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7 매일 시읽기 80일 

역류성 식도염  
- 이규리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역류하였을까 

누추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으려는 몸 
물이 물 아닌 시름 

내 슬픔의 경로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인데 

살아 자주 역류했다 
당신이 
관념이 
아름다움이 

세상모르고 거기 있을 때 
서러운 풍경은 모이거나 흩어졌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과 문 사이에서 앞날을 흔들어 보기도 했으나 

거꾸로 서서 내일을 본 적 있니 
웃어본 적 있니 
물구나무 서서 보는 일은 좀 괜찮았는데 

무언가 잘 안 되어 생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면 
모쪼록 
이것도 역설의 방식이라 하면 안 될까 

나도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이규리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로 돌아왔다. 모국어가 주는 편안함은 말 그대로 엄마 품 같은 푸근한 편안함이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이규리 시인은 2019년 <Bravo My Life>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시인들의 몸에는 정말로 시를 탄생시키는 장치가 들어 있는 듯하다. 이규리 시인은 그것을 시인답게 ˝시를 품은 인식˝이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역류성 식도염>은 제목에 낚여 먼저 읽게 된 시다. 역류성 식도염 만성 질환자라 시인이 이 병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했건만, 아뿔싸, 내가 시인의 존재를 띄엄띄엄 보았구나.

이 시는 내장의 역류만이 아닌 모든 것의 역류를 이야기한다. 사랑도, 사람도, 생각도, 감정도, 인생도 ˝살아˝ 역류한다. ˝누추한 일,˝ ˝슬픔,˝ ˝서러운 풍경˝ 떠나간 사랑따위 그저 사라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어쩌겠는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생의 속성인 것을. 하여 시인은 말한다. 내가 원했던 삶이 내가 원했던 길로 흐르지 않는다면 ˝모쪼록 / 역설의 방식이라˝ 가벼이 넘기라고. 나를 주인으로 가진 나라는 사람 역시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세상이야 오죽 그렇겠느냐고.

이런 이치는 세상을 제법 산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다. 시는 곧 철학이다.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마지막 두 행에서 시인의 달관한 자세가 읽힌다. 오래 묵은 것들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것을 지우려 매달리는 순간부터 번뇌가 시작될 수 있다. 번뇌에 사로잡히면 눈도 귀도 멀고 만다. 그러니 얼룩이 지면 진 대로, 딱지가 붙었으면 붙은 대로 받아들이고 살 줄도 알아야지. 아암, 그래야지.

그러나 . . . . . . 왼쪽 눈밑에 진하게 생긴 검버섯은 지 우 고 싶 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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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 민음사 세계시인선 24
알프레드 테니슨 지음, 이상섭 옮김 / 민음사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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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6 매일 시읽기 79일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 Tears, Idle Tears 
- 앨프리드 테니슨 Alfred Tennyson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 뜻도 모를 눈물이 
그 어떤 성스런 절망의 심연에서 나온 눈물이 
가슴에 치밀어 눈에 고이네 
복된 가을 벌판 바라다보며 
가버린 날들을 추억할 때에. 

저승에서 정다운 이들을 데려오는 돛폭에 
반짝거리는 첫 햇살처럼 신선한, 
수평선 아래로 사랑하는 이들 전부 싣고 잠기는 돛폭을 
붉게 물들이는 마지막 빛살처럼 구슬픈, 
그렇게 구슬프고, 그렇게 신선한 가버린 날들. 

아아, 임종하는 눈망울에 창문이 부연 네모꼴로 되어갈 무렵 
어둑한 여름 새벽 잠 덜 깬 새들의 
첫 울음 소리가 임종하는 귓가에 들려오듯, 
그렇게 구슬프고, 그렇게 낯선 가버린 날들. 

죽음 뒤에 키스의 추억처럼 애틋하고 
임자가 따로 있는 입술에 
가망없는 짝사랑이 꿈꾸는 키스처럼 달콤한, 
사랑처럼, 첫사랑처럼 깊은, 
온갖 회한으로 걷잡을 수 없는, 
오 살아 있는 죽음, 가버린 날들! 


첫 눈 오는 날 집에 도착한 세 권의 시집 중 마지막 한 권. 영시 번역이라, 그것도 오래 전 번역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개정 한 번 없이 계속 출간만 하냐. 속상하다 진짜.

앨프리드 테니슨의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이상섭 옮김/민음사)가 첫 출간된 해는 1975년이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독자들이 잘 찾지 않는 책이어서인지 이 오랜 세월 동안 번역자도, 출판사도 손을 보지 않은 듯하다. 역사 해설 또한 그대로인 듯. 영시 번역은 둘째치고 해설은 내용 전달에만 치중했을 뿐 글의 완성도도 문장 완성도도 떨어진다. 속상하다 진짜.

앨프리드 테니슨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청춘의 베프이자 매제가 될 예정이던 아서 헨리 핼럼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오랜 기간 상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테니슨은 자신이 사랑하는 시로 고통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다. 그 시간이 17년이었다. 그의 눈물과 피와 고름이 얼룩져 탄생한 것이 <<추념의 시 In Memorium>>다. 133편에 달하는 이 장편 서정시는 시쳇말로빅히트를 쳤다. 테니슨은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쾌척했다. 돈이 없어 미뤄둔 혼인을 했고, 워즈워스를 이어 계관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테니슨은 1809년에 태어나 1892년 8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는 <<공주 The Princess>>에 삽입된 서정시들 중 한 편이라고 한다. ˝tears, idle tears˝는 ˝눈물이, 공연한 눈물이˝라고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쓸데없기보다 까닭 모를 슬픔 같아서다. 돌아오지 않을,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날들에 대한 ‘회한‘을 노래한 시로 읽힌다. 번역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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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2-18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안 읽는 저희 큰아들이 유일하게 읽은 시집이 테니슨의 두꺼운 시집인데,,,저는 읽은 시가 5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시도 열심히 읽으시고 다른 책도 열심히 읽으시는 책 님은 국문학 전공??^^;

행복한책읽기 2020-12-18 22:01   좋아요 0 | URL
와우. 테니슨 시집을 영어로 읽었겠네요. 아드님은 영어가 모국어 같겠죠. 저는 이 시집 읽으면서 영어는 딸리고 한국어는 아쉽고 그랬어요. 제 전공은요, 비밀이에요.ㅋㅋ 일단 국문학은 땡!^^

희선 2020-12-19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전에 나왔네요 다른 사람이 한국말로 옮기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았다니... 예전인데 오래 살았네요 그때도 오래 산 사람은 있기도 하더군요 일찍 죽은 사람이 더 많았겠지만...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0-12-19 23:58   좋아요 0 | URL
그죠. 테니슨은 그 시대로선 거의 백세 장수한 것 같아요. 영시도 소설처럼 재번역본이 나오면 좋겠어요^^
 

20201215 매일 시읽기 78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김행숙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 . . . . .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2020년 첫 눈 내리는 날, 세 권의 시집이 내 집에 왔다. 이규리 시집에 이어 오늘은 김행숙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뒤적거렸다. 2020년 7월에 출간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시집의 첫 시다. 제목들을 후루룩 훑고 이 시와 다른 몇 편의 시들을 읽어 보니 시인은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하다.

나에게는 이제 ‘기억‘이란 말 끝에 ‘엄마‘가 따라붙는다. 어미가 치매 판정을 받은 지는 4년째. 내년이면 5년 차에 접어든다.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약이 정말 좋다) 엄마의 치매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 19가 더 심해지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얼굴 보는 면회도 허락될 것 같지 않아 며칠 전 엄마에게 다녀왔다. 내 어미는 여전히 딸을 기억한다. 사위와 손녀손자도 기억한다. 당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억한다.

내 어미는 이제 당신의 기억으로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오래 만났으나 만남을 뒤로한지 오래된 사람들을 더는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 어미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올까 두려우면서 그 날의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를 늘 생각한다.

˝처음 보는 노인인데 . . . . . ˝라는 구절을 읽다 덜커덩, 심장이 내려앉았다. 언제고 내 어미가 거울을 보고 저런 말을 할 것만 같아서. 기억은 인지 행위다. 그렇기에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기억만 잃는 게 아니다. 몸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까지 같이 잃는다. 시간도 잃는다.

생각을 하기 힘든 엄마를 대신해 내가 엄마의 삶을 기억하려 애쓴다. 엄마가 내게 기억을 돌려주었듯이.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 대부분은 엄마의 기억을 통한 재기억들이다. 그 기억들은 어쩌면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처럼 애초의 사실보다 더 큰 기억으로 자리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왜곡된 기억조차 ‘나‘를 형성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사라지는 기억들,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안타까워서 내 어미를 생각할 때면 안쓰러움을 어쩌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중이다. 그래서 내 어미가 나를 보고 ˝니 년은 나이를 처 먹고도 아직도 애 같냐˝라는 말을 하도록 옛날과 똑같이 수다를 떨고 웃는다. 그러면 어미도 덩달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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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매일 시읽기 77일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2020년 12월 13일. 첫눈 내린 날. 이 책이 도착했다. 재밌기도 하지. syo님이 페이퍼에 소개한 글을 보고 알게 된 시인이자 시집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를 알 수도 없고 모두 알 필요도 없지만, 신인도 아닌 시인을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허탈했고 좀 민망했다.

이내 사람진다는 점에서 눈과 마음은 닮았다. 이내 사라져서 눈과 마음은 부질없다. 그런 ˝부질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많이도 이야기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부질없는 것은 진정 부질없는 것일까? 시는 역설적이게도 부질없음의 쓸모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부질없는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가려주기도 하고 떠올리면 괴로울 수 있는 일을 흘려보내게도 해주었다.

부질없음에 기대어 살았던 나날이 길었다.˝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의 빛깔은 ˝희고 또 희다.˝ 하얗게 바랜 마음. 그 마음을 ˝뭉쳐˝ ˝방안에˝ 두었다. 내 마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으려면 ˝공중˝이 아닌 ˝허공˝이 필요했기에. 마음이란 것은 눈처럼 ˝풀풀˝ 날린다. 안착하지 못하고 흩날리다 끝내는 녹아 버린다. 그렇기에 마음은 늘 첫눈 같다. 마음아, 또 시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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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12-17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시간 전에 다 읽었는데,
물론 좋지만 너무 좋지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전 더 좋았어ㅎ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0-12-17 09:14   좋아요 0 | URL
호. 다 읽으셨다니. 전 몇 편밖에 못 읽었어요. 천천히 읽고 syo님처럼 너무 좋으면 ‘최선‘ 까지 가볼라구요
 

20201213-4 심봤다!!! 쌍둥이자리 유성우 

2020년 12월 13일 저녁 시간. 긴급히 타진된 밴드 톡. ˝오늘 유성우가 내린대요.˝ 뭐? 진짜? 첫 눈 내린 날, 유성우도 내린다고? 쌍둥이자리 유성우는 매년 12월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밤 10시.옷을 단단히 껴입고 아이들과 함께 별들이 잘 보일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인공의 빛이 들이치지 않는 어두운 공간으로.

내가 사는 곳은 경기도 화성시.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진행하는 유튜브 실시간 중계를 켜놓고 아이들과 함께 목이 빠져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내린 뒤 구름 걷힌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서울에서 화성으로 이주 와 가장 많은 별들을 본다. 아이들과 함께. 오리온 자리 쪽으로 유성이 많이 떨어진다 하여 그쪽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때 쉬잉~유성이 떨어졌다. 우와~~~~ 나만 보았다. 아쉬워하는 아이들. 10분쯤 기다렸을까?
아주 밝은 유성이 대각선으로 길게 땅으로 떨어진다.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이번에는 셋 모두 보았다. 아들이 말한다. ˝엄마, 심장이 터질 것 같아.˝ ㅋㅋㅋ 심장이 터질 것을 우려했던가. 이후론 하늘이 이만큼 밝은 유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딸이 두 개, 아들이 한 개를 더 본 후 너무너무 추워(드디어 영하로 떨어져 발이 동태가 될 지경인지라) 열한 시쯤 집으로 퇴각했다.

나는 아쉬웠다. 하여 식구들 모두 잠든 2020년 12월 14일. 밤 12시 10분. 옷을 아까보다 더 껴입고 밖으로 나섰다. 오리온 자리가 이동했다. 방송에선 북두칠성이 보인다고 하는데, 내가 있는 곳에선 북두칠성을 찾을 수가 없다. 다른 별자리들은 몰라서 봐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하여 나는 오로지 오리온 자리에만 의지한 채 하늘이 가장 넓게 보이면서 가장 어두울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10여 분의 탐색 끝에 드디어 찾았다. 아파트 뒷산, 가로등이 많이 비치지 않는 생태교. 이 자리에서 40분을 서 있는 동안 네 개의 유성을 보았다. 일곱 개를
채우고 싶었으나 춥기도 춥고, 무엇보다 내내 목을 쳐들고 있느라 목을 가누기 힘들어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알았는데, 유성우를 볼 땐 누워서 보란다)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아쉬움이 발목을 잡아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는 거야 하는 심정으로 우리 동 건물 뒤쪽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유성이 휙 지나갔다. 일곱 개!!! 심봤다!!!

유성 일곱 개를 보았다고 내 인생에 무슨 개벽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유성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즐거웠다. 2020년 11월 2일부터 읽기 시작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덕분에(오늘로 43일째) 나는 이제 유성우의 실체를 안다.

˝유성우는 하늘이 선사하는 자연의 불꽃놀이인 셈이다 . . . 유성 하나하나는 겨자씨보다 작은 미세한 고체 알갱이다. 흐르는 별이 아니라 나풀나풀 떨어지는 먼지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이렇게 작은 고체 알갱이는 지구 대기에 들어오자마자 대기와의 마찰로 인하여 고온으로 가열돼 빛을 방출하지만, 지상에서 약 100킬로미터 상공에 이르기 전에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172)

˝유성들은 혜성이 남기고 간 부스러기들이다. 태양 근처를 통과하는 일이 반복되면 혜성은 태양의 중력과 열의 영향으로 여러 덩어리로 쪼개지고 중발하여 점차 분해된다. 이렇게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이 그 혜성의 원래 궤도에 흩어진다. 따라서 혜성과 지구의 궤도가 서로 만나게 되는 지점에 유성의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이 무리와 지구가 만날 때 유성우 현상이일어난다.˝ (172)

어제와 오늘, 육안으로 간간히 유성을 보면서 ˝부스러기˝ ˝먼지˝ 주제에 왜 저렇게 예쁜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모스>>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력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얻어 걸리면 보는 거지, 애써 찾아 보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나의 예상(어려울 것이다, 재미없을 것이다)과 다르게 의외로 술술 읽히고 뜻밖에도 엄청엄청 재미있다. 과학은 역사와 맥을 같이하며, 상상과 논리가 결합된 추론 동화처럼 읽힐 수 있다는 걸 반백 년 넘어 알게 되었다. 이제라도 알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삶이 하마터면 무재미로 빠질 뻔했는데, 내 인생에 과학이 들어와 또 하나의 재미가 곁들여지게 되었다.

나를 이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이었다. 그녀는 과학이 시라고 말했다. 자신이 이 말을 하기 전 과학을 시로 아름답게 풀어낸 앞서 나간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요하네스 케플러이다.

​​˝​아들에게 천문학의 매력을 일깨워준 이가 바로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였기 때문이다. 여섯 살의 케플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 근처 언덕에 올라 1577년의 대혜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입을 딱 벌리고 지켜보았다.˝(진리의 발견 30)

2020년 12월 13일. 일요일밤 10시. 나는 중딩 딸, 초딩 아들과 혜성 대신 유성을 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수학에 젬병들이라 천문학자가 될 싹수들은 없다. 그러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 느낌을, 엄마의 호들갑 떠는 비명 소리를 몸에 간직하고는 살 것 같다. 2020년 11월 19일 밤. 딸과 잠자리에 누워 그 날 읽은 <<코스모스>>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딸아, 네 영어 이름 이니셜이 뜻하는 바는 농협(NH) 외에 또하나가 있다. 뭔 줄 아니? 바로 암모니아야. 암모니아 분자식이 NH3래.˝ 딸은 대경실색 ㅋㅋㅋ . ˝딸아, 매년 6월 30일을 전후로 황소자리 베타별 방향에서 유성우를 볼 수 있댄다. 엄마 별자리가 황소자리다. 엄마 죽거든 6월 30일에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거라.˝ 딸은 시큰둥하게 ˝응˝하고 대답함. ㅋㅎ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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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15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똥별 봐서 좋으셨겠네요 저는 한번도 못 봤어요 언젠가 볼 수 있다는 말 듣고 밖에 나가봤지만, 눈 오는 날이어서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별도 잘 안 보여요 예전에는 겨울 새벽에 밖에 나가면 별이 보이기도 했는데, 인공불빛이 아주 많아져서 그런 거겠지요 별이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달은 잘 보여요 집 앞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달은 언제나 잘 보이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0-12-18 21:52   좋아요 0 | URL
저도 반백년만에 첨 봤어요^^ 희선님은 저보다 일찍 보실 수 있어요. 매년 6월, 12월에 유성우 떨어진대요. 앞으론 다른 곳에서 같이 봐요~~~~^^

라로 2020-12-18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단하세요, 7개나 보셨다니!!! 제 딸아이의 킨더가든때 장래희망이 우주인의사가 되는 거였는데 지금 열심히 꿈을 향해 가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우주에 관심 많은 사람들 만나면 더 반가와요!!^^ 그런데 올려주신 사진은 잘 안 보여요!!ㅠㅠ 그리고 책 님이 <코스모스> 읽으라고 자꾸 부추기시네,,,ㅎㅎㅎㅎㅎㅎ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0-12-18 21:55   좋아요 0 | URL
어머 따님이 우주인의사를 향해 가고 있다고요. 넘넘 멋지네요. 이런 꿈을 어릴 적부터 꾸었다니, 떡잎이 달랐나 봅니다. #코스모스 는, 짱짱 추천. 라로님도 분명 걍 반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