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의류학전공학생입니다. 현재는 전공을 살려 취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손재주가 있고, 그림좀 잘그린다고 믿고 까불고 들어갔다.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는걸 일찌감치 인정하고 다른 길을 물색중입니다.

하지만 서당개 삼년이면 박사학위도 딴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업을 등지고 다른과에 기웃거린지 어언 2년이 되가지만 전공학점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패션의 한글정도는 땠고, 수많은 과제와 포트폴리오로 인해 우리들끼리 말하는....잘만들줄은 몰라도 잘볼주는 아는.....학생입니다.

물론 감히 잘본다고 말하기엔 형편없는 실력인건 아나, 매일보는게 옷이고, 매일연구하는게 옷이다 보니....그만큼 옷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해왔습니다.

앙드레김. 과연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얘기를 나눈건 아니지만, 과특성상 가까이에 여러번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앙드레김' 선생님의 선호도가 다른 의류학도들에겐 모르겠지만..우리학교의류학도들에겐 존경할만한 분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스타일의 취향이 앙드레김 선생님과 심하게 틀려도. 패션디자이너로써는, 한국의패션디자이너로써는 대부분이 존경합니다.


몇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모습. 같은 옷으로 옷장이 채워졌고, 항상 같은 화장(?)을 하는 모습. 심지어 샵에서 일하는 직원들까지 죄다 앙드레 김 특유의 복장으로 똑같이 입혀 놓는게, 거의 강박증 처럼 보일때도 있습니다. 처음에 가까이에서 보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지금은.....ㅡ,.ㅡ;;

그의 패션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비슷한 주제로 항상 매번 봐왔던 것 같은 스타일을 계속해서 선보이죠.


그런데. 님이 원하시는 파격적인 패션감과, 천재적인 발상은. 모든 패션디자이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파격적이고, 천재적인 발상으로 오뜨꾸띄르에서 손꼽히는 사람은 크리스찬디올의 존갈리아노. 비비안웨스트우드의 비비안웨스트우드 입니다. (물론 다른 여러디자이너 있긴하지만 국내에 잘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이들은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이들조차 파격적이라는 이들조차. 가끔은 그 파격적인것이 매번 반복되어. 파격적이지만, 이미 파격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파격적이다 하더라도. 매 시즌마다 컬렉션지를 사서 보면. 아! 이거 누구꺼겠네~ 하면 딱 그 디자이너 것입니다. 과제를 해도 애들이 굳이 아래다 디자이너이름을 삽입안하는데...그건 3,4학년쯤되면, 아무리 모델을 바꾸고 지지고 볶고 해도. 그냥 누구껀지 알게 됩니다.

허나, 그것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고갈과는 조금 다릅니다.

패션디자이너는 평생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 고갈이나, 독창성의 부재, 감각의 후퇴와는 조금 다릅니다. 앙드레김의 독특한 색감과, 라인 등. '앙드레김' 하면 떠오르는 것들. 그건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입니다.


'누구누구'하면 그의 의상이 딱떠오르도록 만든다는게 얼마나 힘든건줄 아십니까? '샤넬'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고, '구찌'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듯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그런 자신의 특징 하나를 떠올리게 하기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엄청난 돈을 들어붓기도 하고, 엄청난 광고를 때리기도 하죠. 그 문양하나와 자신만의 라인을 위해...

매번 쇼를 바꾸는... 라인을 뒤엎는 디자이너들은....저번 무대가 성공을 못해서 입니다..ㅡ.,ㅡ;;그리고 클래식한 이미지로 굳히기에 들어간 성공한 디자이너들은 다른 세컨라인을 만들거나, 큰 이변이 없는한 무리하게 파격적인 무대 선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건 거의 신인에게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앙드레김은 한국 디자이너의 최고의 자리에 있는것입니다.아니..감히 이미 세계와 어깨를 나란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변신을 거듭하는 다른 국외의 유명브랜드를 보겠습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디자이너는 크리스찬 디올이 아닙니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역시 샤넬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패션계과 예술계에 큰획을 긋고 세상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다른 수석디자이너들이 브랜드를 이끌어나가고 있죠. 그러면서 변화했습니다. 본래 디자이너의 이미지는 살려가면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해왔죠. 대부분의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이때 가장큰 변화를 합니다.

샤넬이 뭔가 거창한 디자인을 선보였을 것같지만. 그녀는 평새 앙드레김처럼 자신의 비슷한 디자인을 내보입니다. 그런데도 패션계뿐아니라 미술계에서 조차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뽈뿌와레, 지방시, 겐조, 입생로랑, 크리스챤디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별세하거나 은퇴한 많은 디자이너은 과거 여러 디자인을 냈지만 그중에서 유독 자신이 끝까지 고집하는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수 있는 사람이 샤넬입니다.



만약 앙드레김 선생님이 브랜드를 손을 놓으시면 누군가 수석디자이너로 들어올수 있습니다. 그때는 앙드레김의 디자인이 기존과는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많이 다르지만 비슷한. 그런 스타일로 다시 태어날수 있습니다.


오히려 파격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그런 디자인을 찾는다면, 그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면 일반 대학생, 혹은 신인 디자이너들의 옷이 훨씬 님의 생각에 들어 맞을 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말하는 일본....이세이미야케, 겐조...정말 유명한 디자이너들이죠...이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니뽕삘이라는 일본 젊은 애들이 입는 스타일을 들고 오뜨꾸띄르에 있을까요? 그사람들...정말 일본적인것을 들고 나갔습니다. 전통 일본 복장과, 전통문양과, 색상.....딱봐선 일본문화를 많이 아는 우리가 보기엔 그냥 전통 일본적일 것들....


님이 얼마나 일본패션에 대해 잘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니뽄삘도 일본가면 누구나 그렇게 입고 다녀서 별로 개성있지도 않아 보입니다.





지금은 앙드래 김 선생님의 옷을 공식석상에서 볼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지금은 심은하가 베라왕의 옷을 입고 결혼식을 하나, 예전엔 수많은 연예인들이 그의 옷을 입고 결혼식을 했고,, 특히 남성의 경운 교복처럼-_-; 그의 옷을 입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지금도 조수미씨는 앙드레김 선생님의 옷을 입고 공연을 하곤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러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나와 세계로 진출하는 만큼 앙드레김 선생님의 입지가 조금 좁아진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줄어드는 입지의 크기보다 배의 속도로해외에서의 입지가 커지고 있습니다^^

저번에 이영애씨가 이영희 씨의 한복을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습니다. 외국디자이너로 물들어가는 드레스속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우리나라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고 외국으로 나갈만큼 인식도 좋아지고 그만큼 디자이너들의 감각도 높아졌습니다. 예전의 열악한 공급 환경에서 앙드레김 선생님의 디자인이 독점을 한만큼 이제 서서히 줄어드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 신인디자이너들사이에서, 외국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국내 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사들, 외국의 부유층들이 그를 찾는것은.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차별적인 마케팅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고. 그것은 다른 디자이너의 캣워크에서는 볼수 없는 국내 연예인과 모델들의 드라마 같은 연출입니다.

왠만큼 국내에서 인지도좀 얻고 외국에서 호평좀 받으면 외국으로 튀어가는 디자이너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외국모델로 싹바꾸고 무대를 올리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다시 한국으로 컴백. 이러 경우가 한둘인줄 아십니까? 하지만 앙드레김 선생님. 꾸준히 국내모델과연예인을 기용하고, 꾸준히 국내무대를 가집니다.

연예인들이 앙드레김무대에 한번서기 위해 줄을 섭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앙드레김쪽에서 어느 신인배우한테 무대서기를 권하러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우쪽에서 모델료가 얼마냐고 물어오자 그냥 전화를 끝었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배우들이 돈을 안받아도 좋으니 그 무대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실화인진 모르겠음)



앙드레 김선생님이 국내에서 놀아주니깐 별거아니라고 생각하시는데...그분 왠만한 디자이너 치고 참 애국자 입니다. 지금은 가끔 수입원단도 쓰시는데...국내원단만 굳이 고집하시고, 외국연예인이나 모델로 충분히 떡칠할수 있는 재력인데도 불구 국내 연예인들을 써줍니다. 프랑스에서 훈장받고, 센프란시스코에서 앙드레김의 날을 만들고 해도 외국에서 패션쇼하면 왠만하면 국내 연예인들 데리고 가서 써줍니다.그런 외국 무대에서 요즘 잘나가는 해외모델들 기용하면 단방에 뜨는데도 말이죠.... 외교관부인들.........마지막에 나갈때, 앙드레김 선생님 옷사서 나갑니다. 외국의 부유층들도 국내에 오면 앙드레김 선생님 옷 맞춰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예전에 한창 청문회 열고 할때, 외국에서 자기네 나라로 오라고 권유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해외인지도도 엄청납니다. 아직 국내에서 앙드레 김 선생님 만큼 해외인지도를 쌓으신분도 없습니다.


아....말이 길어졌는데.....어쨌든 그분의 디자인이 요즘와서 어떤취급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확실히 한국패션계의 최고의 인물이고. 한국의 자부심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전에 제로마켓에서 버버리 PK티셔츠를 하나 구입했다.

39,800원에 착불 2,500원이라는 믿기지 않는 가격이라 속는 셈 치고 한번 구입을 했다.

물건은 금방 받았다.. 넥택도 그렇고, 단추 뒷편에 버버리라고 쓰여있고, 옷을 접을 때 끼워넣은 종이도 버버리 문양이 확실하고....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아래 사진을 봐주세요.



뭔가 이상한 점이 없으세요.. 그렇다면 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 ㅎㅎ.. 틀린 그림 찾기



위에 이미지랑 뭔가 다르죠..

제로마켓에서 산 제품에 붙어있던 택이 위에 겁니다. 아래껀 홍콩의 정상 매장에서 구입한 제품에 붙어있던 택이구요.

나라마다 택이 다른걸까요.

차이점을 집어보죠..

1. 먼저 말 위에 탄 기사의 로고를 보시면 위에꺼에는 창을 든 기사의 방패에 B라고 쓰여있습니다. 또한 들고 있는 깃발 안에 PRORSUM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구요. 거기다 말에도 철갑 같은것이 띄워져있구요.

2년 전에 산거라 그새 버버리의 로고가 바뀐걸까요.. ^^*

2. 버버리 같은 명품 업체의 라벨에서 맨 위쪽의 burberry 라는 글자가 한쪽으로 몰려있습니다. 여기선 스캔을 연하게 받아서 나오지 않았네요. 홍콩껀 정 가운데 표시가 되어있죠.

3. 맨 아래 burberry, burberrys, the ~ 로 쓰여진 글자의 서체가 서로 다릅니다.

쩝.. 이런 상황이다 보니 좀 씁쓰름하네요.

자.. 제로마켓의 버버리 pk티는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흠..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5-10-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퉁이 판을 친다니 옥션이나 그런 곳에서는 사지 마세요... 짝퉁같아요...

panda78 2005-10-1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로마켓에서 사신 건 메이드 인 어디야요? 그게 산지따라 다르더라구요. 아무래도 잉글랜드가 확실하긴 한데.. 저 예전에 7만원 안 되게 주고 산 남자 버버리 긴팔 남방은 매장에서도 진짜라고 하던 걸요.
판매자에게 수입할 때 받는 면장? 뭐 그런 거 보내달라고 해 보셔요. 매장에 들고 가 보시거나..(선물받았는데 진짜인지 궁금하다고.. ^^; )
서체나 로고는 워낙 버버리가 자주 바꾸니 그것만으로 확인하긴 힘들 듯.

panda78 2005-10-1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저렴 버전 사실 때는, 진짜같은 가짜려니.. 여기시고 사셔야 나중에 가짜라 밝혀져도 후회가 없다는... ;;

아르미안 2005-10-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둘다 메이드인 잉글랜드입니다.

아르미안 2005-10-17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만원 언저리에서 사셨다면.. 세일가 기준으로는 적정 가격 주신거라고 봐야겠죠
물론 홍콩 제품의 경우는 좀더 싸기도 하지만요.
아무래도 이번껀 짝퉁의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로고 자체가 너무 다르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는건.. 단추 같은건 제대로거든요..
특히 옷 접을 때 넣는 기름종이에도 버버리 로고가 정상적인게 들어가 있구요..
깃발 안에 PRORSUM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거랑 방패에 B자가 아무래도 짝퉁 냄새를 강하게 풍기네요.. ㅋㅋ..
누구 전문가 있으시면 좀 알여주세요... ^^*

panda78 2005-10-1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버리 프로섬라인도 있잖아요. ^^;
음.. 역시 짝퉁의 세계는 깊고 넓어요. ㅎㅎ

아르미안 2005-10-1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요.. 특히 버버리는 워낙 짝퉁이 많아서리...
결정적인건 아마 택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못한 버버리 글자가 아닐까요.. 설마 버버리같은 나름대로의 럭셔리 브랜드에서 택에 자기 상표를 인쇄할 때 한쪽으로 쏠린걸 쓸꺼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
 
 전출처 : 물만두 > 비참하게 살았던 천재 여성들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 덧붙이고 싶은 인물... 허난설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물만두 > 비참하게 살았던 천재 여성들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 덧붙이고 싶은 인물... 허난설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물만두 > 비참하게 살았던 천재 여성들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판위량 (潘玉良, 1895-1977)
중국 최초의 서양화가. 8살 때 부모를 잃고 아편 중독자인 외삼촌에 의해 6년 동안 키워짐. 14살에 외삼촌에 의해 기생집에 팔려감. 이곳에서 첫 손님이었던 세관 고위 공무원 판찬화(潘贊化)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판찬화는 위량을 첩으로 맞아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일깨워 줌. 이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위량은 누드화에 심취, 공중 목욕탕을 전전하며, 혹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누드화를 그린다. 그녀의 누드화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한 상징이었으나, 기생 출신에 누드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조롱과 지탄을 받는다.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편의 후원으로 파리로 유학,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학계와 예술계에서 촉망받는 여류화가 겸 교수가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기 출신이라는 과거가 들춰지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의 출신성분이 남편의 신변까지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류 시인. 영국의 유명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로, 오븐에 머리를 넣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살로 유명한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했던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음. 플레이스는 이후 남성위주의 배타적 창작 환경에 의해 희생된 천재 시인으로 기록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류화가. 천재적인 그림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한 여성. 7살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됨. 14살에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천 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겨우 30여 명이었음.) 18살에 버스를 타고 가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 버스 손잡이를 지탱하는 쇠파이프가 가슴에서부터 골반, 허벅지를 관통하는 끔찍한 치명상을 당함. 모르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잊기 위해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28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천재 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끊임없이 디에고의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거듭 유산함. 디에고는 아내의 불행에도 줄기차게 바람을 피웠고, 급기야 프리다와 절친한 친누이와 애정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미칠 듯한 절망 속에 프리다는 그림에 빠져듦.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였고,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사고의 후유증으로 수 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고 급기야 회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상상키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받음. 이런 중에도 반미 공산주의 시위 및 반전 운동에 참여. 1954년 사망.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여성 조각가. 마치 조각을 위해 태어난 듯,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열정을 보였다.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 예술적 경쟁자,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함. 그러나 로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까미유는 평생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소피 제르맹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에이다 백작부인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2)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나혜석 (1896-1948)
일제시대 개화기를 살았던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 부유한 명문가의 자손이자 친일파의 아내로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파리 유학 시절 최린과의 간통 혐의, 남편의 배신 등으로 급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함. 그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이어 언론에 여성 차별과 권리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을 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음.

 

* 덧붙이고 싶은 인물... 허난설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