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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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금산, 그리고 마흔 네 개의 음절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 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에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이성복

 유장하다는 것이 여기서는 다만 罪처럼  느껴진다. 어떤 허튼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막무가내의 고요,  해발 700 몇 미터라 하는데 해변 마을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침묵이 응시하고 있는 섬들과 산맥,  깎아지른 좌선대 바위 벼랑의 까마귀들이 이루는  헐벗은 풍경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풍경들  앞에서 돌연히  떠오른 '나'는 당혹스럽다. 여행, 그리고 깊은  밤중은 그런 당혹과 마주치게 한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나의 어떤 깊은 운율을 따라가 침묵할 것인지........ 


 산에서의 밤은 일찍 찾아와 더디게  흘러 간다. 티이브에서 애국가 소리가  그친 옆방에서는  노파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저녁상을  물리고 "  나물과 된장국이 아주  맛깔스럽네요" 했더니  노파는 "시장해서 그랬겠지요. 뭔  맛이 있겠어요"한다. 항아리를 물로 흠치는 노파의  손등이 굴참나무 껍질 같았다. 노파의 아들인 듯한  몸피가 툰실한 부산 여관의 청년은 깊은 잠 속에 있는지 인기척이  없다. "저 소나무 아래쪽이 머리구요  길쭘하게 튀어 나온 곳이  꼬리죠. 영락없이 거북입니다"그는  내게 거북 바위며 돼지  바위의 형상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애써 자신의 설명에  동의해줄 것을 기대했다. 보고자  하면 바위에서는 어떠한 형상의  해석도 가능하다. 저녁 무렵  내가 두 마리의 돼지가 엉켜  있다는 상사암 근처의 거대한 바위에서 읽은 것은 그 청년의 마음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 누렇게  탈색된 벽지, 이런 무미함은 적막에 썩 어울린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墨畵> 전문, 김종삼

 

 오래된 시집을 편다. 언어가 오히려  침묵에 기여하는 김종삼의 시편들 속에서  마흔 네 개의 음절로 된 이  시는 유달리 고즈넉하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자연과의  따스한  교감과 고요한  시선의 깊이, 모든 장식과  치장을 떼어버리는 지적인 절제가 너무 많은  말들을 무참하게 한다. 얼마나 많은 말들  속에서 여행은  침묵과의 마주침이다.  오랫동안 침묵을 몸에 흐르게 하고 풍경들  앞에 서는 일이다. 한겨울의 남해금산은  장엄한 침묵의  풍경이다. 까마귀가  그렇고 바위가 그렇고 산맥이 그러하다. 


 촛불 한 자루가 밝히는 김종삼을  읽으며 고요는 고요의 극점을 향해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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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ll Evans_Waltz for Debby

 

 

이론이 뜨끔 하는 순간

 

       미학은 이론적인 것의 독재에 대한 몸의 반항이다.
                  -테리 이글턴

 

 이론은 헛갈리기를 싫어한다. 반듯하게 구획되고 정리된 동네에 이론은 둥지를 튼다. 그러나 몸이란 놈은 영 딴판이다. 이 놈은 잘 헛갈린다. 착각의 명수다. 그러나 이 놈은 솔직하다. 때가 되면 밥 달라고 징징거리고 때가 되면 내용물을 좀 비워달라고 보챈다. 때가 되면 활짝 꽃피고 때가 되면 주름이 끼고 때가 되면 뻣뻣해지고 때가 되면 축축 늘어진다.

 

 니체는 이런 몸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몸은 상식이 존재하는 장소다." 옳다. 내가 어떤 특수한 사유의 시스템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가 당신과 나누어 갖는 것은 결국 몸이다. 이 몸으로 해서 결국 우리는 같은 종(種)이다. 사유가 말하기 전에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사유는 육체의 입을 빌어 가지각색으로 말하겠지만 몸이 몸으로 말하는 소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채워 줘, 비워 줘. 나와 결합해 줘.

 

 그러나 채워주는 방식, 비워주는 방식, 결합하는 방식은 얼마나  다양한가.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얼마나 문화적인가. 그렇다면 몸이 말하는 소리도 단순한 게 아니다. 몸도 따지고 보면 의외로 복잡하다. 세계가 내 눈과 귀와 배꼽과 혀와 성기에 침투해 있으니 내 몸은 그야말로 잡탕 비빔밥, 도깨비 시장이다. 몸은 단순히 채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채워달라는 것이다. 몸은 단순히 비워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 비워달라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으로 한 가지의 결합을 몸은 원하지 않는다. 문화에 따라서 몸 속의 욕망은 얼마든지 다종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그런데 이런 복잡다단한 몸을 이론으로 정식화시키시겠다고. 이론의 깨끗하고 예쁜 액자로 내 몸을 규격화시켜 주시겠다고. 내 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세계는 그렇게 얌전하신가. 장마가 끝났다고 하는 순간에 일급태풍이 몰아치면서 하는 소리를 못 들었는가. <뜻대로 안  될 걸.>

 

 어쩌면 이론이라는 건 하나의 소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게 존재해주었으면 하는 인간들의 순진한 희망사항. 아름다움이 조화에서 온다고 하는 피타고라스주의도 어쩜 순진한 미학인지도 모른다. 왜 아름다움이 조화에서 뿐이랴. 아름다움은 이론이 뜨끔 하는 순간, 어, 저런 놈 좀 보게, 하는 그 의외의 순간에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조화에는 습관이 꼬이지만 의외성엔 습관이 있을 자리가 없다. 당연히 아름다움을 갉아먹는 것은 그 습관이지 그 의외성이 아니다.

 

 세계를 내 몸밖으로 밀어내고 내 몸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순수함이라! 수억 년에 걸쳐 세계와 부단히 피를  섞어온 내 몸에서 내 피의 순수성을 찾는다?! 공연히 시간 축내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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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퇴화

 

 옛날 용산의 삼각지 근처를 지날 때면 눈을 감고도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근처에 제과공장의 굴뚝이 달콤한 밀크 캬라멜 냄새를 뭉텅뭉텅 피워냈기 때문이다. 어린 우리들은 그 냄새를 '캬라멜 방귀'로 명명했었다. 지금은 전자상가로 탈바꿈한 용산 청과물 시장 근처를 지날 때는 채소 냄새가 났고, 노량진 수산시장근처에서는 비릿한 어물냄새가 났다. 냄새는 삶과 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 당시에 명민한 후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장동 우육 시장, 을지로의 건어물 시장, 염천교 구두공장… 서울의 냄새지도를 작성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냄새가 사라졌다. 길거리에서의 군밤냄새도 예전 같지 않다. 왜일까. 사람들의 후각이 무뎌진 탓일까.


 서울의 배기가스의 농도도 예전 같지 않다. 광고의 언어들과 이미지들도 하루가 다르게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인터넷의 게시판을 채우는 언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한 것들 중에서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메시지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인간의 감각을 향하여 달려드는 메시지들이 너무 강해진 것이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다. 그러다 보니 하나둘 삶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은 아닌지.

 

 정전이 되었을 때 어둠을 밝혀주던 고마운 촛불의 빛이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왜 그렇게 초라한 빛이 되고 마는 것인지. 인간의 감각은 더 강한 자극에 우선적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라지만 때론 씁쓸한 생각도 든다. 

 진리는 미풍처럼 온다고 말한 이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였다. 강한 것, 외치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작은 것, 속삭이는 것, 부드럽게 인간의 감각에 스미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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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학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Old and Wise - Dana W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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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알렌 포우의 연구가인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베니 밀러 교수가 영국의 에딘버러에 있는 고서점에 발견했다는 등사본 『멀리 저 너머 : Far and Beyond』에 실린 한 단편에는 데이빗 샘플이라는 친구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포우는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한 후 노름과 음주에 빠지게 된다. 샘플은 포우의 대학시절, 둘도 없는 노름 친구였다. 자존심이 남달리 강했던 샘플은 자신의 도박적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결국 아버지의 유산을 노름으로 잃고 대학을 중퇴한 후 로드 아일랜드 공장지대의 월세방을 전전하게 된다. 이후 샘플은 같은 처지에 있는 무일푼 포우와 같이 미국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포우의 『멀리 저 너머 : Far and Beyond』는 바로 로드아일랜드 시절의 이야기다. 특히 샘플이 하루 종일 끼고 살았다는 고양이 '버드'의 비극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샤워하는 고양이>는 무릇 이야기는 짧고 압축되어야만 한다는 포우의 문학관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배가 고픈지 버드가 연신 울어댔지만, 망할 놈의 늙은 고양이 같으니라구, 샘플은 늙은 암코양이 한 마리쯤이야 굶어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는 심정으로 침대에서 뒹굴었다. 샘플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해야 잃은 돈을 복구할까하는 의문부호들로 가득했다. 직업적 노름꾼들의 세계에서는 잔기술은 통하지 않았다. 도박의 세계는 냉정하다. 도박꾼들은 이성을 신뢰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우연에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이다. 황금을 거머쥐는 것은 우연에 결부된 행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연에 복종하는 일.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일체의 시도는 부질없다. 이런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을 때 고양이 버드는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는 어떻게든 해보렴, 어떻게든 해보렴, 거의 울상인 채로 보채는 샘플의 어머니 로라 릿지의 목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거의 한 달 가량 샤워도 하지 않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샘플은 한 마리의 지저분한 도둑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낮이면 잠을 잤고 밤이면 야행성 동물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행운은 그에게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몰락해갔다. 광대뼈는 불거졌고, 눈은 검게 패였다. 자신의 몰락을 쏘아보는 눈초리였을까. 오직 검게 패인 눈두덩이 속의 눈동자만이 이상한 광채를 더해갔다. 거칠게 돋아난 턱수염과 봉두난발의 머리칼과 쏘아보는 눈동자,  그는 한 마리의 거대한 야행성동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끝내 이 야행성 동물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전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버디가 욕탕에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리터의 물을 먹었는지 축 늘어진 버디의 배는 팽팽하게 불거져 있었다. 샘플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버디를 신문지에 말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그는 면도를 했고 샤워를 했다. 벗겨져라 더러운 살, 씻겨 져라 나쁜 피. 그는 피가 나도록 제 몸을 문질러 댔다. 두 시간도 넘는 길고 긴 샤워였다.

 

그리고 그는 입대했다. 그는 국가가 주는 녹봉, 그 이상을 해내는 많지 않은 공무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미육군이 주는 두 개의 훈장을 어깨에 얹었다. <샤워하는 고양이>, 그것이 데이빗 샘플의 또 다른 이름이다.

 


Camera Obscura

    -Underachievers please try harder-

                 


 

                  Before you c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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