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7 매일 시읽기 80일 

역류성 식도염  
- 이규리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역류하였을까 

누추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으려는 몸 
물이 물 아닌 시름 

내 슬픔의 경로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인데 

살아 자주 역류했다 
당신이 
관념이 
아름다움이 

세상모르고 거기 있을 때 
서러운 풍경은 모이거나 흩어졌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과 문 사이에서 앞날을 흔들어 보기도 했으나 

거꾸로 서서 내일을 본 적 있니 
웃어본 적 있니 
물구나무 서서 보는 일은 좀 괜찮았는데 

무언가 잘 안 되어 생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면 
모쪼록 
이것도 역설의 방식이라 하면 안 될까 

나도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이규리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로 돌아왔다. 모국어가 주는 편안함은 말 그대로 엄마 품 같은 푸근한 편안함이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이규리 시인은 2019년 <Bravo My Life>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시인들의 몸에는 정말로 시를 탄생시키는 장치가 들어 있는 듯하다. 이규리 시인은 그것을 시인답게 ˝시를 품은 인식˝이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역류성 식도염>은 제목에 낚여 먼저 읽게 된 시다. 역류성 식도염 만성 질환자라 시인이 이 병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했건만, 아뿔싸, 내가 시인의 존재를 띄엄띄엄 보았구나.

이 시는 내장의 역류만이 아닌 모든 것의 역류를 이야기한다. 사랑도, 사람도, 생각도, 감정도, 인생도 ˝살아˝ 역류한다. ˝누추한 일,˝ ˝슬픔,˝ ˝서러운 풍경˝ 떠나간 사랑따위 그저 사라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어쩌겠는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생의 속성인 것을. 하여 시인은 말한다. 내가 원했던 삶이 내가 원했던 길로 흐르지 않는다면 ˝모쪼록 / 역설의 방식이라˝ 가벼이 넘기라고. 나를 주인으로 가진 나라는 사람 역시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세상이야 오죽 그렇겠느냐고.

이런 이치는 세상을 제법 산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다. 시는 곧 철학이다.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마지막 두 행에서 시인의 달관한 자세가 읽힌다. 오래 묵은 것들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것을 지우려 매달리는 순간부터 번뇌가 시작될 수 있다. 번뇌에 사로잡히면 눈도 귀도 멀고 만다. 그러니 얼룩이 지면 진 대로, 딱지가 붙었으면 붙은 대로 받아들이고 살 줄도 알아야지. 아암, 그래야지.

그러나 . . . . . . 왼쪽 눈밑에 진하게 생긴 검버섯은 지 우 고 싶 다 . . .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