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3 #시라는별 57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 김선우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얼룩이 남는다
강아지 고양이 무당벌레 햇빛 몇점
모든 존재는 있던 자리에 얼룩을 남긴다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몇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얼룩들은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서로를 안기 위해
안고 멀리가면서 생을 완주할 힘을 얻기 위해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따스함과 고마움이 몸속으로 번지는 시간이다. ˝인간이 만든 참혹함˝으로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더럽혀진 세상도 구석구석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모습으로든 아름다움이 존재함을 시인은 언어로써 증명해 보인다. 김선우 시인에게 ˝시집은 울어주는 집˝이다. 그는 소리 나게 혹은 소리 없이 우는, 가진 것 모자란 이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못다한 울음을 시로써 마저 흐르도록 돕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아름다운 까닭이고, 내가 그의 시를 유독 좋아하는 까닭이다.
들고난 자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남긴다. 시인은 그것을 ˝얼룩˝이라 표현했다. ‘얼룩‘의 표준국어대사전 의미는 <본바탕에 다른 빛깔의 점이나 줄 따위가 뚜렷하게 섞인 자국>이거나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들어서 더러워진 자국>이다. ‘얼룩‘을 말할 때 우리 대다수는 더러움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김선우 시인이 주목한 것은 너와 나의 얼룩이 겹쳐지는 것, 즉 ‘스며드는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너와 내가 남긴 얼룩이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하고, 서로의 얼룩을 ˝아껴주˝고, 서로의 얼룩을 안아 일으켜 줄 때 서로에게
˝생을 완주할 힘˝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멋진 비유다.
주말에 이런 얼룩들을 접했다. 한 달 보름 전 친지 중 한 분이 불의의 화상을 입었다. 이식 수술과 치료로 다행히 한 달 만에 퇴원은 했지만 이분의 삶은 이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화상은 후속 치료가 평생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나도 이번에야 알았다. 그럼에도 원체 밝고 강하고 긍정적인 분이라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에게 예의 웃음과 유머를 잊지 않고 보여주셨다. 이 집의 식탁 위에 전에 없던 작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주먹 쥔 손들과 응원의 글귀들이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분의 사고 소식을 들은 초등학교 동창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친구에게 힘내라는 뜻으로 주먹 불끈 쥔 손들을 찍어 편집을 한 것이었다. 동창들은 이 액자와 함께 금일봉까지 전달해 주었단다. 명절 때면 음식 준비는 돕지 않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 남편을 쌍심지선 눈으로 보았던 아내가 이 두 가지 선물에 크게 감동하여 앞으로는 동창들이 부르거든 눈치 보지 말고 냅다 달려 나가라고 했다며 우스개 소리까지 해주셨다.
그 친구들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 몇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어느 사이 ˝서로의 얼룩이 애틋한˝ 우리가 되었다. 그 액자는 삶이 더욱 무거워질 친구에게 ˝생을 완주할 힘˝이 되어 주겠노라는 마음 목발이었다. 그들의 우정으로 꽃을 피운 얼룩이 내 맘속으로도 스며들어 뭉클함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