는 빠삭하다. 그는 대단한 문화적 식욕을 가졌고 그런 문화적 식욕을 오늘날의 젊은 문인(문인뿐이겠는가. 오늘날의 재즈붐과 문화적 담론의 팽창을 보라. 개나 소나 재즈고 영화다.)
들은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눈치다. 마치 그런 문화적 식욕의 부진이 문화적 후진이라도 되는 양. 거리의 장식장과 그 안에 디스플레이가 그렇듯 가볍고 경쾌하고 산뜻한 하루끼의 보행. 하루가 멀다하고 버전업되는 자본주의적 속도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하루끼. 그는 그 자본주의적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조깅을 하는 것일까.

하루끼와는 많이 다른 곳에 마루야마 겐지가 있다. 그는 좀 삐딱하다. 다소 거칠고 야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소설 <달에 울다> 장정에 있는 그의 사진은 어떠한가. 검은 선글라스. 팔없는 검은 나시 티셔츠와 검은 바지와 검은 구두와 검은 양말. 의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
키기 위해, 조깅이나 수영으로 만든 육체가 아니라 선천적인 꼬장꼬장함으로 인해서 만들어졌을 법한 다소 신경질적인 육체, 그것이 마루야마의 몸이다. 수틀리면 한방 내지를 기세의 육체. 이런 사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잖음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의 가족>으로 나의 입을 반쯤 벌어지게 했던, 마루야마의 문장은 독보적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뒤척이지도 않는다. 이불에 누운 채, 달빛에 의지해서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낡은 병풍의 묵화를 바라보고 있다. 벌써 오랫동안 그러고 있지만, 몸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특히 발가락이 시리다." 이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달에 울다>는 무엇보다 '괜광씬?문체'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내용이고 세계관이고 간에 소설은 무엇보다 문체가 아닐까'하는 비약을 자연스럽게 한다. 간결한 문장,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는 칼로 자른 듯하다. 극도로 투명하다. 그의 문장은 요란하지 않지만 그 맛이 오래 간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루끼보다 훨씬 더 기교적인지 모른다. 밖으로 드러내는 기교가 아닌 감추는 기교. 에이, 난 그런 거 몰러, 하는 식의 능청스런 기교.

<달에 울다>의 첫 페이지의 문장들을 보자. "식수림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다시 한번 바닥없는 정적에 푹 잠기고, 여기저기에서 실개울 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안개처럼 조용하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것은 몇만이라는 누에가 뽕잎을 부지런히 뜯어먹는 소리이다. p.11" 실개울이 불어나는 소리를 듣는 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귀, 이것이 겐지의 귀다. 하루끼의 귀가 비틀스에게 열려 있다면 겐지의 귀는 실개울과 뽕잎에 열려 있다. 그의 귀는 불가능한 것을 듣는다. "법사는 여울을 건너는 발소리를 알아차린다.p.14"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린다고 하는 것이 선사들의 어법이다. 겨자씨 안에도 수미산이 있다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그러나 선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분고분하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어법도 그런 것이리라. (귀란 모름지기 들리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뭐 헌법에라도 있단 말인가? )

귀신의 귀를 빌렸는지 그의 귀는 때론 불가능 너머의 것까지를 듣는다. "" 강물 소리, 세 가지 종류의 개구리의 합창, 아버지의 짐승 같은 심음 소리. 예전에 누에방으로 사용하던 아랫층 마룻방은, 지금은 텅 비고, 고요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죽은 사람들의,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기척이 넘실거리고 있다.p41" 그는 고백한다. "내 청력은 나이와 더불어 예리해 가고 있다. 예컨대, 사과나무가 땅 속의 물을 빨아먹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이런 과장된 청력은 어쩌면 겐지의 능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겐지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픽션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겐지의 매력은 투명한 노골성에도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그런 천진성(겐지를 너무 과찬하고 있는 건가? 하긴 계집이 이쁘면 방귀냄새까지 향기롭다지 않은가)이 겐지에겐 있다. "야에코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고 씩웃더니 활짝 가슴게를 열어 보였다. 모양새 좋은, 소독액보다 더 하얀 유방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는다.p.40", "야에코의 모습은 전라나 같다. 사타구니 부분, 그 훨씬 안쪽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몹시 혼란스럽다.p.46"

많은 사람들이 하루끼는 흉내내도 겐지는 흉내내지 않는다. 난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곳에 인파가 드글거릴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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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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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도 그랬지만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의례 수필에 대한 묘한 저항감을 나타내 보인다. 문학가들의 그런 저항감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잡문(雜文)을 쓴다는 식이라든가, 시의 타락이 소설이요, 소설의 타락이 수필이라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르의 위계 질서가 엄존하는 곳에서 시나 소설이 아닌 글들은 간단하게 잡스런 글들로 분류된다. 서양쪽이나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사정이 어떨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에서 잡문에 대한 점수는 그리 후한 편이 못된다. (대체 장르에 대한 이런 식의 평가가 어떤 기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국 현대 문학에서 사유와 문체가 잘 버무려진 맛깔난 에세이를 읽기가 쉽지 않다. 김소운이나 윤오영의 수필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글을 향한 조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그 양이 적다. 파스칼의 『팡세』와 같이 문체의 요모조
모를 뜯어보는 즐거움과 함께 거장의 정신의 광맥을 짚어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책은 불행하게도 그리 많지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법 빗줄기가 굵은 소낙비다. 김화영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문학상상력의 연구』도 문체와 사유가 행복하게 악수하고 있는 아주 희귀한 예에 속할 것이다. 여러번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논문이라면 나는 김화영의 카뮈 연구서인 『문학상상력의 연구』를 권한다.

적어도 김화영의 이 책에서만큼은 <아름다운 논문>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하다. 이윤기의 『어른의 학교』도 호우급에 속한다. 그 빗줄기가 사뭇 시원하다. 이문열이 그랬던가. 이윤기의 소설은 잔재주로 안개를 피우지 않는다고. 그런 사정은 수필에서도 마찬가지. 분위기로 멋을 부리지 않는 대신 그의 의뭉은 여전히 한 소식을 전한다. 귀밑이 희끗희끗한 이 아저씨는 능청스럽게 사람을 웃긴다. 본심을 슬쩍 뒤로 감추고 짤막짤막한 스타카토식 발언으로 소위 '뒷다마를 까는' 솜씨는 고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글을 꼬부려서라도 미문을 쓰겠다고 덤비는 요즘의 신세대 작가들도 한 번 눈여겨 볼 만한 문체다. 국내 몇 안되는 유능한 번역문학가로서 잔뼈가 굵은 그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얻었음직한 인문학적 교양으로 한껏 글의 후광 효과를 살린다. 선가(禪家)의 에피소드들도 재밌다. 책의 여백은 시원하다. 북디자인 방면에서 그래도 한다 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정병규의 솜씨가 책의 외양을 산뜻하게 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정재규의 컷도 운치가 있다. 꼼꼼히 읽으면 이윤기의 콤플렉스가 보인다. 대충 읽어도 이윤기의 유머는 보인다. 내 마음은 이런 구절에 기표했다.

사다리를 버린다(去梯)커니, 통발은 잊는다(忘筌)커니,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不立文字)커니 하는 거 아무나 지망지망히 시늉할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누각에 오른 연후에야 버리는 것(登樓去梯), 통발은 물고기를 잡은 연후에 잊는 것(得魚忘筌)입니다. 자기 근기(根氣)는 요량도 못하는 채 뭘 불싸지르고 뭘 버리는 거 좋아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적어집니다. 맥도 모르고 침통 흔들 것이 아니라 모두 배우는 일에 겸손해졌으면 합니다. 옛 선사 한 분의 말씀이 들어둘 만합니다. <언필칭, ' 불립문자 '라고 하나 문자도 방편될 것이면 가히 길동무 삼을 만한 것이라(그러니까 까불지 말거라).>

옳다. 언어나 논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달리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김용옥도 그런 말을 했지만 논리의 극단에서 초논리이어야지 논리란 논리는 모두 정리해고한 후에 초논리하자는 것은 우습다. 아니 위태롭다. 공자님도 우군으로서 여기에 한 마디 거드신다. <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사색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우니라.

사족: 여백도 좋고 운치도 중요하지만 지면을 낭비하는 것도 그리 좋은 미덕은 아닌 듯싶다. 장식도 좋지만 그것으로 해서 책값이 올라가고 그래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자꾸 주머니 눈치 봐야 한다면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호화양장본은 재벌 회장님 자서전이면 족하지 싶다. 반론이 있겠지만 뒷주머니에 찔러넣을 수 있는 사이즈와 가격이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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