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4 매일 시읽기 77일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2020년 12월 13일. 첫눈 내린 날. 이 책이 도착했다. 재밌기도 하지. syo님이 페이퍼에 소개한 글을 보고 알게 된 시인이자 시집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를 알 수도 없고 모두 알 필요도 없지만, 신인도 아닌 시인을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허탈했고 좀 민망했다.
이내 사람진다는 점에서 눈과 마음은 닮았다. 이내 사라져서 눈과 마음은 부질없다. 그런 ˝부질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많이도 이야기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부질없는 것은 진정 부질없는 것일까? 시는 역설적이게도 부질없음의 쓸모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부질없는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가려주기도 하고 떠올리면 괴로울 수 있는 일을 흘려보내게도 해주었다.
부질없음에 기대어 살았던 나날이 길었다.˝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의 빛깔은 ˝희고 또 희다.˝ 하얗게 바랜 마음. 그 마음을 ˝뭉쳐˝ ˝방안에˝ 두었다. 내 마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으려면 ˝공중˝이 아닌 ˝허공˝이 필요했기에. 마음이란 것은 눈처럼 ˝풀풀˝ 날린다. 안착하지 못하고 흩날리다 끝내는 녹아 버린다. 그렇기에 마음은 늘 첫눈 같다. 마음아, 또 시작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