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6 매일 시읽기 59일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시인의 ‘개 같은 가을이‘를 읽은 후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무에 이리 무거운가, 무에 이리 쓸쓸한가, 무에 이리 처절한가 하는 마음에 <<이 시대의 사랑>>을 구매했다. 알라딘 판매자 중고가는 2,100원. 배(책)보다 배꼽(택배)이 컸다. 이 시집이 출간된 해는
1981년, 이 중고 시집의 첫 구매 시기는 1999년이다. 어떤 동생이 친한 언니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던가 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적힌 축하 문구에 잠시 당황했다. 짧지만 마음을 담아 쓴 글이 있는 책도 중고로 내놓는구나, 강적인걸, 싶어서.

첫 구매자는 이 시집을 아주 좋아했던 모양이다. ˝너무 힘들거나 외로울 때 한 페이지씩 읽으면 위안이 되는 시예요. . . . . . 즐겁고 편안할 땐 절대(!) 읽지 마세요. 특히 ˝삼십세˝라는 시는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삽십세‘부터 읽었다. ‘개 같은 가을이‘처럼 첫 두 행이 강렬하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은 1952년생이다. 이 시는 1981년, 시인의 나이 서른에 쓰였다. ‘삼십세‘는 30쪽에 실려 있다. 편집의 깜찍함. 

나이는 어느 순간부터 맞이하고 싶지 않은 숫자가 된다. 그 숫자가 시인에겐 30이었던가 보다. 첫 두 행 이후 이어지는 시구들은 아리송하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화자에게 서른 이후는 ˝새로 꿀 꿈이 없는˝ 시간이고, ˝끝없는 광물질˝로 가득한 세계이다. 결코 달갑지 않은 그 세계가 기어코 오고 말았으니, 흰자위 드러내며 ˝부릅뜬˝ 눈 스르르 감고 아쉬운 이십대에 흰 손수건을 흔들며 ˝행복한 항복˝을 해버리자고,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화자는 말하는 듯하다.

마지막 행에서 웃었다. 나이 들어 좋은 점들 중 하나.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다. ˝기쁘다우리˝ ^^ 서른살을 맞는 이들에게 이 시를 추천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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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매일 시읽기 58일 

긍정적인 밤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시인의 저 시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에 실려 있다. 1996년에 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시집 한 권의 가격은 삼천 원. 시인의 말대로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정말 헐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의 구실도
못할까, ˝사람들 가슴˝ 뜨겁게 달구지 못할까 염려한다.

안도현 시인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 중 한 편인 이 시에 대해 안도현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궁핍한 시인이 가장 부자로 산다.˝ 

함민복 시인에게 시는 ˝쌀˝이고 ˝국밥˝이고 ˝소금˝이다. 이리 먹을 게 있으니 부자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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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매일 시읽기 57일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김준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
어제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를 올리기 전 이 시인의 행적을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1980년 5월의 참상을 고발한 시를 처음으로 써서 5.18 민주화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시인이었다는 것. 이 사실은 왜 또 몰랐단 말인가. 김준태 시인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시가 바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이다.

1980년 6월 1일. 광주 전남고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전남매일신문 편집국장 대리로 있던 문순태 소설가로부터 광주의 통곡을 시로 써 달라는 청을 받는다. 시인은 아내와 두 아이를 내보내고 단칸 셋방에서 109행의 시를 일필휘지로 썼다고 한다. 집필 시간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시는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제1면에 실렸다. 이 시가 발표된 후 시인이 겪었을 고초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25일간의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고 교사직을 버려야 했으며 이후 학원 강사와 신문사 기자로 가족을 부양했다. 또한 ‘5월광주동지회‘를 비롯
5.18광주와 관련된 모임과 활동을 이어갔다. ​​

“나는 손만 빌려줬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누가 썼느냐, 내 몸 속에 5월에 죽은 사람들이 들어와 썼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해원(解寃)을 해줘야지. 39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경향신문 20190525)
https://news.v.daum.net/v/20190525180019424​​

대학 신입생 초입에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알게 만든 세 사건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 5.18 광주항쟁 그리고 전태일 분신. 몰라서 부끄러웠고, 모르게 해서 분노했다.

202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가수 안치환은 김준태 시인이 쓴 ‘노래‘라는 시를 빌어 다시 한 번 광주의 넋들을 기렸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 있다.

​“봄이 오면 먼 산의 바람/ 먼 산의 구름, 먼 산의 꽃/ 모두 우리 님이어라/ 모두 우리 가슴이어라/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 먼 벌판의 나무/ 모두 우리 아픔이어라/ 모두 우리 노래이어라.” (김준태 ‘노래‘)

2014년에는 한스미디어에서 김준태 시인의 영역 시집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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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1-2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1980년에서 마흔해가 지난 2020년이군요 시간은 자꾸 가는데 제대로 정리되는 건 없는 것 같네요 마흔해가 지났다 해도 그때를 경험한 사람은 지금도 그때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 해도 잊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희선
 

20201123 매일 시읽기 56일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온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이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리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문학청년 시절 좋아하던 시들 중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를 발견하고는 반가웠다. 내 책꽂이에 이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창작과비평)가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김준태 시인은 1948년생이다. 이 시는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1970년 시인의 나이 스물세 살 때 <시인>지에 발표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세월이 흘러 청년 준태는 중년을 지나 대선배 시인이 되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람은 늙어도 시는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나는˝ 할머니가 참깨 터는 일을 돕는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만 해도 깨들이 우수수 털어지는데, ˝젊은 나는˝ 젊음이 무색하게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주어야 한다. 무릇 일이란 경험치가 쌓일수록 가벼워지나 보다. 참깨 터는 일이 쉽지 않건만 희한하게도 묘한 ˝쾌감˝을 선사하고, ˝기가 막히게 신 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세상일이 참깨 털듯 신명 나면 참 좋겠다 생각하며 ˝정신없이˝ 참깨를 터는 손자에게 할머니가 부드럽게 일침을 놓는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성현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다. 할머니의 저 말씀을 두고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모가지는 열매를 온전하게 담고 있는 그릇인 동시에, 끊어져서는 안 되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은 삶의 근본이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참깨를 터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70)

나는 할머니의 저 말을 ˝가엾어하는 꾸중˝이라 느낀 시인의 정서가 참 좋다. 한낱 참깨를 터는 일에서도 생명에 대한 귀함을 아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손주의 모습이 눈에 선히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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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2 매일 시읽기 55일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들도 들려 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 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안도현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감동적인 시들 중 한 편이다. 도종환과 안도현은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교사가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동료 시인을 넘어 조합원 동지로 연대를 이어나갔다. 이 시는 교사들 집회장에서 종종 낭독되어 교사들 콧등을 시큰거리게 하거나 눈물샘을 자극하곤 한단다. 그럴 만하다.

‘어릴 때 내 꿈은‘이란 시를 읽으면서 나는 선생 자리에 어른, 부모를 넣어 읽었다. 나는 자라서 ˝험한 얼굴로 소리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어른이 될 거야 라고 결심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도 없다. 어릴 적 꿈들은 누구나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말하는
꿈과 비슷할 것이다. 살아보니 무엇이 되겠다던 거창한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내가 그나마 위안하는 것은 마지막 연의 저 꿈만큼은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부빌 언덕 정도는 되어주고 있는 듯하다. 금전 아닌 마음의 언덕이 말이다.


코로나 19로 아이들이 오랜 시간 온라인 수업만 하다 일주일 한 번에서 세 번 등교(초등4), 일주 등교 이주 온라인에서 이주 등교 일주 온라인(중등1)으로 학교를 다닌다. 초딩도 중딩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귀찮긴 하지만 온라인 수업보단 등교 수업이 좋다고 한다. 초딩 아들은 급식 밥맛이 꿀맛이라며 학교 가는 것이 엄마 잔소리 듣는 것보다(윽!!!) 훨씬 낫댄다.

사람이 저마다 다르듯 샘들도 천차만별이다. 일가친척이 없던 내겐 선생님들의 존재가 끼친 영향이 아주 컸다. 인격적으로 문제 있는 선생들도 더러 있지만 나는 도종환 시인이 꿈꾸는 선생님 되고 싶어 하는 교사가 훨씬 많을 거라고 믿는 학부모다. 아이들에게는 부모 외 다른 어른들을 접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학습과 놀이와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귀한 사회적 공간이다. ˝징검다리, 지팡이, 옷자락, 봄흙˝ 같은 선생도, 어른도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우선 나부터.

2012년 국회의원이 된 이후 도종환 시인은 근조 리본이 달린 화분을 받게 되었단다. 시인은 이를 ‘시인 도종환은 죽었고 새로운 도종환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성껏 키웠다고 하는데, 그 화분이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일화에서 내가 눈여겨본 점은 시인 도종환은 죽어버렸다고 실망한 애독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도종환이 받아들인 열린 태도였다. 정치인이 되면 얼굴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내가 본 정치인
도종환은 여전히 저 꿈처럼 살고자 애쓰는 시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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