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Sunny Stream-노무라 소지로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프로방스,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김화영의 아름다운 에세이『행복의 충격』없이 나는 나의 이십대를 말할 수 없다. 김화영의 번역물과 그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십대는 충분히 유의미했다.
 
현실은 참으로 막막했다. 미래는 불안했고 시국은 어수선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먼지와 바람뿐이었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놓아야 할까,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럴 때 나는 김화영을 읽었고, 김화영이 번역한 까뮈와 바슐라르와 모디아노와 르끌레지오를 읽었다. 프로방스는 불안한 청춘의 망명지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만은 내 안의 습기들이 바삭 증발할 것만 같았다. 일찍이 세잔느가 화폭에 담았던 프로방스의 쎙 빅투아르산, 김화영의 표현대로라면 ‘메마르고 강직하고 비정한 고전의 감성을 그 물리적인 표정 속에 담고 있다’는 그곳에서라면 나는 일체의 수식을 떨구어버린 건조하고 강직한 정신으로 나의 청춘을 응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프로방스는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한 젊음이 꿈꾸었던 관념의 땅이었다.
 
현란한 수사학으로 김화영은 프로방스를 광고했다.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려진 풍경, 전라(全裸)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직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라는 구절 앞에서 어찌 프로방스를 꿈꾸지 않겠는가. “모든 정경이 단단하고 메마르고 스러지지 않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는 그곳에서 나의 젊음은 무언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찍이 고호는 그의 가장 행복하고 비극적인 만년을 프로방스에서 보냈다. 김화영은 고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용돌이치는 태양이 프로방스를 만난 고호의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들 그런 행복의 충격과 만나고 싶지 않을까.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의 한 구절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 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곳에서 서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이어지는 미셀 투르니에의 구절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땅에서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 있는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원이었다. 왜 그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면서 저것이면 안 되는가. 시대는 엄혹했다. 이념은 발랄한 생의 약동으로서의 웃음을 몰랐고, 도덕은 일탈과 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엄숙주의는 무겁게 삶을 압도했다. 그럴 때 지중해는 먼 곳에서 아득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치고 받고 아옹다옹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을 나의 눈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책장의 띠지에는 아름다운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프레나무를 배경으로 집 한 채. 뜰에는 가득한 보랏빛 제비꽃. 저곳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책 속에는 수많은 수채화들이 들어있었다. 순진무구한 프로방스의 풍광들, 잘 구어진 빵과 포도주가 화사한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신선한지, 책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 하는 작은 감탄마저 인다.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현학적인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고호도 없고 르네 샤르나 알퐁스 도데도 없다. 루르마렝에 있다는 카뮈의 묘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에서 “이 고장은 너무나 잘 빚어져서 장인(匠人)인 신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피터 메일의 책에는 현란한 수사학도 없다.
 
그의 책에는 그림 같은 바다에서 혼자 빈둥대는 게으름이 있다. 그러므로 한참 바쁜 사람들은 피터 메일의 책을 붙잡지 말 일이다. “참으로 팔자 좋군” 빈정대는 한 마디로 남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무도 가난한 자는 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다. 피터 메일의 행복이 부러움을 넘어 고통스러운 질투로 느껴진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의 책에는 프로방스 사람들의 당나귀 같은 고집이 있다. “자동차 한 대가 눈이 치워진 중앙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와 마주치고 말았다. 두 자동차는 주둥이를 맞대고 멈춰 섰다. 하지만 누구도 후진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길가로 붙이다가 자칫하면 눈더미에 처박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두 운전자는 앞 유리로 서로 노려보면서, 다른 자동차가 그들의 꽁무니에 붙어주길 기대하며 마냥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힘’에 따라 한 대인 자동차가 어쩔 수 없이 후진할 테니까 수적으로 우세한 쪽이 먼저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구절은 이 책의 문체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이렇게 소박한 문체에서 우러나는 유머가 있다. 그 유머는 피터 메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면서 프로방스 사람들의 소박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피터 메일은 영국과 미국에서 15년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단다.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소비자들의 욕망을 분석하고 그들의 잠재적 욕망을 소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첨단의 기법을 동원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광고인으로서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햇살과 공기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이 마을의 상점들과 포도밭을 찍은 사진을 보았으며, 침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잠을 깨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는 피터 메일 부부는 충동적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구매한다. 우리에게도 저 만큼의 충동은 필요하리라. 충동과 도발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 오직 구질구질한 일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프로방스에 구매했다는 집은 나의 미의식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질투가 느껴졌다. “이 지역의 돌로 지은 그 집은 바람과 햇빛을 2백년 동안이나 견뎌온 탓에 옅은 꿀색도 아니고 옅은 회색도 아닌, 중간색으로 바래 있었다.......벽의 일부는 두께가 1미터나 되어 지중해의 미스트랄을 견딜 수 있게 지어졌다. ......우물이 세 군데 있었고, 그늘을 드리우려고 심은 나무들과 호리호리한 초록의 사이프러스들, 로즈메리 울타리, 커다란 아몬드 한 그루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 햇살에 졸린 눈꺼풀처럼 반쯤 닫힌 나무 덧문까지! 그 집은 우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피터 메일을 사로잡은 집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행복은 반드시 풍족한 물질에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저런 집에서는 행복이 더 잘 깃들 거라는 생각도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피터 메일의 책은 매우 감각적인 책이다. 그는 프로방스를 관념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 바람, 송로 버섯의 진미, 팔월의 염소 경주대회, 구월의 포도 수확, 그리고 십일월의 올리브기름 등 그의 책은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올리브유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토마토 과육을 살짝 바른 빵, 따뜻하게 데워 샐러드와 함께 먹는 거위간, 꿩과 산토끼, 파테와 치즈, 햄과 수탉, 양파빵, 마늘빵, 올리브빵, 양젖치즈빵, 포도주와 와인 등 수많은 음식으로 피터 메일은 전직 카피라이터답게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이웃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피터 메일에게  부러움과 동경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프로방스』를 권하겠다. 행복은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다.
 
“다른 곳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완벽한 날씨가 아니었다면 암담한 심정이었겠지만 프로방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태양은 대단한 신경안정제였다. 아련한 행복감에 적어 시간은 흘렀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이 흘러가는 나날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은 꿈꾸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마음만이라도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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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피필름 2004-12-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참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리뷰 좋네요 ^^

감각의 박물학 2004-12-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4-12-14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 질투는 가당찮습니다. 떠나셔요 혁명이 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 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그 방에서 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 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신이현의 소설
 

 


                                                   Liseuse a la table jaune; 1944 Henri Matisse
연 등

바람이 불지 않는
오월의 저녁
손목이 뒤틀어진 소아마비의 사내가
종이와 펜을 내밀며 길을 묻는다

"잠실… 어떻게 가야 해요?"
"저 연등을 따라가세요
계속 가다 보면 불 켜진 등 아래
누에가 고치를 틀고 있는 밭이 보여요"
나는 채도가 낮은 빛깔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연꽃 같은 웃음을 떨구며
연등행렬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
한쪽만 진한 발자국이 내 앞에 남는다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태어난 날도 그랬을까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딘가의 먼 절에 있다는
오백 나한의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절던 그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연등 속에서 불 밝히던 성충들은
이미 환태하여
날아가고 없었다.


흑룡강성에서 온 연이 엄마

연이 엄마는 왼손으로 밥주걱보다 견고하지 못한 삶을 사느라 입술이 터진다 터진 입술 사이로 거칠게 흘러나오는 흑룡강의 물결 붉디 붉은 강물결 따라 남지나해 서해 군산 앞바다 쿨럭쿨럭 쏟아지는 찬물에 손 담그다 간밤 천둥소리에 울고 있을 연이를 떠올린다

엄마와 함께 놀던 파밭을 서성이다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이 멎질 않아 눈이 멀어 버린 연이 아무리 불러 봐도 엄마는 먼 어머니의 나라에 있다

기름때 진 사내들에게 밥을 퍼 줄 때마다 데인 가슴을 수챗물로 씻어내고 철수세미처럼 딱딱한 손바닥에 새겨진 고향의 지도를 본다 어느새 손금을 타고 내려오는 강물 고향에 간다

풀풀 날리는 십일월 눈 속에 파꽃이 묻힐 때 만두 장사가 지나가다 팔다 남은 만두를 연이에게 주고 간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훈김이 뿌옇게 앞을 가려 손에서 주걱을 놓친다 고슬하게 지어진 밥알이 흩어진다

차가운 밥그릇에 몰아치는 흑룡강의 눈발


인어횟집

#1
청과물상 방정식 임옥순 씨 부부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불놀이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는 창 하루에 삼십 분밖에 볕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곰팡이 핀 제비꽃 무늬 벽지 속으로 스며든다 활활 타오르는 제비꽃 만발하던 일요일 저녁 스테이크 전문점에서는 소백산에서 사육된 안심로스를 판다 광합성을 하게 된 한우는 충분한 햇빛과 맑은 공기 속에서 키운 것이 상등급 소뿔이 장식된 테이블에 분홍 소매와 남색 무릎을 가진 아이들을 데리고 온 김주만 하미란 씨 부부가 푸른 즙이 질컥거리는 스테이크를 씹는다 여보 다음주엔 당신 동창모임이 있어요 어디서? 인어횟집이라는군요

#2
우리 업소에선 태평양 연안의 뱅크에서 잡힌 인어만을 취급하지요 인어의 하체엔 발톱 같은 비늘이 달려 있어서 회 치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비싼 칼날을 망쳐 버리면 살 길이 막막한 횟집의 요리사는 인어회를 시키는 사람들에게 붉은 장을 내놓으며 말한다 인어횟집만의 특별 서비스입니다 인어의 차가운 간을 녹여 만들었지요 사람들은 붉은 간을 간장을 풀며 시월혁명에 대한 얘기를 한다 너 어제 그거 봤어? 시월은 혁명 하기 좋은 계절이라는데? YTV의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이야기군 하긴 적그리스도가 태어나는 달도 시월이라더니, 왜 그는 오지 않는 거지! 고래 힘줄 같은 넥타이를 풀며 인어회를 장에 찍어 먹는다 붉은 장이 입술가로 흘러내린다

#3
남은 인어의 상체는 어떻게 하나요? 냉동 보관해서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보냅니다. 남태평양의 인어 상체는 북극의 썰매 끄는 개들에게 아주 인기거든요 그런데 유통회사는 어디를 거래하시죠? AMEX를 이용하지요 세계적으로 체인이 가장 많잖아요 아 그래요 저는 KOEX에 다니고 있습니다 주로 AMEX의 거래처를 뚫지요 물류비용이 AMEX의 반값입니다 아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기업이군요 KOEX 직원의 미끌거리는 명함을 받는 요리사의 빨갛게 구멍난 웃음.


마추픽추

<존재의 강시>를 노래하는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지하철 안에서 졸았다 열차가 삼송역을 지나 지축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은 각자 앉은 자리에서 신문을 보거나 화장을 고치거나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신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들은 자꾸 발을 두고 도망가고 있었다 내 신도 나를 두고 도망가려 했다 신을 따라 허겁지겁 창 밖을 보자 그곳엔 잉카의 마지막 왕이 웃고 있었다 열차는 곧 깜깜한 지하동굴로 들어갔다 고장난 샤워꼭지처럼 남은 꿈들이 머리통에서 질질 흘러나왔지만 닦을 생각은 없었다 껌팔이가 모두에게 껌과 종이를 주며 지나간다 종이에는 <너의 꿈은 마추픽추 산에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었다 다음 칸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를 잉카의 왕이 황금팔찌를 흔들며 뒤따라갔다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충무로에서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코리아헤럴드 신문을 말아 쥐고 티티카카 호수에서 여름휴가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유형진



과꽃의 씨방에 사는 한 사람을 압니다 그는 분홍과꽃의 말라비틀어진 씨방에 삽니다 그의 등은 호미처럼 굽었고 손등은 딱정벌레의 껍질처럼 딱딱합니다 그의 등과 손등이 언제부터 그렇게 굽고 딱딱해졌는지 모릅니다 과꽃 잎사귀에 이슬이 내릴때 그는 꽃잎을 타고 일터로 갑니다 그의 일터는 프라모델 탱크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그는 탱크의 바퀴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과꽃을 닮았습니다 그는 탱크 바퀴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진흙탕도 달릴 수 있습니다 비탈언덕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과꽃의 씨방에 사는 그는 과꽃을 타고 출근해서 과꽃같은 탱크 바퀴를 만듭니다 톱니가 있고, 굴러가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쉽게 잊혀지고, 잊은 후에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 탱크의 바퀴를 만듭니다 아이들이 그가 만든 탱크를 가지고 꽃밭에서 놉니다 바퀴에 꽃잎이 깔립니다 꽃들이 지고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핍니다 과꽃의 씨방에 사는 한 사람은 등이 호미처럼 굽었고 손등은 딱정벌레 처럼 딱딱합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냉장고의 심장


자주색 벽돌 다리를 지나면 호수가 나오지요 예, 예, 그길로 직진 하세요 호수가 보이나요? 호수에 머리를 감고 있는 버드나무가 보이지요 예, 우회전이예요 그 버드나무 앞에 주차하세요 차는 버드나무 앞에 세워두셔도 됩니다 아무도 견인해 가지는 않아요 이제 다 왔네요 거기서부터 위로 백미터예요 허공 뿐이라고요? 예 맞아요 그곳이예요 허공에 손을 짚어 보세요 뭔가 잡히지요? 그걸 잡고 올라오세요 예, 수직으로 백미터면 꽤 되는 거리죠 사다리는 절대 끊어지지 않아요 똑바로 잡고 오른다면 말이죠 올라오는 중에는 절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마세요 해산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버드나무 같은건 내려다보지 마세요 왜요? 무서우세요? 그럼, 냉장고의 심장을 얻는 일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요? 애초에 생각을 말았어야지요 자주색 벽돌 다리는 건너지 말았어야지요. 저따위 고물 자동차가 그렇게 걱정 되나요? 글쎄 아무도 견인해 가지 않는다니까요? 삼십년이라구요? 참 내, 답답하기는. 냉장고의 심장만 얻는다면 고물 차와의 삼십년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알고 있잖아요 벌써 십미터는 올라 오셨네요. 예, 그렇게 하면 되요. 예, 예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이제 당신이 냉장고의 심장을 욕망하게 된 계기를 말해보세요. 아니, 아니 고물자동차에 대한 애착은 이제 집어 치우고요. 욕망에 몰두하면 허공을 오르는 공포 따위는 없어질거예요 그렇지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땀이 난다고요? 축축해서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다고요? 겁낼 것 없어요 착실히 위로 오르기만 하면 절대로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요 이 사다리에 오른 이상 다시는 내려갈순 없어요 당신이 내려가려는 순간 사다리는 없어진답니다. 그 사실을 미리 말 안했던가요? 이런. 진행상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미련을 버리세요. 알아요. 잘 안된다는걸. 당신이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 누군가 또 자주색 벽돌 다리를 건너고 있을거에요 오! 이런 이런, 흔들리고 있군요!

채석강 오후 푸가형식의 식사


격포에 다녀온 일이 있지요 그리움의 더께 같은 채석강의 퇴적층을 보았지요 날 선 바닷바람이 적층 사이를 가르는 비명이 꼭 내가 지르는 것만 같았지요 방파제 위에서 파는 조개구이를 먹었지요 가스불에 탁, 탁 벌어지는 조개껍질의 무늬가 채석강의 퇴적층 빛을 띄우고 있었지요 조갯살을 씹으며 생각했지요 당신이 들려주었던 푸가, 퇴적층 같은 오후에 벗겨내는 시간의 껍질 같은 맛이라 생각했지요 초장을 찍은 대합살이 미끄러지듯 식도를 내려가고 채석강에 내리는 눈은 적층이 되어 쌓였지요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쌓이고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쌓이고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바다모텔에 방을 잡았지요 모텔 방에서 격포 앞바다까지 격포 앞바다에서 하늘 끝까지 미친 눈송이들이 마구잡이로 휘날리고 어둠 속에 쌓이는 눈 때문에 눈의 적층은 더욱 선명해졌지요 얼어붙은 눈의 적층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지요 돌아와 동글한 퇴적층 같은 양파를 깠지요 격포의 파도같은 칼날은 단번에 양파를 갈랐지요 엷은 슬픔의 막 같은 껍질을 벗겨내고 쌀뜸물에 흰 된장을 풀고 조개를 넣고 양파를 넣고 퇴적층 같은 오후에 푸가형식의 식사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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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진 :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1년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

[현대문학]에서 퍼 온 것으로, 유형진의 등단 작품
예쁘고 상큼한 상상력이 읽는 맛을 더욱 좋게한다 .
 
화전 간다

-안현미


좌석이 없는 좌석버스를 타고 간다
삼표연탄 이름만 남아 있는 자리
백미러 같은 낮달 떠 있다
'이번 정류장은 수색극장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구름다리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건너
검문소 앞에서 검문 당하는 靑春
이등병의 배지를 달고 있다
물빛처럼 푸른 군복
수색엔 온통 일렁이는 것들만 살고 있다
'...... 다음 정류장은 항공대학교입니다'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파란 종이비행기를 날려보내던,
삼표연탄보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 어디에도 없다

좌석이 없는 生을 타고 간다
꽃밭은 없고 이름만 남아 있는
花田 간다



카만카차*

-안현미


안개를 달여드려요
칠레 행 비행기를 타고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날아오세요
망명정부의 소설가처럼 수염을 길러도 좋아요
이곳은, 지도엔 없는 마을 '카만카차'
안개광장을 가로질러 가스등이 켜진 골목
카페 '세상 끝 등대'로 오세요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패튼 장군 세풀베다가
열대의 안개를 마시며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집이에요
자, 서둘러요
이곳은 안개의 마을 카만카차
안개로 차를 달이고
안개로 빨래를 하고
안개로 홰나무를 기르는 마을
카만카차에선 가이드북 같은 건 필요없어요
안개 때문이죠
삶이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꾸는 한 장의 꿈이라면
안개를 달인 한 잔의 차가 삶이기도 하죠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려요
목요일이에요
다음 비행기는
짙은 안개 때문에 결항이에요

*칠레의 어떤 마을에서는 안개를 '카만카차'라고 부른다



식판 공장의 프레스기계들과
언니의 검은 란제리를 위한 노래


-유형진


물오른찔레나무새순을꺾어/나무의맑은피를손톱에칠하고
새로자란토끼풀꽃들을뜯어/시계랑반지를만들어끼웠어

시간은째깍째깍시들어가고/기타도베이스도드럼도없이
굶주린거미같은올겐만으로/잊혀져가는낮의변주를했어

언니는우물가시멘트바닥에앉아/검은란제리를빨고있었어
쭈그러진노란세숫대야에/란제리는불은미역같았어

노을이가지색으로멍들어가는/식판공장기계들이춤추는저녁
사람들에게식판은늘모자랐기에/밤새도록기계들은춤을추었어

아기잃고젖몸살을앓는언니가/구름을불러달을덮어주었어
그믐달이자고있는우물속으로/죽은별처럼눈물이떨어졌어

꽃시계는드디어멈춰버렸고/파란철길위로막차가지나갔어

물고기보다투명한손톱들이/메마른건반위로떨어졌어
건전지가다된전자올겐은/비오는날버려진고양이처럼울었어

공장마당엔발목잘린비둘기들이/깃털빠진늙은비둘기들이
마지막기차의장화를신고/아주먼곳으로가고싶어했어

쿵덕쿵덕프레스기계소리/철벅철벅두레박올리는소리
철길을지우는안개와함께/기차의꼬리에붙어따라가고

하얀빨래비누는불어가는데/익사체의살처럼뭉그러지는데
식판공장프레스기계들은/공장문이닫혀도춤을추는데
숲처럼검은란제리를빨던/언니는영영오지않는데
------------------------
 
질 나쁜 연애-문혜진 첫 시집에서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 27살에 요절한 여성 록가수. 그녀는 날것의 음성으로 노래하는 최초의 여성 록커였다.



<뒤통수 조심해라>

가슴에 피어싱이라도 주렁주렁 달고 막살아 보고 싶은 날. 믹서에 감기약이라도 갈아서 밀가루 반죽에 넣어 마구 휘젓고 싶은 날. 곱게 갈린 가루를 파우더 통에 넣고 볕 좋은 곳에 앉아 화장을 하자 화장하다 심심하면 마당의 개나 붕붕 타지 뭐 개를 타다가 싸이가 생각났어 내가 좋아하는 싸이는 남대문 뒷골목에서 S정과 러미라*를 사다가 구속 수감된 가수야 암스테르담엔 널린 게 약이라던데. 연신내 사는 내 친구 미나노는 할머니랑 다정하게 종이에 말아 맞담배 피웠다는데. 오늘도 9시 뉴스에선 남대문 뒷골목의 초라한 약장수와 더러운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불안한 중독자의 손이 오버랩된다 나를 뜯어먹을 기세로 미친 듯 손을 떤다 피해망상은 닳고 닳은 누구나의 누더기 껌! 씹고 있는 당신의 껌도 이미 히스테리로 너덜너덜해져. 이런 날은 누구나 뒤통수 조심해라!

* 감기약이지만 수십 알씩 먹으면 환각 증세가 오는 값싼 환각제.


<껌요리>

  자, 그럼 껌요리를 시작해 볼까?
  재료 : 어린아이 머리칼에 엉겨 붙은 껌, 지하도 바닥에 눌어붙었다가 도루코 칼에 인양된 껌, 걸인의 썩은 이빨에 눌러앉아 단물 빠진 껌 (그 외에 잡다한 껌딱지들과 풍선껌!)

  껌을 씹는다 분홍색 단물이 스며 이가 쑤시고 잇몸이 부어도 멈추지 않는다 단물이 빠지고 접착력이 강해지면 검지에 돌돌 말아 되도록 길게 길게 늘여본다 뗐다가 붙인다 사람과 개를, 똥과 밥을, 나물 망태기와 뱀을, 나르시시즘과 모멸감을, 사시(邪視)와 벌어진 앞니를, 독재자의 군화와 적진에서 죽은 어린 병사의 눈동자를, 너의 크고 작은 뼈들과 나의 예민한 영혼을 마구마구 붙였다 떼어본다 세상 모든 바닥을 걸레처럼 쓸고 다닌 늙은 도둑고양이의 앞발과 폐타이어의 잔등에도 어느 한순간 엉겨붙어 떨어지지 않는 곤란한 치욕 있으라!


<문신>

사람들은 죽겠다고 시를 쓰지
시에 대한 시가 얼마나 촌스러운지도 모르고
시를 천 편쯤 써서 여기저기 뿌려야
루이비통 가방 하나쯤 살 수 있을까?
시를 써서 부자가 될 수 없어
그것은 교복 입은 전인권과
자갈 언덕 위에서 섹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다친 신경 세포 속 문신
토할 것 같아
죽을 것만 같아
나는 지금 문신을 새기고 있어
전기의자에 앉아 온몸에 침을 꽂고 고문당하는 기분이야
나부랭이들은 이걸 두고
'몸시'라고 하겠지
그래 나는 몸으로 시를 쓴다
그것도 '벌거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군
파우스트가 빨래를 널고
백설 공주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해대고 있어
마돈나가 앉아서 아인슈타인의 검을 머리털을 젓가락으로 참을성 있게 뽑아주고
에미넴이 '나인 인치 네일수'로 뻑큐를 하다가
자기 코를 찔러 코피를 질질 흘리는 동안
당신을 뭘 했는데?
남 얘기가 아니지
이런 토할 것 같은 세상에서 도망쳐!
무거운 뇌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내치지 못한 지긋지긋한 그에게서 도망치자고!
그것만이 살길이야



<탕진>

가끔씩 난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면 어떤지 알아?
하드보일드하게 지루하지 뭐.
전인권의 <행진>을 탕진으로 바꿔 부르는데
그것도 지루하면 펭귄으로 불러.
그럼 정말 썰렁해지지.
전인권은 왜 행진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을까?
그러면 탕진이 됐을 텐데.
스카이 라이프 광고에서 선글라스를 벗은 전인권은
애송이 개그맨의 폭탄 맞은 개그 같아.
펑크스타일로 뇌쇄적이야.
제대로 서글프다는 이야기지.
그 폭탄 머리를 만드는 데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몇 시간을 주물러댄다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길 수 있는 건
태양도, 비도 섹시한 허벅지도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로 사는 것도
돈 앞에선 귀찮아진 거겠지.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겠어?
탕진을 흥얼거리며 스니커즈가 닳도록 걷다가 문득,
지금 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원유를 잔뜩 부은 베트남식 커피 같아.
하드보일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지.
그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겠어.
아무것도 아끼지 않겠어.
우리 동네 미대사관 앞 전경 아저씨들도 탕진!
우리 삼촌을 닮은 과일가게 총각도 탕진!
붕어빵 파는 뚱뚱한 아줌마도 탕진!
피스!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대는 갔어.
아무리 외쳐도 평화 따윈 오지 않잖아?
탕진!



<환생>

  로트레아몽이 <말도로르의 노래>를 쓸 때 나는 그의 애인이었어. 나는 그의 딸을 낳았고 우리는 사나운 동물의 무리를 찬양했으며 가끔 외출할 때 늑대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지. 그 늑대가 지금 우리 아버지로 환생했어. 그때 우리는 이 세계에 모멸감을 느꼈고 사는 게 지루해서 빨리 죽어버렸지. 그는 난폭한 시인이었지. 난 그 난폭함을 사랑했어. 이런 야비한 세상에서 다시 어떻게 죽어가야 할까? 독한 술과 얼린 나비 가루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어. 그것은 광기와 환멸 사이 어디쯤에서 겉도는 마음.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면 해로운 마음이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일어나지. 오래고 오랜 피. 지금은 분열된 몸과 마음이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시간. 막막한 마음이 죽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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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사랑 - 이연주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걸---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랑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 아름다운 음모 - 이연주


무수한 빗변을 그으며 쏟아지던
열병들린 햇살이 살을 찔렀다
"나는 숭숭 구멍난 바람이죠 어디든
앉는 날이 무너지는 날이죠"

정신없이 넝쿨들을 짓밟아 왔네
황소처럼 킁킁거렸네
내 스스로
내 가슴을 환장한 듯 먹어치워
모태로부터 저주받은 북소리

이제 사람의 마을
쓰레기장 먼지 속을 휘휘 돌고 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와진 불면의
밤의 공기들이여
내 혈맥을 잘라 정적의 고삐를 풀겠는가

"팔모로 빛나는 저 별을 봐요
동작을 멈추는 날이 무너지는 날이죠"




 
Mal Waldron - Left Alone
Music For Paul Auster (Special Deluxe Package)/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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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Uria Heep
 
*문신- 이성복
당신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천착하였습니다. 당신이 슬퍼할 줄 알면서도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피를 보았습니다. 당신에게서 당신에게로 가는 것들을 가로막고서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당신 가슴에 내가 새긴 끔찍한 문신이었습니다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본 적 없고
돌이켜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罪에서 지을 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後光, 너는 썩어 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熔岩처럼 가슴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不穩한 도랑을 따라
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 격렬한 고통도 없이 - 이성복
 
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 가고 봄 여름이 가고 저녁이면 미친 듯이 떨리는 미류나무 잎세들, 꽃 피는 저녁의 소슬담을 따라가면 흰 벽엔 아이들이 그려 놓은 여자와 남자, 남자의 키는 유난히 크고 여자는 긴 머리에 레이스 달린 치마 입었다 그 밑엔 빨간 글씨로 <<우리 선생님>>
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가고 사람들은 소리 없이 아팠다 아파트 놀이터 모래반에서 수십만 년 밀린 잠을 자고 나면 잡채다발처럼 걸리는 약속된 땅의 삼십 년,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 가고 가슴 조이고 가슴 뛰고 변두리 행길엔 늙은 할아비가 끄는 목마가 있었다 어떤 아이는 빤쓰도 안 입고 올라탔다 올라탄 아이끼리 머리채를 꼬나잡고 악쓰며 울었다 잡채다발보다 미끄러운 약속된 땅의 삼십 년, 가난한 여인들이 수근거리는 길을 월부 책장사가 지나갔다, 격렬한 고통도 없이.........
 

*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이성복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수의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속에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수의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초록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 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봄날 아침 - 이성복
 
봄날 아침이었네 그가 와서 자꾸만 가자고 했네
이마에는 해와 달이 부딪쳐 울고 안개 사이로
나무들의 연한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았네 그가 가자고,
가자고 졸랐네 지난 여름 물이 넘친 개울가엔 먹을 것
없는 여인들이 흰 수건 머리에 두르고 둠벙가의
애벌레처럼 굼실거렸네 아버지, 세상의 어머니가
아파요 그의 중얼거림은 내 목을 졸랐네 봄날 아침,
빨리 달리는 자전거의 빗살처럼 세상의 앞날이 지워지고
있었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내 내장속에
몸을 들이밀었네 떠나지 않고 우리는 흰 누에고치처럼
안개의 잠을 잤네 오, 개울가엔 먹을 것 없는
여인들이 털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네

* 산유화 - 이성복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 저기도, 저 너머에도... 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릴 꽃이 사방에서 피어 올랐읍니다 그것은 당신 손 끝에 떠오르는 꽃밭 같았고 별들이 솟아나는 밤하늘 같았읍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 나는 선채로 꽃 피어날 것 같았읍니다.
 
 
* 음악 - 이성복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 이성복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붙어 숨떨어지기를 기다리네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온 사이 벽에 나방이가 없네 그 몸뚱이 데불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벽에도 방바닥에도 나방이는 없네 아직 죽음은 수직으로 오지 않았네 잘 살펴보면 벽과 책꽂이 사이 어두운 구석에서 제 몸집만큼 작고
노란 가루가 묻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 여리고성 근처 - 이성복
헐벗은 미루나무 꼭대기로 겨울 해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통조림캔에서 금방 꺼낸 복숭아 알을 닮은 해, 매연과 땟국물로 식사하고도 아프다 소리 한번 안 하는 해는 이 년마다 한 번씩 건강진단을 받는 것도 아니다 미루나무 꼭대기를 벗어난 해는 이제 돼지 감자탕집 간판에 정수리가 찢기면서 뒷산 언덕에 벌건 피국물을 퍼뜨린다 그 국물 다 빠지고 나면 여호수아 교회의 십자가에 네온이 들어오고 어둠은 생후 이삼 개월 되는 아이들을 찾아 집집마다 들쑤히는 헤롯왕의 군사들처럼 올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해는 또 예림 안마시술소 뒤쪽 출입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정액 흘러내리는 낙타표 텍스들과 함께 여간해 해는 절망하지 않는다 여간해서는 찢어지지 않는 낙타표 텍스, 질 좋은 제품처럼
 

* 서시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 이성복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미류나무 한 이파리에
멈추는 햇빛, 짧아져가는 햇빛
지금 내 입술에 멈추는 날카로운 속삭임
나는 괴로워했고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지금 짧아져가는 그 햇빛을 가로지르는 것들은 아름답다
오래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가자, 막을 헤치고 거기 가자
부서진 구름도 따스하게 주위를 흐르는 곳
 

* 높은 나무 흰 꽃들의 燈 - 이성복
 
근심으로 가는 짧은 길에 노란 꽃들이 푸른 회초리 같은 가지
위로 떨고, 높은 나무 흰 꽃들이 등을 세운다 어디로 가도 무서
운 길의 어느 입구에도 흰 꽃들의 등이 자꾸 떨어지고, 갈수록
어둠 한쪽 켠은 환하고 편하고, 병풍처럼 열리는 숲의 한가운데
서 오래 전 소리 자지러진다
-- 용서받지 못했던 날의 잘못이
이마의 못처럼 아프다
아이들아,
우리 살던 날들의 웃음을
다시 웃는 너희 얼굴에
수줍은 우리, 그림자 진다
 

*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귀에는 세상 것들이 - 이성복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푹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날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 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 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 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느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이성복
 
1998년 1월 2일 선산에서 상주로 통하는
25번 국도에서 개나리 덤불이나 관목숲,
하다못해 갈대까지도 성에로, 서리로
하얗게 코팅한 상태에서, 감 홍시 같은
해는 안개 낀 하늘 위 데구르르 굴러
내 차 유리창 앞에 딱 붙어 섰는데,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봄밤  -이성복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봄밤엔 어릴 때 던져 올린 사금파리가
네 얼굴에 박힌다
봄밤엔 별을 보지 않아도 돼,
네 얼굴이 더욱 빛나 아프잖아?
봄밤엔 잠자면서 오줌을 누어야 해
겨우내 밀린 오줌을, 꼭, 그러나
이마는 물처럼 흐르고
미끄러운 유리 입술,
벽을 뚫고 나가기엔 너무 두껍고
누군가 새어들 만큼 얇아
아무래도 네 영혼은 누, 눈감고 아, 아,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출애급  -이성복
 
1. 오늘 다 외로워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 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愛人, 나는 퀭한 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慾情에 떠는 늙은 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主여
 

*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同時上映館)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天國)으로 통하는 차(車)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去勢)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便紙)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殘骸)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手淫)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華僑)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修業時代),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風化)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醉氣)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物體)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房)이었다
인형(人形)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敎會)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房)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空氣)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戀愛)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門間)을 지나가야 했다.
 
 
*정물 -이성복
 
꽃들, 어두워 가는 창가로 지워지는, 비명 같은 꽃들. 흙이 게워낸 한바탕 초록 잎새 위로, 추억처럼 덤벼 오는 한 무리 붉은 고요. 잔잔한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물너울을 일으키는 꽃들. 하나의 물너울이 다른 물너울로 건너갈 동안, 이마를 떨구고 풍화하는 꽃들. 오, 해 떨어지도록 떠나지 않는 옅은 어질머리.
 
 
*분지일기 -이성복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十字架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울고 있어요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 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증이 깊었다
 

강 - 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希望이라면
우리는 언제 絶望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2

꽃나무들은 물감을 흘리며
일렬로 걸어갔습니다
소박한 연등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요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사람들은 흰빛 향기로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늘어진 꽃나무 사이 그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편지 3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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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쥴리 런던
 
*견딜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낮술   -정현종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집  -정현종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송중(送中)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품 -정현종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 있고
나무는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새벽의 피  -정현종

아, 새벽 거리. 봤나? 그 속으로 지나왔지. 그 속으로? 차고 맑은 새벽의 피 속으로. 그렇지, 내 따뜻한 피를 섞었지. 내 몸 속의 한 줄기 파란 감각……새벽의 푸른 육체 속으로 뚫린 (나의 육체가 지나오면서 그린) 한 줄기 따듯한 구멍. 새벽은 아주 태연했어. 비정(非情)할 만큼. 아니 새벽은 아주 믿음직스러웠어.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서두르지 않는, 모든 태연한 것들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 차고 맑은 피 속에 네 따듯한 피를 섞어봐. 아 새벽 거리.

*창(窓)  -정현종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 준다. 자기는 거의 부재(不在)에 가깝다. 부재(不在)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天體)들과, 공중에 뿌리 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와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감격  -정현종
 
재 속의 불씨와도 같이
나는 감격을 비장하고 있느니
길이여 시간이여 살림살이여
점화없이는 살아 있지 못하는 것들이여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사랑의 꿈  -정현종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항상 生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生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生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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