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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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실레의 일그러진 육체


  이상(李箱), 너바나의 커트코베인, 도어스의 짐모리슨, 지미헨드릭스, 에곤실레, 이들은 스물 여덟에 생을 마감했다. 사르트르가 까뮈의 죽음을 두고 생의 문이 쾅하고 닫혔다고 표현했던가. 그들의 죽음도 그렇게 급작스레 닫혔다. 그들은 고호처럼 격렬하고 보들레르처럼 불온했다. 퇴폐가 그들의 삶을 장식해주었고 죽음이 그들의 삶을 완성시켜 주었다. 요절은 침묵을 대동하고 침묵은 카리스마를 불렀다. 침묵의 카리스마는 결국 신화를 만든다. 자신을 신화의 위치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든 요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요절에의 욕구는 얼마나 유치찬란한 미성숙의 징표인가.

  에곤실레의 드로잉은 무언가를 강하게 내쏜다. 미술사학자들이 그를 표현주의자로 구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드로잉은 단순한 표현 이상이다. 표현이란 어휘가 에곤실레를 다 감당해내지 못한다.

 「조롱하는 여인」이란 작품 앞에서 내 시선은 동요한다. 세상에 대해 한바탕 쏘아붙이는 듯한 표정의 「조롱하는 여인」은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암시해준다. 그녀는 이렇게 쏘아붙이고 있는 듯하다. <그것밖에 못해, 겨우 그거냐구?> 그녀의 시선은 성적인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이럴 때 상처받은 콤플렉스는 오히려 공격성으로 탈바꿈한다. 무릇 약한 놈이 전장터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법이 아닌가. 이렇게 부피도 없는 평면이 원시적인 야수성을 촉발시킨다.

  에곤실레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내 차분한 이성이 아니다.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그래서 통어할 수 없는 감성이다. 공포는 쾌락을, 욕망은 이성을 압도한다. 「이빨을 드러낸 자화상」을 보라. 징그럽게 일그러진 형상, 공포를 숨기고 있는 듯한 공격성, 초상화는 자신의 비틀린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의 그림은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너와 관계하고 싶어.> 오, 썩지 않는 불후의 욕망이여. .

  에곤실레의 육체들은 방전된 건전지와 같다. 권력에의 욕망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있다면 성적인 욕망이랄까.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자국처럼 남아있는 욕망. 말할 수 없이 고즈넉하고 슬픈, 그러면서도 강렬한.

  그가 죽기 한 해 전에 남긴 작품 「가족」에서의 육체는 모처럼 생명으로 부풀어오른다. 인물들의 시선은 원만하고 나른하고 따스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배경은 여전히 음산하다. 질병과 전쟁, 공포와 죽음이 어딘가에 도사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 그림 속의 행복함이란 언제 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절실하고 안타깝다. 세상의 모든 집이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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