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낮술 -정현종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집 -정현종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송중(送中)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품 -정현종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 있고
나무는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새벽의 피 -정현종
아, 새벽 거리. 봤나? 그 속으로 지나왔지. 그 속으로? 차고 맑은 새벽의 피 속으로. 그렇지, 내 따뜻한 피를 섞었지. 내 몸 속의 한 줄기 파란 감각……새벽의 푸른 육체 속으로 뚫린 (나의 육체가 지나오면서 그린) 한 줄기 따듯한 구멍. 새벽은 아주 태연했어. 비정(非情)할 만큼. 아니 새벽은 아주 믿음직스러웠어.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서두르지 않는, 모든 태연한 것들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 차고 맑은 피 속에 네 따듯한 피를 섞어봐. 아 새벽 거리.
*창(窓) -정현종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 준다. 자기는 거의 부재(不在)에 가깝다. 부재(不在)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天體)들과, 공중에 뿌리 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와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감격 -정현종
재 속의 불씨와도 같이
나는 감격을 비장하고 있느니
길이여 시간이여 살림살이여
점화없이는 살아 있지 못하는 것들이여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사랑의 꿈 -정현종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항상 生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生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生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