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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평점 :
김수영도 그랬지만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의례 수필에 대한 묘한 저항감을 나타내 보인다. 문학가들의 그런 저항감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잡문(雜文)을 쓴다는 식이라든가, 시의 타락이 소설이요, 소설의 타락이 수필이라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르의 위계 질서가 엄존하는 곳에서 시나 소설이 아닌 글들은 간단하게 잡스런 글들로 분류된다. 서양쪽이나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사정이 어떨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에서 잡문에 대한 점수는 그리 후한 편이 못된다. (대체 장르에 대한 이런 식의 평가가 어떤 기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국 현대 문학에서 사유와 문체가 잘 버무려진 맛깔난 에세이를 읽기가 쉽지 않다. 김소운이나 윤오영의 수필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글을 향한 조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그 양이 적다. 파스칼의 『팡세』와 같이 문체의 요모조
모를 뜯어보는 즐거움과 함께 거장의 정신의 광맥을 짚어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책은 불행하게도 그리 많지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법 빗줄기가 굵은 소낙비다. 김화영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문학상상력의 연구』도 문체와 사유가 행복하게 악수하고 있는 아주 희귀한 예에 속할 것이다. 여러번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논문이라면 나는 김화영의 카뮈 연구서인 『문학상상력의 연구』를 권한다.
적어도 김화영의 이 책에서만큼은 <아름다운 논문>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하다. 이윤기의 『어른의 학교』도 호우급에 속한다. 그 빗줄기가 사뭇 시원하다. 이문열이 그랬던가. 이윤기의 소설은 잔재주로 안개를 피우지 않는다고. 그런 사정은 수필에서도 마찬가지. 분위기로 멋을 부리지 않는 대신 그의 의뭉은 여전히 한 소식을 전한다. 귀밑이 희끗희끗한 이 아저씨는 능청스럽게 사람을 웃긴다. 본심을 슬쩍 뒤로 감추고 짤막짤막한 스타카토식 발언으로 소위 '뒷다마를 까는' 솜씨는 고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글을 꼬부려서라도 미문을 쓰겠다고 덤비는 요즘의 신세대 작가들도 한 번 눈여겨 볼 만한 문체다. 국내 몇 안되는 유능한 번역문학가로서 잔뼈가 굵은 그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얻었음직한 인문학적 교양으로 한껏 글의 후광 효과를 살린다. 선가(禪家)의 에피소드들도 재밌다. 책의 여백은 시원하다. 북디자인 방면에서 그래도 한다 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정병규의 솜씨가 책의 외양을 산뜻하게 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정재규의 컷도 운치가 있다. 꼼꼼히 읽으면 이윤기의 콤플렉스가 보인다. 대충 읽어도 이윤기의 유머는 보인다. 내 마음은 이런 구절에 기표했다.
사다리를 버린다(去梯)커니, 통발은 잊는다(忘筌)커니,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不立文字)커니 하는 거 아무나 지망지망히 시늉할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누각에 오른 연후에야 버리는 것(登樓去梯), 통발은 물고기를 잡은 연후에 잊는 것(得魚忘筌)입니다. 자기 근기(根氣)는 요량도 못하는 채 뭘 불싸지르고 뭘 버리는 거 좋아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적어집니다. 맥도 모르고 침통 흔들 것이 아니라 모두 배우는 일에 겸손해졌으면 합니다. 옛 선사 한 분의 말씀이 들어둘 만합니다. <언필칭, ' 불립문자 '라고 하나 문자도 방편될 것이면 가히 길동무 삼을 만한 것이라(그러니까 까불지 말거라).>
옳다. 언어나 논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달리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김용옥도 그런 말을 했지만 논리의 극단에서 초논리이어야지 논리란 논리는 모두 정리해고한 후에 초논리하자는 것은 우습다. 아니 위태롭다. 공자님도 우군으로서 여기에 한 마디 거드신다. <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사색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우니라.
사족: 여백도 좋고 운치도 중요하지만 지면을 낭비하는 것도 그리 좋은 미덕은 아닌 듯싶다. 장식도 좋지만 그것으로 해서 책값이 올라가고 그래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자꾸 주머니 눈치 봐야 한다면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호화양장본은 재벌 회장님 자서전이면 족하지 싶다. 반론이 있겠지만 뒷주머니에 찔러넣을 수 있는 사이즈와 가격이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