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9 시라는별 49
플리니우스의 유언
- 프리모 레비
벗들이여
저 불안과 공포에 떠는 폼페이 시민들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잡지 말고 떠나도록 내버려두게.
난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폼페이 전체를 뒤덮은
저 구름 같은 검은 재의 신비한 원인을 찾기 위해
단지 좀 더 가까운 건너편 해변으로 갈 뿐이라네.
어린 조카여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여기 남아서 책을 읽어라.
어제 내가 준 문장들도 다시 곰곰이 음미하여라.
넌 저 숨 막히게 쌓여가는 잿더미까지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라.
우리 인간은 이미 걸어다니는 한줌 재가 아니더냐.
그리고
신들은 인간과 세상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
너무 신을 믿지 말라고 한 인간평등주의 철학자인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를 항상 기억하여라.
자, 모두 서둘러 어서 배를 준비하여라.
아직도 캄캄한 밤이지 않느냐.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낮 속의 밤이니라.
내 유일한 가족인 누이여
난 뜨거운 진실의 불씨를 지펴야하는 대 로마의
문인이며 역사학자이자 또한 과학자가 아니더냐.
그러니 나를 위해 너무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말거라.
내가 살아온 수많은 세월이 헛되지 않았듯
저 장엄하고도 비장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또한 후세를 위해서라도 난 마땅히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나
만약 저 유황가스에 질식해 돌아오지 못한다면
넌 내 족적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책을 남겨다오.
자ㅡ 이제 선원들은 일제히 내 말을 따르라!
어서 돛을 올리고 저 거친 바다로 배를 저어가자!
프리모 레비의 『살아남은 자의 아픔』에 실린 시들에 편역자 이산하 시인이 단 주석은 정말이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글이다. 독자인 내게 무슨 말을 더 보태고 싶지 않게 만든다. 정보와 상상과 해석을 적절히 배합해 독자의 입맛을 한층 끌어올려 놓는다. 씹을수록 달되, 뒷맛은 언제나 쓰다. 삶의 씁쓰레함 탓일 게다.
* 라틴어사전에 ‘화산‘이란 단어가 없을 만큼 네로황제 당시의 로마는 화산에 대해 무지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시민들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화산폭발의 원인을 찾아 위험한 불길 속으로 온몸을 던졌던 플리니우스(AD23~79)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와 함께 갔던 일행들은 모두 도망쳤고, 그 혼자만 화염과 유황가스에 질식해 숨진 것이다.
이 시는 그래서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서나 진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밝히려다가 이처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많겠는가. 모두 뒤로 가거나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 홀로 앞으로 가는 자, 그를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위선이나 참회의 비유로 쓰는 ‘악어의 눈물‘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델로‘가 아니라 고대세계의 과학백과사전이라 불리는 플리니우스의 방대한 저서 『박물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가 사람을 집어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나일강의 악어를 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신경 마비후유증의 하나로 ‘악어눈물 증후군‘이란 의학용어도 있듯 악어는 턱뼈신경과 눈물샘 신경이 거의 같은데다 잉여염분 배출의 필요성 때문에 큰 먹이를 삼킬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말하자면 악어의 눈물은 짠 소금물일 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플리니우스가 다른 동물들을 마다하고 굳이 악어에 비유한 것은 수면 아래에 매복하다가 전광석화같이 공격해 집어삼킨 다음 눈물 같은 노폐물을 배설하는, 그런 잔인한 악어의 습성을 닮은 비열하고 위선적인 정치모리배들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궁금하여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검색해 보았다. 『박물지』는 총 37권으로 되어 있고 1077년에 완성되었다. 로마시대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책에는 천문학, 수학, 지리학, 민족학, 인류학, 생리학, 동물학, 식물학, 농업, 원예학, 약학, 광물학, 조각작품, 예술 및 보석 등과 관련된 약 2만 개의 항목이 상세하게 수록돼 있다고 한다. 플리니우스는 단순히 문헌 참조에 그치지 않고 로마 총독을 지내는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관찰한 자연과 풍속에 근거하여 각 항목을 상세하게 기술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책상머리 학자가 아닌 발로 뛰는 학자였던 것이다.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이 중요한 문헌이 지난 7월 드디어 한국어 편역본이 출간되었다. 지르고 싶었으나 책값이 비싸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다. 완전 기대된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돌아오겠다던 플리니우스는 방대한 저술로 그 약속을 지켰다.
야마자키 마리와 토리 미키 두 일본 만화가의 합작으로 완성한 역사 전기 만화 『플리니우스』가 있다. 5년 전 출간되었는데 벌써 절판이다. 지역 도서관에도 없다. 너무 아쉽다. 꺼이~~~~
여름숲은 박물의 보고(寶庫). 동안에 찍은 여름산. 오늘 만난 대벌레 사진 방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