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_Waltz for Debby
이론이 뜨끔 하는 순간
미학은 이론적인 것의 독재에 대한 몸의 반항이다.
-테리 이글턴
이론은 헛갈리기를 싫어한다. 반듯하게 구획되고 정리된 동네에 이론은 둥지를 튼다. 그러나 몸이란 놈은 영 딴판이다. 이 놈은 잘 헛갈린다. 착각의 명수다. 그러나 이 놈은 솔직하다. 때가 되면 밥 달라고 징징거리고 때가 되면 내용물을 좀 비워달라고 보챈다. 때가 되면 활짝 꽃피고 때가 되면 주름이 끼고 때가 되면 뻣뻣해지고 때가 되면 축축 늘어진다.
니체는 이런 몸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몸은 상식이 존재하는 장소다." 옳다. 내가 어떤 특수한 사유의 시스템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가 당신과 나누어 갖는 것은 결국 몸이다. 이 몸으로 해서 결국 우리는 같은 종(種)이다. 사유가 말하기 전에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사유는 육체의 입을 빌어 가지각색으로 말하겠지만 몸이 몸으로 말하는 소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채워 줘, 비워 줘. 나와 결합해 줘.
그러나 채워주는 방식, 비워주는 방식, 결합하는 방식은 얼마나 다양한가.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얼마나 문화적인가. 그렇다면 몸이 말하는 소리도 단순한 게 아니다. 몸도 따지고 보면 의외로 복잡하다. 세계가 내 눈과 귀와 배꼽과 혀와 성기에 침투해 있으니 내 몸은 그야말로 잡탕 비빔밥, 도깨비 시장이다. 몸은 단순히 채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채워달라는 것이다. 몸은 단순히 비워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 비워달라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으로 한 가지의 결합을 몸은 원하지 않는다. 문화에 따라서 몸 속의 욕망은 얼마든지 다종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그런데 이런 복잡다단한 몸을 이론으로 정식화시키시겠다고. 이론의 깨끗하고 예쁜 액자로 내 몸을 규격화시켜 주시겠다고. 내 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세계는 그렇게 얌전하신가. 장마가 끝났다고 하는 순간에 일급태풍이 몰아치면서 하는 소리를 못 들었는가. <뜻대로 안 될 걸.>
어쩌면 이론이라는 건 하나의 소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게 존재해주었으면 하는 인간들의 순진한 희망사항. 아름다움이 조화에서 온다고 하는 피타고라스주의도 어쩜 순진한 미학인지도 모른다. 왜 아름다움이 조화에서 뿐이랴. 아름다움은 이론이 뜨끔 하는 순간, 어, 저런 놈 좀 보게, 하는 그 의외의 순간에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조화에는 습관이 꼬이지만 의외성엔 습관이 있을 자리가 없다. 당연히 아름다움을 갉아먹는 것은 그 습관이지 그 의외성이 아니다.
세계를 내 몸밖으로 밀어내고 내 몸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순수함이라! 수억 년에 걸쳐 세계와 부단히 피를 섞어온 내 몸에서 내 피의 순수성을 찾는다?! 공연히 시간 축내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