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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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실레의 일그러진 육체


  이상(李箱), 너바나의 커트코베인, 도어스의 짐모리슨, 지미헨드릭스, 에곤실레, 이들은 스물 여덟에 생을 마감했다. 사르트르가 까뮈의 죽음을 두고 생의 문이 쾅하고 닫혔다고 표현했던가. 그들의 죽음도 그렇게 급작스레 닫혔다. 그들은 고호처럼 격렬하고 보들레르처럼 불온했다. 퇴폐가 그들의 삶을 장식해주었고 죽음이 그들의 삶을 완성시켜 주었다. 요절은 침묵을 대동하고 침묵은 카리스마를 불렀다. 침묵의 카리스마는 결국 신화를 만든다. 자신을 신화의 위치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든 요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요절에의 욕구는 얼마나 유치찬란한 미성숙의 징표인가.

  에곤실레의 드로잉은 무언가를 강하게 내쏜다. 미술사학자들이 그를 표현주의자로 구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드로잉은 단순한 표현 이상이다. 표현이란 어휘가 에곤실레를 다 감당해내지 못한다.

 「조롱하는 여인」이란 작품 앞에서 내 시선은 동요한다. 세상에 대해 한바탕 쏘아붙이는 듯한 표정의 「조롱하는 여인」은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암시해준다. 그녀는 이렇게 쏘아붙이고 있는 듯하다. <그것밖에 못해, 겨우 그거냐구?> 그녀의 시선은 성적인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이럴 때 상처받은 콤플렉스는 오히려 공격성으로 탈바꿈한다. 무릇 약한 놈이 전장터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법이 아닌가. 이렇게 부피도 없는 평면이 원시적인 야수성을 촉발시킨다.

  에곤실레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내 차분한 이성이 아니다.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그래서 통어할 수 없는 감성이다. 공포는 쾌락을, 욕망은 이성을 압도한다. 「이빨을 드러낸 자화상」을 보라. 징그럽게 일그러진 형상, 공포를 숨기고 있는 듯한 공격성, 초상화는 자신의 비틀린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의 그림은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너와 관계하고 싶어.> 오, 썩지 않는 불후의 욕망이여. .

  에곤실레의 육체들은 방전된 건전지와 같다. 권력에의 욕망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있다면 성적인 욕망이랄까.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자국처럼 남아있는 욕망. 말할 수 없이 고즈넉하고 슬픈, 그러면서도 강렬한.

  그가 죽기 한 해 전에 남긴 작품 「가족」에서의 육체는 모처럼 생명으로 부풀어오른다. 인물들의 시선은 원만하고 나른하고 따스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배경은 여전히 음산하다. 질병과 전쟁, 공포와 죽음이 어딘가에 도사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 그림 속의 행복함이란 언제 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절실하고 안타깝다. 세상의 모든 집이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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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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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금산, 그리고 마흔 네 개의 음절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 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에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금산>, 이성복


 유장하다는 것이 여기서는 다만 罪처럼  느껴진다. 어떤 허
튼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막무가내의 고요,  해발 700 몇 미
터라 하는데 해변 마을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침
묵이 응시하고 있는 섬들과 산맥,  깎아지른 좌선대 바위 벼
랑의 까마귀들이 이루는  헐벗은 풍경들 속에서 나는  나 자
신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풍경들  앞에서 돌연히  떠오른
'나'는 당혹스럽다. 여행, 그리고 깊은  밤중은 그런 당혹과
마주치게 한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나
의 어떤 깊은 운율을 따라가 침묵할 것인지........

 산에서의 밤은 일찍 찾아와 더디게  흘러 간다. 티이브에서
애국가 소리가  그친 옆방에서는  노파의 기침 소리가  들린
다. 저녁상을  물리고 "  나물과 된장국이 아주  맛깔스럽네
요" 했더니  노파는 "시장해서 그랬겠지요. 뭔  맛이 있겠어
요"한다. 항아리를 물로 흠치는 노파의  손등이 굴참나무 껍
질 같았다. 노파의 아들인 듯한  몸피가 툰실한 부산 여관의
청년은 깊은 잠 속에 있는지 인기척이  없다. "저 소나무 아
래쪽이 머리구요  길쭘하게 튀어 나온 곳이  꼬리죠. 영락없
이 거북입니다"그는  내게 거북 바위며 돼지  바위의 형상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애써 자신의 설명에  동의해줄 것을 기대
했다. 보고자  하면 바위에서는 어떠한 형상의  해석도 가능
하다. 저녁 무렵  내가 두 마리의 돼지가 엉켜  있다는 상사
암 근처의 거대한 바위에서 읽은 것은 그 청년의 마음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 누렇게  탈색된 벽지, 이런 무미함
은 적막에 썩 어울린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墨畵> 전문, 김종삼

 오래된 시집을 편다. 언어가 오히려  침묵에 기여하는 김종
삼의 시편들 속에서  마흔 네 개의 음절로 된 이  시는 유달
리 고즈넉하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자연과의  따스한
교감과 고요한  시선의 깊이, 모든 장식과  치장을 떼어버리
는 지적인 절제가 너무 많은  말들을 무참하게 한다. 얼마나
많은 말들  속에서 여행은  침묵과의 마주침이다.  오랫동안
침묵을 몸에 흐르게 하고 풍경들  앞에 서는 일이다. 한겨울
의 남해금산은  장엄한 침묵의  풍경이다. 까마귀가  그렇고
바위가 그렇고 산맥이 그러하다.

 촛불 한 자루가 밝히는 김종삼을  읽으며 고요는 고요의 극
점을 향해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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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현대문학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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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칙적인 수영과 조깅으로 복부와 종아리에 여전히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40대 중반, 그것이 하루끼의 이미지다. 그의 모든 소설의 장정은 조깅복 상의를 입은 그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신는다는 운동화와 조깅복은 하루끼의 단순한 기호물에서 그치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장은 그에게 불편하다. 그것은 무겁고, 무거운 만큼 보행을 늦춘다. 달리고 싶은 자에겐 조깅복과 운동화면 그만이다. 워크맨의 경쾌한 음악이 그로 하여금 구름의 보행을 닮게 할 것이다. 

  재즈에서 얼터너티브, 윌리엄 와일러에서 스필버그까지 아메리칸 문화의 뒷골목까지 하루끼는 빠삭하다. 그는 대단한 문화적 식욕을 가졌고 그런 문화적 식욕을  오늘날의 젊은 문인(문인뿐이겠는가. 오늘날의 재즈붐과 문화적 담론의 팽창을 보라. 개나 소나 재즈고 영화다.)들은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눈치다. 마치 그런 문화적 식욕의 부진이 문화적 후진이라도 되는 양.
  거리의 장식장과 그 안에 디스플레이가 그렇듯 가볍고 경쾌하고 산뜻한 하루끼의 보행. 하루가 멀다하고 버전업되는 자본주의적 속도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하루끼. 그는 그 자본주의적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조깅을 하는 것일까.
 
  하루끼와는 많이 다른 곳에 마루야마 겐지가 있다.그는 좀 삐딱하다. 다소 거칠고 야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소설 <달에 울다> 장정에 있는 그의 사진은 어떠한가. 검은 선글라스. 팔없는 검은 나시 티셔츠와 검은 바지와 검은 구두와 검은 양말. 의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키기 위해, 조깅이나 수영으로 만든 육체가 아니라 선천적인 꼬장꼬장함으로 인해서 만들어졌을 법한 다소 신경질적인 육체, 그것이 마루야마의 몸이다. 수틀리면 한방 내지를 기세의 육체. 이런 사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잖음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의 가족>으로 나의 입을 반쯤 벌어지게 했던, 마루야마의 문장은 독보적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뒤척이지도 않는다. 이불에 누운 채, 달빛에 의지해서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낡은 병풍의 묵화를 바라보고 있다. 벌써 오랫동안 그러고 있지만, 몸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특히 발가락이 시리다.> 이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달에 울다>는 무엇보다 괜챃은 문체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내용이고 세계관이고 간에 소설은 무엇보다 문체가 아닐까하는 비약을 자연스럽게 한다. 간결한 문장,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는 칼로 자른 듯하다. 극도로 투명하다. 그의 문장은 요란하지 않지만 그 맛이 오래 간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루끼보다 훨씬 더 기교적인지 모른다. 밖으로 드러내는 기교가 아닌 감추는 기교. 에이, 난 그런 거 몰러, 하는 식의 능청스런 기교.

  <달에 울다>의 첫 페이지의 문장들을 보자. <식수림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다시 한번 바닥없는 정적에 푹 잠기고, 여기저기에서 실개울 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안개처럼 조용하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것은 몇만이라는 누에가 뽕잎을 부지런히 뜯어먹는 소리이다. p.11> 실개울이 불어나는 소리를 듣는 귀, 누에게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귀, 이것이 겐지의 귀다. 하루끼의 귀가 비틀스에게 열려 있다면 겐지의 귀는 실개울과 뽕잎에 열려 있다. 그의 귀는 불가능한 것을 듣는다. <법사는 여울을 건너는 발소리를 알아차린다.p.14>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린다고 하는 것이 선사들의 어법이다. 겨자씨 안에도 수미산이 있다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그러나 선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분고분하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어법도 그런 것이리라. (귀란 모름지기 들리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뭐 헌법에라도 있단 말인가? )
 
  귀신의 귀를 빌렸는지 그의 귀는 때론 불가능 너머의 것까지를 듣는다. < 강물 소리, 세 가지 종류의 개구리의 합창, 아버지의 짐승 같은 심음 소리. 예전에 누에방으로 사용하던 아랫층 마룻방은, 지금은 텅 비고, 고요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죽은 사람들의,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기척이 넘실거리고 있다.p41> 그는 고백한다. <내 청력은 나이와 더불어 예리해 가고 있다. 예컨대, 사과나무가 땅 속의 물을 빨아먹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이런 과장된 청력은 어쩌면 겐지의 능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겐지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픽션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겐지의 매력은 투명한 노골성에도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그런 천진성(겐지를 너무 과찬하고 있는 건가? 하긴 계집이 이쁘면 방귀냄새까지 향기롭다지 않은가)이 겐지에겐 있다. <야에코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그르고 씩 웃더니 활짝 가슴게를 열어 보였다. 모양새 좋은, 소독액보다 더 하얀 유방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는다.p.40>, <야에코의 모습은 전라나 같다. 사타구니 부분, 그 훨씬 안쪽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몹시 혼란스럽다.p.46>

  많은 사람들이 하루끼는 흉내내도 겐지는 흉내내지 않는다. 난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곳에 인파가 드글거릴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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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kino37 2005-10-06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를..."
이 말이 가장 인상깊네요.
소수만 공유하자는 그 말이 말이에요.
좋은건 몇명만 알자구요`~
 
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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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세의 팡세>란 김승희의 수필집을 읽다보면 엘리오트의 싯구와 만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난 이 시구가 있는 엘리오트의 시를 아직 읽지 못했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나의 황폐함은 보다 나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김승희는 번역했지만 나는 김승희의 번역이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다. <나의 황폐는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번역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다시 그 귀절을 곰곰이 뇌어본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황폐는 황폐, 그 자체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선뜻 내 자신을 복속시킬 만한 가치가 부재하다는 뜻이지,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니힐리스트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열렬하게 가치를 찾는 자라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댈 만한 가치가 없는 자는 스스로 기댈 만한 언덕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 새로운 언덕이 엘리오트가 말하는 better life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엔 룰이 참 많다. 타부도 많고 이래라 저래라는 강제도 많다. 숨바꼭질에도 룰은 있다. 술래는 열심히 게임의 멤버들을 찾으러 돌아 다녀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다. 술래가 그걸 지키지 않으면 게임은 영 맥이 빠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같이 논다는 것>은 그 게임의 룰을 지키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로 한다. 그 룰을 지키지 않으면 게임은 깨진다. 대체 누가 무궁화,라는 세 글자만 외고 뒤를 획 돌아다 보는 술래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같이 하고 싶겠는가. 나 같으면 그 룰이 맘에 안들면 그 게임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 같이 안 놀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놀고 싶단 생각이 든다면 마땅치 않은 룰을 마땅하게 고치면 된다. 백남준이 그런 이야길 한 것 같다. 어떤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게임의 룰을 고치는 것이라고. 내 멋대로 게임의 룰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고치고 보니 옛날엔 몰랐는데 정말 재밌는 걸>하고 멤버들이 따라준다면 이거야말로 <즐거운 쿠데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상>을 한 번 보자. 내가 세상의 룰이 마땅치 않다고 삶을 마다할 것인가. 세상과 같이 놀아야 하는 것이 목숨 가진 자의 필연이라면 세상의 룰에 입 뻥긋하지 않고 군소리없이 그것에 따르면 된다. 전통적으로 학교는 바로 그 세상의 룰이 참 괜찮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점잖게 그걸 <사회화>라고 이름한다. 한 마디로 <사회화>는 놀이의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놀이의 규칙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새 놀이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만약  새로운 룰을 만들고, 이러이러한 룰을 가진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는데 나랑 같이 놀아줄 사람 없느냐는 공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나와 놀아줄 사람 한 명도 나타나주지 않는다면  어찌 할 것인가. 결국 혼자 놀 수밖에 없는 자는 황폐를 면할 수가 없다. 선각자는 <혼자 노는 자이다>. 아무도 그가 고안한 놀이의 규칙에 흔쾌히 박수를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매한 생각인들 아무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데야 별 수 있겠는가.
 
 나는 두 종류의 선각자를 안다. 하나는 허무주의자요, 하나는 순교자다. 허무주의자는 외치지 않는다. 반면에 순교자는 외친다. 나는 그 두 방식 중에 어느 방식이 더 훌륭한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존재의 방식이냐를 논하자는 것이 이 글의 의도도 아니다.(후자의 방식에 더 후한점수를 주는 그런 풍토도 사실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허무주의자건 순교자건 그들에겐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엘리오트의 시구에서의 better life란 엘리오트가 혼신으로 만들어낼 룰이고 비전이리라. 그러나 그 <꽃동산>에 누가 와서 놀아줄 것인가.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는 한 better life는 또 하나의 황무지에 불과하다. 좀 씁쓰레한 기분으로 나는 그의 시구를 이렇게 바꾼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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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6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터부의 수수께끼
정성호 / 사람과사람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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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는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텍스트도 있다. 계몽의 의지를 가진 작가들은 대체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미학적,조형적 관심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앞설 때,  중층적 의미 구조는 미덕이기에 앞서 명쾌한 커뮤니케이션을 저해하는 소위 “소음(noise)”에 다름 아니다. 무릇 理性의 논리란 명쾌하고 삽상하게 구획된 의미를 기반으로 제 스스로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의미란 칸을 나누고 구획하는, 구분의 원리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선과 악, 여성과 남성, 육체와 정신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자기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선이냐 악이냐는 등의 2항 대립에 의해서 코스모스를 정돈해 가는 이분법적 사고는 음양이론의 원리에서부터 디지털형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장구하다.


   그러나 언제나 중간은 있는 법,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닌 것, 검은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것,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그런 어중간한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런 어중간한 것들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무지개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언어는 구분하지만 현실은 언어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혼돈스럽게 존재한다. 어떤 무지개도 일곱 가지 색깔로 명쾌하게 칸막이지워지지 않았다. “빨주노초파남보”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언어일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현실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이 그런 방식으로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언어 속에 존재할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카오스의 세계를 명확한 질서의 공간으로 바꾸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세세한 의미의 차이- 뉘앙스를 발전시켜 왔다고 해도 언어로서 분류해낼 수 없는 영역들이 반드시 세상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류학자 터너는 말한다. “경계성, 혹은 경계[문지방Threshold]에 있는 인간의 속성은 예외 없이 애매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사람들의 자세는 평소 상태나 지위를 문화적 공간에 설정하는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그것에서 빠져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도 있지 않으며, 저쪽에도 있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애매하고 부정확한 속성은 사회적, 문화적 이행을 의례화하고 있는 많은 사회에서는 다양한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경계성은 종종 죽음이나 자궁, 보이지 않는 것, 암흑, 암수동체, 황야, 그리고 일식이나 월식에 비유된다.”라고.( 『터부의 수수께끼』에서 재인용 )


   경계[문지방]에 있는 것들은 동일성의 체계와 질서의 세계를 혼란시키고 교란한다. 이런 까닭에 ‘분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박해는 시작된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저녁의 황혼 무렵은 온갖 도깨비가 우글거리는 시간이 된다. 발리섬에서는 황혼녘이면 악령이 지상을 배회한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던가.  모든 것이 혼연일체로 뒤죽박죽이 된 카오스는, 각기 개체로 명확히 분리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 어떤 것을 연속하는 그 유사물에서 잘라내서 차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分類의 논리이다. 이렇게 해서 다른 것으로부터 절단된 개체는 그 자체로서의 고유성과 성스러움을 획득하게 된다. 성스러운 것에는 아무런 흠이나 결점이 없는 완전한 경우에 한해서 청정성(淸淨性)이 부여된다. 반대로 고유성이 불완전한 경우에는 불순하고 불결하다고 여겨진다. 즉, 다른 물체나 카테고리와 교차하고 혼재하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터부가 되는 것이다. 문지방은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곳이므로 분류의 체계를 위협하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다. 불순함을 성스러움으로 전화시키고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passage rite), 푸코가 말하는 감옥, 병원, 학교와 같은 감시의 기제들은 근대성이라고 하는 순수(?)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들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로서의 체계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경계[문지방]에 있는 자들을 따로 관리,통제하고, 가능하다면 기존의 체계에 편입시키기 위한 기제, 거기엔 막대한 고통의 비용이 지불된다.

2. 문지방에 앉은 자, 너의 정체를 밝혀라?

   더러움(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에 대한 혐오의 이유가 악취나 구역질과 같은 生理的 차원에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물론 위생학적,생리적 차원에서의  더러움 대한 규정이 곧바로 더러움을 혐오해야 한다는 당위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생리적인 차원의 설명도 때로는 상당 부분을 문화적인 면과 연관 하에서 온전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가령 함석을 손톱으로 긋는 소리를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혐오할 수 있고, 그 소리에 구역질까지 느끼는 생리적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食人의 풍습은 어떤 특정 문화권에서만 혐오의 대상인 것이지, 식인의 풍습 자체가 種으로서의 인류 공통의 구역질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일견 본능적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구역질의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상당 부분 문화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규정된 것일 때가 허다하다. (食人의 풍습, 그 자체가 도덕적 보편성을 가지느냐는 도덕론자의 항변은 범주 착각의 오류이다. 구역질이 선천적인 것이냐 문화적인 것이냐, 아니면 일정 부분 선천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일정 부분 문화적인 것이냐를 따지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나 냉정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막연한 혐오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혐오는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상,체질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혐오의 대상쪽에서 볼 때는 존재의 死活이 걸린 생존권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두움은 존재에겐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디만, 어두움을 상징하는 ‘검정색’마저도 하나의 위협일 수는 없다. 검정색이 하나의 위협이라는 가정을 반성없이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인종차별이라는 예고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물론 건강한 살은 희고, 시체는 거무튀튀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연관된다고 할 때, 억압의 상징 체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검정색으로부터 ‘부패와 죽음’이라는 불필요하게 덧생긴 잉여의 의미를 걷어내고 문지방으로부터 오염의 의미를 걷어내는 작업은 비로소 억압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대체적으로 무엇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양성소유자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획된 분류체계 속에서는 극심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성서의 「레위기」는 짐승이면서 새처럼 하늘을 나는 박쥐, 새이면서도 날지 못하는 타조, 육지와 수중에서 동시에 생활하는 개구리, 포유류이면서도 수중 생활을 하고 알을 낳는 오리너구리 등 애매한 양의적 경계상의 동물들이 터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지방에 앉지 말라’는 말은 한국인의 것만이 아닌 듯싶다. 백인이면 백인이고 흑인이면 흑인이어야지 혼혈아는 불순하다는 관념도 이런 터부의 논리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체면 고체고 액체면 액체이어야지 gel상태의 끈적끈적함, 느물느물거림. 미끈미끈함, 질척질척함은 기분 나쁘다. 물컹한 것을 밟을 때의 불쾌감은 어떤 한 개인의 독점적인 느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쪽에서 돌이 날아왔다>라는 어떤 이의 싯구는 문지방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혐오의 감정을 재치있게 형상화해주고 있다. 문지방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우린 이렇게 주문한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라고. 그러나 이런 주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억압이다. <너의 정체를 밝히라>는 주문은 실상, <너의 정체를 기존의 분류 체계의 틀에 끼워 맞추어 보아라>라는 주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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