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0 #시라는별 35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 허수경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나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허수경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를 절반 가량 읽었다. 대체적으로 슬프다. 시인이 죽기 2년 전에 출간된 시집이라는 걸 알고 읽어서인지 허 시인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가 특히 더 그랬다.
이 시는 지난 번 소개한 <엄마의 나의 간격>처럼 존재의 원초적 고독을 노래한다. 우리 모두는 별개로 존재하는 섬이다. 허수경 시인이 ‘섬이 보내는 편지‘라 하지 않고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라고 쓴 까닭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연에서 나는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일찍이 정현종 시인은 <섬>이라는 짧은 시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라고 말했다. 정 시인이 사람 간의 소통 열망을 노래했다면, 허 시인은 사람 간의 소통 불가를 꼬집는다. 서늘한 통찰이다. 서늘한데 또 뭉클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신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소통을 염원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하려 해도,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가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섬과 섬 사이의 간격처럼 절대 메워지지 않는다. 메울 수 없기에 그 간격을 허수경 시인은 ˝세기의 차이˝이자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고독˝이라 부른다. 원초적 고독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책이 있다.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독하다. 뇌 속에서는, 우리는 특히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는 않는다.˝(132)
˝격렬한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가장 또렷하게 자기 자신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수도꼭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을 하나하나 전부 눈으로 쫓아가듯,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이 가능하다. /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난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1초1초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 그러나 고통뿐 아니라 애초에 신체적 감각을 느끼는 일 자체가 내가 나한테 얽매여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134)
고독은 허수경 시인의 말처럼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이기도 하나, 기시 마사히코의 지적처럼 내가 나임을 오롯이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나의 고독을 모른다. 나의 고통을 모른다. 나의 아픔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나 나나 그리 쓸쓸하게, 그리 처절하게, 그리 헛헛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서로가 알아봐 줄 수 있다. 비록 창백하게 빛나는 별이고 잊혀질 손이고 사라질 섬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 시인의 말따나 짤막한 안부 인사 뿐일지도. 고독이 고독에게 악수를 청할 때, 그 손은 꼬옥 잡아주자. 비록 실오라기 같은 공감밖에 나눌 수 없다 해도, 악수를 하는 그 순간만큼 뜨거워질 수 있을 테니까. 따뜻함이 피처럼 온몸으로 퍼질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순간의 힘으로 영원을 사는 존재들이니까.
지금은 오월의 싱그러움에 기대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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