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Uria Heep
*문신- 이성복
당신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천착하였습니다. 당신이 슬퍼할 줄 알면서도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피를 보았습니다. 당신에게서 당신에게로 가는 것들을 가로막고서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당신 가슴에 내가 새긴 끔찍한 문신이었습니다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본 적 없고
돌이켜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罪에서 지을 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後光, 너는 썩어 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熔岩처럼 가슴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不穩한 도랑을 따라
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 격렬한 고통도 없이 - 이성복
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 가고 봄 여름이 가고 저녁이면 미친 듯이 떨리는 미류나무 잎세들, 꽃 피는 저녁의 소슬담을 따라가면 흰 벽엔 아이들이 그려 놓은 여자와 남자, 남자의 키는 유난히 크고 여자는 긴 머리에 레이스 달린 치마 입었다 그 밑엔 빨간 글씨로 <<우리 선생님>>
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가고 사람들은 소리 없이 아팠다 아파트 놀이터 모래반에서 수십만 년 밀린 잠을 자고 나면 잡채다발처럼 걸리는 약속된 땅의 삼십 년,격렬한 고통도 없이 날이 가고 가슴 조이고 가슴 뛰고 변두리 행길엔 늙은 할아비가 끄는 목마가 있었다 어떤 아이는 빤쓰도 안 입고 올라탔다 올라탄 아이끼리 머리채를 꼬나잡고 악쓰며 울었다 잡채다발보다 미끄러운 약속된 땅의 삼십 년, 가난한 여인들이 수근거리는 길을 월부 책장사가 지나갔다, 격렬한 고통도 없이.........
*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이성복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수의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속에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수의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초록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 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봄날 아침 - 이성복
봄날 아침이었네 그가 와서 자꾸만 가자고 했네
이마에는 해와 달이 부딪쳐 울고 안개 사이로
나무들의 연한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았네 그가 가자고,
가자고 졸랐네 지난 여름 물이 넘친 개울가엔 먹을 것
없는 여인들이 흰 수건 머리에 두르고 둠벙가의
애벌레처럼 굼실거렸네 아버지, 세상의 어머니가
아파요 그의 중얼거림은 내 목을 졸랐네 봄날 아침,
빨리 달리는 자전거의 빗살처럼 세상의 앞날이 지워지고
있었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내 내장속에
몸을 들이밀었네 떠나지 않고 우리는 흰 누에고치처럼
안개의 잠을 잤네 오, 개울가엔 먹을 것 없는
여인들이 털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네
* 산유화 - 이성복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 저기도, 저 너머에도... 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릴 꽃이 사방에서 피어 올랐읍니다 그것은 당신 손 끝에 떠오르는 꽃밭 같았고 별들이 솟아나는 밤하늘 같았읍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 나는 선채로 꽃 피어날 것 같았읍니다.
* 음악 - 이성복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 이성복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붙어 숨떨어지기를 기다리네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온 사이 벽에 나방이가 없네 그 몸뚱이 데불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벽에도 방바닥에도 나방이는 없네 아직 죽음은 수직으로 오지 않았네 잘 살펴보면 벽과 책꽂이 사이 어두운 구석에서 제 몸집만큼 작고
노란 가루가 묻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 여리고성 근처 - 이성복
헐벗은 미루나무 꼭대기로 겨울 해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통조림캔에서 금방 꺼낸 복숭아 알을 닮은 해, 매연과 땟국물로 식사하고도 아프다 소리 한번 안 하는 해는 이 년마다 한 번씩 건강진단을 받는 것도 아니다 미루나무 꼭대기를 벗어난 해는 이제 돼지 감자탕집 간판에 정수리가 찢기면서 뒷산 언덕에 벌건 피국물을 퍼뜨린다 그 국물 다 빠지고 나면 여호수아 교회의 십자가에 네온이 들어오고 어둠은 생후 이삼 개월 되는 아이들을 찾아 집집마다 들쑤히는 헤롯왕의 군사들처럼 올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해는 또 예림 안마시술소 뒤쪽 출입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정액 흘러내리는 낙타표 텍스들과 함께 여간해 해는 절망하지 않는다 여간해서는 찢어지지 않는 낙타표 텍스, 질 좋은 제품처럼
* 서시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 이성복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미류나무 한 이파리에
멈추는 햇빛, 짧아져가는 햇빛
지금 내 입술에 멈추는 날카로운 속삭임
나는 괴로워했고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지금 짧아져가는 그 햇빛을 가로지르는 것들은 아름답다
오래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가자, 막을 헤치고 거기 가자
부서진 구름도 따스하게 주위를 흐르는 곳
* 높은 나무 흰 꽃들의 燈 - 이성복
근심으로 가는 짧은 길에 노란 꽃들이 푸른 회초리 같은 가지
위로 떨고, 높은 나무 흰 꽃들이 등을 세운다 어디로 가도 무서
운 길의 어느 입구에도 흰 꽃들의 등이 자꾸 떨어지고, 갈수록
어둠 한쪽 켠은 환하고 편하고, 병풍처럼 열리는 숲의 한가운데
서 오래 전 소리 자지러진다
-- 용서받지 못했던 날의 잘못이
이마의 못처럼 아프다
아이들아,
우리 살던 날들의 웃음을
다시 웃는 너희 얼굴에
수줍은 우리, 그림자 진다
*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귀에는 세상 것들이 - 이성복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푹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날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 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 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 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느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이성복
1998년 1월 2일 선산에서 상주로 통하는
25번 국도에서 개나리 덤불이나 관목숲,
하다못해 갈대까지도 성에로, 서리로
하얗게 코팅한 상태에서, 감 홍시 같은
해는 안개 낀 하늘 위 데구르르 굴러
내 차 유리창 앞에 딱 붙어 섰는데,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봄밤 -이성복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봄밤엔 어릴 때 던져 올린 사금파리가
네 얼굴에 박힌다
봄밤엔 별을 보지 않아도 돼,
네 얼굴이 더욱 빛나 아프잖아?
봄밤엔 잠자면서 오줌을 누어야 해
겨우내 밀린 오줌을, 꼭, 그러나
이마는 물처럼 흐르고
미끄러운 유리 입술,
벽을 뚫고 나가기엔 너무 두껍고
누군가 새어들 만큼 얇아
아무래도 네 영혼은 누, 눈감고 아, 아,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출애급 -이성복
1. 오늘 다 외로워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 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愛人, 나는 퀭한 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慾情에 떠는 늙은 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主여
*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同時上映館)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天國)으로 통하는 차(車)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去勢)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便紙)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殘骸)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手淫)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華僑)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修業時代),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風化)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醉氣)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物體)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房)이었다
인형(人形)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敎會)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房)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空氣)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戀愛)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門間)을 지나가야 했다.
*정물 -이성복
꽃들, 어두워 가는 창가로 지워지는, 비명 같은 꽃들. 흙이 게워낸 한바탕 초록 잎새 위로, 추억처럼 덤벼 오는 한 무리 붉은 고요. 잔잔한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물너울을 일으키는 꽃들. 하나의 물너울이 다른 물너울로 건너갈 동안, 이마를 떨구고 풍화하는 꽃들. 오, 해 떨어지도록 떠나지 않는 옅은 어질머리.
*분지일기 -이성복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十字架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울고 있어요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 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증이 깊었다
강 - 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希望이라면
우리는 언제 絶望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2
꽃나무들은 물감을 흘리며
일렬로 걸어갔습니다
소박한 연등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요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사람들은 흰빛 향기로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늘어진 꽃나무 사이 그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편지 3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