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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33세의 팡세>란 김승희의 수필집을 읽다보면 엘리오트의 싯구와 만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난 이 시구가 있는 엘리오트의 시를 아직 읽지 못했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나의 황폐함은 보다 나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김승희는 번역했지만 나는 김승희의 번역이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다. <나의 황폐는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번역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다시 그 귀절을 곰곰이 뇌어본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황폐는 황폐, 그 자체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선뜻 내 자신을 복속시킬 만한 가치가 부재하다는 뜻이지,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니힐리스트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열렬하게 가치를 찾는 자라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댈 만한 가치가 없는 자는 스스로 기댈 만한 언덕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 새로운 언덕이 엘리오트가 말하는 better life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엔 룰이 참 많다. 타부도 많고 이래라 저래라는 강제도 많다. 숨바꼭질에도 룰은 있다. 술래는 열심히 게임의 멤버들을 찾으러 돌아 다녀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다. 술래가 그걸 지키지 않으면 게임은 영 맥이 빠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같이 논다는 것>은 그 게임의 룰을 지키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로 한다. 그 룰을 지키지 않으면 게임은 깨진다. 대체 누가 무궁화,라는 세 글자만 외고 뒤를 획 돌아다 보는 술래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같이 하고 싶겠는가. 나 같으면 그 룰이 맘에 안들면 그 게임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 같이 안 놀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놀고 싶단 생각이 든다면 마땅치 않은 룰을 마땅하게 고치면 된다. 백남준이 그런 이야길 한 것 같다. 어떤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게임의 룰을 고치는 것이라고. 내 멋대로 게임의 룰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고치고 보니 옛날엔 몰랐는데 정말 재밌는 걸>하고 멤버들이 따라준다면 이거야말로 <즐거운 쿠데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상>을 한 번 보자. 내가 세상의 룰이 마땅치 않다고 삶을 마다할 것인가. 세상과 같이 놀아야 하는 것이 목숨 가진 자의 필연이라면 세상의 룰에 입 뻥긋하지 않고 군소리없이 그것에 따르면 된다. 전통적으로 학교는 바로 그 세상의 룰이 참 괜찮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점잖게 그걸 <사회화>라고 이름한다. 한 마디로 <사회화>는 놀이의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놀이의 규칙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새 놀이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만약 새로운 룰을 만들고, 이러이러한 룰을 가진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는데 나랑 같이 놀아줄 사람 없느냐는 공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나와 놀아줄 사람 한 명도 나타나주지 않는다면 어찌 할 것인가. 결국 혼자 놀 수밖에 없는 자는 황폐를 면할 수가 없다. 선각자는 <혼자 노는 자이다>. 아무도 그가 고안한 놀이의 규칙에 흔쾌히 박수를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매한 생각인들 아무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데야 별 수 있겠는가.
나는 두 종류의 선각자를 안다. 하나는 허무주의자요, 하나는 순교자다. 허무주의자는 외치지 않는다. 반면에 순교자는 외친다. 나는 그 두 방식 중에 어느 방식이 더 훌륭한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존재의 방식이냐를 논하자는 것이 이 글의 의도도 아니다.(후자의 방식에 더 후한점수를 주는 그런 풍토도 사실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허무주의자건 순교자건 그들에겐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엘리오트의 시구에서의 better life란 엘리오트가 혼신으로 만들어낼 룰이고 비전이리라. 그러나 그 <꽃동산>에 누가 와서 놀아줄 것인가.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는 한 better life는 또 하나의 황무지에 불과하다. 좀 씁쓰레한 기분으로 나는 그의 시구를 이렇게 바꾼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fri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