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오래 보관할 때는 감자 속에 사과 한개를 넣어보자.

감자를 오래 보관하면 딱딱해지고, 싹이 나는게 가장 문제인데, 이렇게 사과 한개를 같이 넣으면 사과에서 나오는 에틸렌가스가 감자의 발육을 억제해서 감자의 싹이 나는 것을 막아준다.

당연히 푸르댕댕해지는 것도 지연지연시켜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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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은 시원하게 먹으면 더 맛있지만 바나나는 냉장 보관할 경우 색이 검게 변하므로 실온 보관이 좋다.

파인애플도 마찬가지. 열대과일은 냉장 보관하면 쉽게 변색되고 잘 썩는다.

실온 보관 후 먹을 만큼 적당히 익으면 먹기 직전 냉장고에 넣는다.

파인애플은 아래쪽 당도가 2~3도 높기 때문에 파인애플을 보관할 때 거꾸로 세워 놓으면 전체적으로 단맛이 고르게 된다.

복숭아도 미리 냉장고에 넣어두면 단맛이 떨어지므로 실온에서 보관했다가 먹기 전에 냉장 보관한다.

여름에는 과일을 얼려 먹는 것도 별미다.

복숭아나 포도 등을 얼리면 싸베트처럼 돼 아이들 간식으로도 인기 만점이다.

수박이나 딸기 등도 냉동 보관했다가 사이다와 함께 갈아서 쉐이크로 만들어먹으면 맛있다.

음식이 상하기 쉬운 여름이다. 그만큼 남는 과일을 버리는 일도 많아지고, 남는 과일을 냉장 보관했다가 먹는 것도 나름의 생활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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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내용적으로는 별로 였지만 막판 동점골로 모두 용서하기로 했따.

밤 꼬박 세우고 본 보람을 느낀다...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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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6-19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못한듯. 그런데 마지막 프리킥은 아까웠어요. 마지막 기회였는데.

아르미안 2006-06-19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경기 내용면으로만 본다면야.. 열 받아 쓰러지죠. 단지 비겨서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죠 뭐..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네요..하하

물만두 2006-06-1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 새신 보람 있으십니다^^
 

러시아의 일명 알까기 인형이라 불리우는 마트료시카

러시아어로 마트료시카(Matryoshka)는 어머니를 뜻하는 '마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산과 풍요의 기원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한개의 마트료시카 인형 안에는 보통 네개에서 아홉개가 들어있는데, 많은 것은 수십개에 이르는 인형이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1891년 예술가 세르게이 말루틴이 디자인한 뒤 러시아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마트료시카는 사실 일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28피스짜리 마트료시카, 흠 15피스짜리가 450파운드 정도니까.. 이건 대략 1천파운드쯤 아닐까 싶네요. 그럼 우리나라돈으로 헉~







월드컵이라 그런지 이런 제품에도 눈길이 가네요.



아래 내용은 http://www.dollshome.co.kr/FrontStore/iContentsView.phtml?con_id=10 에서 스크랩한 내용이다.

러시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누구나 거리 혹은 상점에서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인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모양의 여러 인형을 배 안에 가득담고 있는 이 인형을 보고 러시아와 친숙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러시아의 고대 민간신앙에 따르면, 속 안에 또 다른 인형을 가지고 있는 이 마트료시카 인형이 일종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보통 이 인형을 부부 침대위에 올려놓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태어날 여자의 일손을 덜어주고, 불임여성에게는 임신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다.

전통적인 마트료시카는 토지의 비옥함과 다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장미빛 홍안과 전통적인 머리수건을 쓰고 사라판을 입고 있는 농부(農婦)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뜨료쉬까'라는 용어의 첫 음절은 마뜨료나(matriona)의 지소형인데, 그 말은 '어머니'(mat')를 의미한다. 즉 mat'에서 matriona로 변화되고, 다시 matrioshka로 변모한 것이다. 이 인형에 색칠된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은 각각 피와 태양빛, 잘 익은 밀과 곡식, 하늘과 물, 꽃들과 화려한 식물들의 색깔을 나타내고 있다.

러시아에서 마뜨료쉬까와 관련된 전설은 아주 많다. 특히 마뜨료쉬까는 고대 우랄 지방의 女神인 주말라(Jumala)와 관련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여신의 몸속에 모든 사물이 들어있다고 믿고 있었다. 바이킹과 상인, 그리고 초기에 러시아 국가를 건설한 지도자들은 마뜨료쉬까를 찾고자 했는데, 그것은 후대의 엘 도라도(El Dorado)와 같이 마뜨료쉬까가 단단한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세기 독일의 지리학자들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이 '황금여인'(Golden Woman)이 그때까지도 모스끄바 근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왕국에 살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549년 독일인 허버쉬타인(Baron von Herberstein)은 신성한 숲속에서 이 황금여인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여인의 몸속에는 또 다른 세 명이 들어있는데,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뜨료쉬까가 고대 러시아의 神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러시아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인형의 나이는 1890년대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 유입되어 기껏해야 100년이 조금 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이전, 민간신앙의 수호신이라는 주장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것이다.

마뜨료쉬까의 선조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확실한 사실은 이 인형이 일본의 한 찻집에서 나왔고, 그 찻집의 주인이 새 인형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 인형은 두 개의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행운의 신이라고 믿고 있던 다루마(Daruma, 한국식 달마)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쉬치푸쿠진(Shichifukujin, 칠복신)이라는 가정의 수호신이었다.

인형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다루마는 일본의 '산타 클로스'라고 할 수 있는데, 다가올 한해의 성공을 위해 신년파티에서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불교 성인이었던 다루마는 수행을 위해 동굴에서 움직이지 않고 9년을 지냈는데, 수행에 방해되는 잠을 쫓기 위해 눈썹을 잘랐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팔과 다리는 썩어갔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인형에 나타난 다루마의 얼굴이 엄한 모습을 띠고있는 이유이다. 다루마가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지만, 러시아에 유입된 이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인형은 이 다루마의 외형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단지 팔과 다리가 없는 모양만을 가져온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누군가가 이 인형을 러시아의 마몬또프(Mamontov) 가문으로 가져왔는데, 당시 마몬또프家는 명성을 떨치던 러시아 산업자본가 집안으로서 러시아 예술의 후원가문으로 유명하였고, 특히 불교 성인의 형상을 가공하는 목공예술의 후원자로서 사회적 지명도가 높았던 가문이었다.

마몬또프가문에 의해 러시아에 수입된 마뜨료쉬까 인형이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첫선을 보인 때는 모스크바 근교의 아브람체보에서 클럽을 만들어 예술인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마몬또프 부인이 고안해서 화가 말류찐과 세르게예프 뽀사드의 장인이 어린이들을 위한 "유아교육용"으로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생산되었을 때이다.

구체적인 생산목적은 당시 러시아제국내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의 민속의상을 입은 인형을 제작하여 어린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였다. 인형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시킨다는 아이디어와 일본에서 가져온 인형의 모습을 결합시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목각인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이 인형이 러시아토양에 여과되면서 원래 일본에서 가늘고 좁은 눈 모양이 넓고 앞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또 홍조띤 얼굴과 금빛머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더욱이 마뜨료쉬까가 제작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박람회에서 러시아가 출품한 마뜨료쉬까 인형이 영예의 금상을 수상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00 년 세계박람회이후 인형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자, 과거에 성상화 중심지로 유명한 모스크바 근교의 세르게예프 뽀사드(예전의 자고르스끄)에 많은 마뜨료쉬까 생산공장이 세워졌다. 노동의 분업에 따라, 여자들은 주로 인형에 옷을 입히고 남자들이 얼굴을 그렸는데, 그 이유는 과거로부터 오로지 남자들만이 성인의 모습을 그렸던 교회의 전통 때문이었다.

마뜨료쉬까에 새겨지는 그림들도 농민출신 어린아이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러시아 민속에서 러시아적 특성을 간직하며 나타나는 어른들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모델로 만든 인형들도 대중들의 인기를 받았는데, 특히 1812년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던 나폴레옹과 그의 참모들이나 당시 러시아군을 지휘했던 꾸뚜조프 장군과 그 참모들이 인형의 모델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1917 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난 후부터는 이데올로기 요소가 인형제작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마뜨료쉬까 인형이 모델이 될 수 없는 경찰, 보제, 구교도인들과 민간신앙에 존재하는 귀신과 같은 존재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인형의 얼굴을 차지할 수 없었고, 단지 홍조띤 얼굴에 큰 눈을 가진 러시아농부(農婦)의 모습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외형상으로 약간의 변화가 있기도 하였는데, 소련 최초로 달 비행선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마뜨료쉬까가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1969년 7월 미국의 아폴로11호를 타고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이후 생산은 중단되었다. 1977년에는 러시아 혁명 60주년 기념으로 당시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공화국의 민속의상을 입은 15개짜리 대형인형이 제작되었는데, 이 당시는 소련을 홍보하기 위해 정부가 외교사절들을 위해 이 인형을 선물로 주는 것이 관례였을 정도라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 마뜨료쉬까 생산이 최고조에 올랐던 시점은 바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열렸던 때였다. 이 때는 무려 1000만 세트가 제작되어 올림픽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올림픽 공식마스코트였던 러시아의 곰 미샤와 이 인형을 주로 선물로 사 가지고 갔다고 한다.

마뜨료쉬까는 생산지가 어디냐에 따라 특징상 약간의 차이가 나는데, 20세기 초 소비에트 시절에 '자고르스끄'라고 도시 명칭을 바꾼 예전의 세르게예프 뽀사드에서 제작된 마뜨료쉬까들은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고 두껍게 색칠하였으며, 주로 오렌지색, 밝은 갈색, 노란색, 붉은 색을 사용하여 따스함과 생동감을 표현하였다. 1920년대에 마뜨료쉬까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옛 고리끼)의 박람회에 출품된 후, 러시아의 각지로 확산되어 생산되었다. 가장 유명한 마뜨료쉬까는 세묘노보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생산된 마뜨료쉬까는 세르게예프 뽀사드에서 생산된 것보다 붉은 색과 푸른색, 노란색을 사용하면서 전반적으로 색깔이 밝게 표현되었다. 또한 세묘노보에서 생산된 마뜨료쉬까는 그 거대함 때문에 명성을 얻기도 하였는데, 이 곳에서는 보통 15개에서 18개정도 들어가는 마뜨료쉬까를 만들며, 더욱이 기네스북에 기록된 1세트 72개짜리 마뜨료쉬까도 이곳 세묘노보에서 만들었다. 이 대형인형은 일본정부에게 선물하기 위해 세묘노보에 특별히 의뢰한 것이었다. 그밖에 소련시기 유명했던 마뜨료쉬까 생산지로서는 뱌뜨까(옛 끼로프)와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이름을 바꾼 고리끼, 칼리닌 등을 들 수 있다.

마뜨료쉬까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둥근 모형을 제작하는데도 끌과 조각용 칼만 가지고 15개의 공정을 거쳐야한다고 알려져 있다. 둥근 모형의 표면은 거칠지 않고 부드러워야하며 색을 칠할 수 있게 매끄러워야 하는데, 이 둥근 모형을 제작하는 기술이 워낙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그 어떤 장인들도 자신들만의 세공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야만 자기가 원하는 크기와 모양을 정확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드는 순서는 작은 것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큰 것을 나중에 만든다.

오늘날 모스끄바의 거리에 나가면, 외국관광객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마뜨료쉬까를 흔히 볼 수 있다. 여러 만화영화의 캐릭터와 디즈니 만화를 주제로 한 것이나, 제정러시아 시대의 짜르를 포함하여 러시아 역대 통치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거나, 혹은 비틀즈와 같은 대중음악가나 미국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과 같이 스포츠 스타들의 모습을 한 마뜨료쉬까를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 한때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모습을 한 인형안에 그의 정부(情婦)인 모니카 르윈스키가 들어간 마뜨료쉬까가 가장 인기있었다고 하며, 9.11테러 이후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을 띤 마뜨료쉬까가 등장하기도 했다.

우스개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는 마뜨료쉬까가 요즘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뜨료쉬까에는 진짜 예술가의 혼이 담겨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마뜨료쉬까의 아래면에는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진 경우가 많으며, 간혹 제작기간까지 명시된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작자가 직접 자신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시장에 나와 마뜨료쉬까를 판매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가격을 흥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고객들은 특정 장인이 만든 마뜨료쉬까를 선호하기도 하는데, 전문 예술품 감정가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든 특별한 마뜨료쉬까를 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경우에 보통 주문생산을 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예전에 어느 미국인은 세르게예프 뽀사드 공장에 만화영화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형상화 한 마뜨료쉬까 세트를 주문하였고, 이 고객의 요청에 따라 수개월에 걸쳐 제작과정이 끝난 일도 있었다.

30 개가 들어가는 전통적인 마뜨료쉬까 인형이 뉴욕 소재 현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마뜨료쉬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혁명전에 제작된 것을 포함하여 6000세트가 넘는 마뜨료쉬까를 수집한 미국인 로버트 브로콥(Robert Brokop)일 것이다.

또 한사람 마뜨료쉬까의 열광적인 숭배자가 바로 프랑스 배우 알랑 드롱이다. 그가 살고 있는 파리의 저택에는 러시아 방문객들이 선물로 주고 간 것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주문생산해서 소지하고 있는 마뜨료쉬까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그밖에 세묘노보 생산공장을 를 즐겨찾는 유명인사로는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를 들 수 있다.

마뜨료쉬까는 분명 일본에 기원을 둔 러시아 인형이 맞지만, 마뜨료쉬까를 만드는 기술은 분명 러시아에서 발전한 러시아 그 자체의 기술이다. 조각 인형에 색을 입혀 제작하는 기술은 러시아이외에도 독일과 프랑스, 일본에도 존재하며, 중국의 장인들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섬세하게 색칠한 대형 인형을 제작한다. 하지만 중국인형이 러시아 마뜨료쉬까만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카콜라, 슈퍼맨, 아스피린, 다마고치 등 20세기에 히트쳤던 상품들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사람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돈도 벌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볼 때, 일본에서 만들어진 나무 인형이 러시아에서 마뜨료쉬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어쩌면 이 인형이 20세기 '도둑맞은 아이디어'의 목록중의 하나일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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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2016-11-16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감이 2016-11-1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요, 지역의 상징물을 조사해오라는 과제가 있어서 이것좀 복사해서 붙여넣어도 되나요?
 

오랫만에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삼성의 8천억 때문에 요즘 세간에 화제인데, 이런 시각으로 록펠러와 비교하니 무척 재미있는 기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8천억 하면 왠지 멍한데, 기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쓴 것 같다.

물론 기사 내용 전부에 공감할 순 없더라도 록펠러와 삼성의 비교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천편일률적인 8천억 기사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기사라 여기에도 옮겨본다.

이건희는 록펠러가 될 것인가

[한겨레] 치밀한 관리·노조 거부·치부 폭로와 재산 헌납 등 쌍둥이 같은 두 기업인
경영권 내놓고 귀족가문으로 남은 록펠러의 길이 삼성의 해법은 될 수 없나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철강왕’ 카네기가 저돌적인 스타일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연상시킨다면, ‘석유왕’에 세계 최고의 자선가로 이름을 떨친 존 D. 록펠러(1839~1937)는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록펠러의 행적을 전하는 여러 기록물에서 꼼꼼하고 치밀한 관리형의 삼성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언론 폭로 뒤 재산 내놓아 수렁 탈출

록펠러는 자회사를 순회하던 중 뉴욕 지역에서 한 납땜 담당 직원을 만났을 때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엔 땜납 40방울로 석유통을 밀봉했는데, 록펠러는 그 직원에게 38방울로 봉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라고 했다.




시도 결과 38방울일 때는 석유가 샜고, 39방울로는 완전히 봉해진다는 게 밝혀졌다. 이 한 방울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수년 동안 수백만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 뒤 회사는 1센트의 비용도 정확히 계산했다고 한다.

노동조합에 극도의 반감을 보인 점에서도 록펠러와 삼성은 쌍둥이처럼 잘 통한다. 록펠러는 직원들에게 평균보다 많은 월급을 주었으며, 직원들은 수년 동안 파업은 고사하고 노조도 결성하지 않았다. 노조 결성 움직임만 보이면 록펠러는 주동자를 색출해 다른 공장으로 전근시켜버렸다. 록펠러는 전기 작가에게 “나는 노동자들이 왜 노조를 결성해서 자신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하는 회사를 무너뜨리려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는 말로 상징되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 집착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록펠러와 삼성의 유사성은 관리형 이미지와 경영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언론의 폭로로 결정적인 치부가 드러나고, 재산 일부를 떼내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수렁을 벗어나려 한 움직임에서도 비슷한 면모를 보여준다. 지난해 터진 ‘옛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X파일) 폭로 사태’ 뒤 곤경에 빠졌던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2월7일 8천억원의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한 모습은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겪었던 일의 재방송이라고 할 만큼 닮은꼴이다.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이 회장의 처남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내밀한 곳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담은 X파일은 초일류 삼성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실상을 드러내 한국 사회를 일대 충격에 빠뜨렸다. ‘돈의 힘으로 나라를 움직이려 한다’는 게 낭설이 아님을 ‘날것’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불법·변칙적인 소유권 세습을 중심으로 한 ‘반삼성’ 분위기가 1위 기업에 대한 단순한 시샘일 뿐이라는 일축은 근거를 잃게 됐으며, 거대 삼성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아이더 티벨의 용감한 탐사보도

뒷면에 가려진 초거대 기업 삼성의 실체를 드러낸 주인공이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였다면, 100여 년 전 미국에는 아이더 타벨이라는 여기자가 있었다. 타벨 기자는 1902년 11월부터 1904년 10월까지 <매클러>라는 잡지에 19차례에 걸려 ‘효율성과 독점적 파워 면에서 인간이 만든 어떤 장치보다 완벽한 머신인 스탠더드 오일’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타벨은 기사에서 “스탠더드 오일이 설립된 이후 공정하게 거래하고 경쟁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질타했다.

그의 폭로로 미국인들은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탄생해 독점 자본의 힘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록펠러와 그의 사단이 벌인 정·관계 뇌물 살포, 경쟁 기업을 상대로 한 치졸한 스파이 행위와 폭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인수·합병, 총수의 특권·사치 행태를 똑똑히 알게 됐다. 삼성이 정·관계는 물론 검찰까지 관리하고, 대통령 선거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려 한 정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X파일 사태를 보는 듯하다면, 지나친 단순비교라고 할 것인가?

X파일이 문화방송에서 적나라하게 보도될 때까지 웃지 못할 곡절을 겪었듯 타벨의 탐사 보도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련이 따랐다. 타벨의 아버지는 딸이 스탠더드 오일의 비리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선 “하지 마라! 그들이 너마저 부숴버릴 것이다”라며 극구 말렸다. 군소 석유 채굴업자였던 그의 아버지 프랭클린 타벨은 스탠더드 오일의 인수·합병 전략에 휘말리면서 처참하게 무너져내려 비참한 황혼기를 보내고 있던 터였다. 타벨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추적하고 탐사해 언론 역사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탐사보도’의 대표적인 작품을 일궈냈다. 타벨의 폭로기사는 그 뒤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단행본으로 묶여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타벨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됐다. 타벨 이후 수많은 언론인들이 탐사보도를 지향하며 정계와 경제계의 비리를 추적해 폭로하기 시작했다.

타벨의 시리즈 기사는 미국이 당시까지 40여 년 동안 산업화 길을 걸으면서 깊어진 빈익빈 부익부, 민주주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특권층의 출현, 매관매직이 일상화한 정·관계의 부정부패로 홍역을 앓고 있던 순간에 던져진 불쏘시개였다. 미국인들의 분노는 활활 타올랐다. 이후 10~15년 동안 미국 역사에서 ‘거대 기업과 총수들의 시련기’가 펼쳐진다.

‘산업화 40년 증후군’인가

‘X파일’ 폭로로 이건희 회장이 검찰의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듯이 타벨의 폭로로 록펠러는 연방과 주정부 검찰의 추적을 받는 등 궁지에 몰렸다.

록펠러는 이를 계기로 삶의 방식을 전환한다. 타벨의 폭로 전에도 적지 않은 돈을 사회에 기부했지만, 그때까지는 다분히 생색내기 성격이 강했다. 폭로 이후 그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적극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변화를 알리기 위해 극적인 타이밍을 노려 돈을 쾌척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던 1907년 금융공황이 발생하자, 줄줄이 무너지는 신탁회사와 증권회사를 구제하기 위해 재산 절반을 내놓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일이다. 이는 결국 성사되진 않았어도 록펠러는 당시로선 거금인 1천만달러를 아무런 조건이 없이 시장 안정화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정치자금과 자식들에 대한 증여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숙인 일은 변화의 싹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 회장에서 이재용씨로 이어지는 경영권 세습’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절세일 뿐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해온 것과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다. 삼성은 8천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헌납한다고 밝혀 국민들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기도 했다. 치부가 드러난 뒤 삶의 태도를 크게 바꾼 록펠러의 길을 가려는 것일까?

록펠러가 겪었고, 삼성이 현재 겪고 있는 홍역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닮은꼴은 본격적인 산업화를 겪은 지 대략 40년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산업화가 1861년 남북전쟁 발발과 함께 본격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초거대 기업과 공동체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아이더 타벨을 비롯한 폭로 저널리스트들의 활동이 맹렬해진 건 그 뒤 40년이 흐른 때였다. 한국이 산업화를 시작한 1960년대 초반과 지금의 간극도 대략 40년이다. 이를 ‘산업화 40년 증후군’으로 부르는 경제 전문가들도 있다.

한 나라가 산업화를 시작한 지 40년쯤 흐르면 부익부 빈익빈, 부정부패 같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모순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국민들도 경제적 불평등을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해 정치적 갈등이 첨예해진다는 논리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존 특권층의 추문을 폭로하는 언론인들의 활동이 맹렬해진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요즘 한국의 재계에서 즐겨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반기업 정서’가 극에 달한다는 얘기다. 40년 증후군의 밑바탕에는 기업이 급속한 외적 성장에 걸맞은 내적 윤리를 갖추지 못한 ‘불균형 성장’이 도사리고 있다.

국민의 불만과 원성이 커지면 이에 반응하는 정치인 또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미국 대통령 가운데 거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원성에 가장 신속하게 반응한 사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는 1900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매킨리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듬해 9월 매킨리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의 저격을 받아 숨지자 백악관을 차지한 다음 제정된 지 10년 넘게 사문화돼 있던 반독점법(셔먼법)을 무기로 거대 기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J. P. 모건이 주도해 철도지주회사로 설립한 노던 시큐어리티스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 결국 해체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도 1911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해체되고 말았다.

단호한 조처, 한국과 미국의 차이

미국 의회는 본격적으로 거대 기업 총수들을 불러 청문회 증언대에 세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1912년 말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간 J. P. 모건이었다. 그는 청문회에 나가 혹독한 심문을 받은 뒤 육체적 쇠약에 정신분열까지 겹쳐 이듬해인 1913년 4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소환장을 받는 악몽과 환각에 시달린 것으로 전기작가들은 전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과 100여 년 전 미국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미국의 정치세력과 사법당국이 거대 기업에 단호한 조처를 내린 반면, 한국에선 재벌에 대한 ‘법대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검찰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 한번 하지 않은 채 무혐의 처리해 빈축을 샀다. X파일을 보도한 기자를 기소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돼 마치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국회 또한 무기력했다. 국회는 청문회 증인 출석에 불응한 이 회장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내리지 못한 채 꿀먹은 벙어리로 남아 있다. 박영선 열린우리당,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진전된 내용의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을 마련하는 등 일부 의원들이 삼성 견제에 나서긴 했어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삼성에 법의 잣대를 대는 데 검찰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인 곳은 금융감독위원회다. 금감위는 삼성의 금산법 위반에 애써 눈을 감았다. 금산법은 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 정신을 담은 것으로, 금융지주회사법과 함께 ‘삼성에버랜드 → 삼성생명(금융자본) → 삼성전자(산업자본)’로 이어지는 삼성의 소유지배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사안이다. 삼성 계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 7.2%를, 삼성카드는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 지분 25.6%를 갖고 있다. 해당 법 조항에서 제시한 한도 5%를 훌쩍 넘어섰을 뿐 아니라 금감위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

금감위 쪽은 해당 법에 처벌 규정이 없다며 아무런 조처를 내리지 않았는데, 똑같은 위반 행위를 한 동부생명이 금감위 명령에 따라 계열 아남반도체 주식을 처분한 것과 대조적이란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받았다. 금감위는 동부생명은 삼성카드와 달리 보험업법을 적용받는 금융회사라는 핑계를 댔다가 삼성카드처럼 여신전문금융업법을 적용받는 현대캐피탈이 금감위 조처에 따라 기아자동차 지분을 털어낸 사실이 드러나 의혹만 더하고 말았다. 삼성 문제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미궁을 헤맨 것은 감독당국의 이같은 직무유기성 태도가 톡톡히 한몫했다. 윤증현 금감위원장은 그것도 모자라 2월9일 올해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금융·산업 자본 분리 원칙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주요한 축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금산법 개정안은 또다른 파문

트러스트 해체 뒤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은 어떻게 됐을까? 스탠더드 트러스트(그룹)에서 떨어져나온 회사 가운데 펜조일과 셰브론은 독립 뒤 성공적으로 운영돼왔다. 스탠더드 그룹에서 가장 큰 규모의 두 자회사는 모빌과 엑손으로 변신했다가 1999년 다시 합병했다. 록펠러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듯이 세계 최고의 자선가로 거듭났다. 록펠러의 아들 록펠러 2세는 스탠더드 오일에 입사해 부사장직에까지 올랐다가 뇌물 사건에 휘말린 한 인사의 해임을 건의한 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했다. 록펠러 2세는 그 뒤 회사 경영보다는 자선사업에 몰두하며 귀족 가문의 명맥과 영광을 이어갔다.

삼성 문제의 본질이 불법·변칙 혐의를 받고 있는 경영권 승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총수의 사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당장 불법·변칙 세습 논란의 핵심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증여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에버랜드 CB건은 삼성 쪽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총수 가문으로 불길이 번질 수 있는 폭발력을 띤 사안이다. 여기에 삼성의 소유·지배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금산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바뀌는 법 체계에선 지금처럼 에버랜드를 꼭대기에 둔 채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한 둥지 아래 거느리는 게 어렵게 될 수 있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해나가느냐에 따라 또 한 번 요란한 파열음이 일 수 있다. 삼성 총수 가문이 공동체와 화해하는 영광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록펠러 가문의 길이 곧 삼성의 해법이 될 순 없을지라도 하나의 참고는 되지 않을까?

* 참고문헌: 그랜트 시걸의 <세계 최고의 부자>, 진 스트라이우스의 , 론 처노우의 <더 하우스 오브 모건>




오시옵소서 참여연대
쓴소리해줄 ‘삼지모’ 인사로 장하성 교수 거론되나 본인은 거부

삼성그룹이 2월7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이름으로 내놓은 반삼성 종합대책에는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삼성은 삼지모 운영과 관련해 “우리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에 따라 삼성의 경영에 쓴소리를 해줄 사회 각계의 인사들을 모셔 조언을 구하고 비판적인 여론을 수용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평소 대기업에 비판적이고 △명망이 있으며 △본인이 (삼성의 요청을 수락할) 의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 쪽에선 이 본부장의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로 초창기 참여연대 활동을 주도해온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을 꼽을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때마침 장 학장이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바른경영 가치경영’ 과목 초빙교수로 임용한 사실이 알려진 게 이런 추측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장 학장을 비롯해 참여연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인사들의 삼지모 합류는 쉽게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장 학장에게서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직 바통을 이어받아 활동 중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참여연대나 장하성 교수나 삼지모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김 교수는 “그렇다고 삼성과 대화를 거부한다는 건 아니며, 필요할 때 누가 요청하든 (현안에 대해) 대화와 협의에는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상설 협의체 비슷한 형태로 운영하는 방식에선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경제개혁센터는 지금까지 그런 모임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삼지모가 삼성과 참여연대의 접점이 되긴 어려울 듯하다.







8천억원은 면죄부될까
이재용 상무와 두 여동생 1300억 헌납이 1조원의 주식 취득 가릴 수 있나

삼성그룹의 2월7일 대국민 발표를 전하는 상당수 신문의 1면 제목은 ‘사재 8천억원 사회 헌납’이었다. 천문학적 규모의 액수와 사재라는 낱말의 조합은 대중에게 적잖은 울림을 줬을 법하다.

좋은 일에 쓰라고 돈 내놓겠다는 마당에 숫자를 따지려 드는 게 야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8천억원을 사재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는 삼성의 불법·변칙 세습 논란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사안이어서 치졸한 숫자 놀음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삼성도 밝혔듯이 8천억원 가운데는 2002년에 설립한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기금 4500억원(이건희 회장 1300억원, 이재용 상무 1100억원, 계열사 2100억원)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이번에 새로 나온 총액은 3500억원인 셈이다. 재단이 삼성의 손에서 완전히 떠나 사회에 조건 없이 헌납되는 질적인 변화를 감안한다고 해도 계열사 자금 2100억원은 사재에서 빼고 셈해야 마땅하다.

이 회장 일가가 새로 내놓기로 한 사재 3500억원은 △이재용 상무 800억원 △이 상무의 두 여동생 500억원 △고 이윤형씨의 재산을 포함한 이 회장 일가의 기부금 2200억원으로 이뤄져 있다. 이 상무 몫은 본인이 부담하고 두 여동생의 부담은 이 회장이 대신 지기로 했다고 삼성은 밝혔다. 두 여동생의 보유 주식은 모두 비상장 상태여서 당장 처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삼성은 이재용 상무와 이 상무의 두 여동생 헌납 기금 1300억원에 대해 ‘시민사회 단체들이 계열사 지분 취득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한 것’이라고 밝혀 이 상무의 지분 승계 과정의 문제점을 완곡하게마나 인정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이 상무가 편법으로 취득해 보유 중인 주식의 현재 가치가 1조원을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재 8천억원’이란 식으로 불려진 사실과 맞물려 1300억원의 기금 헌납이 지분 승계 과정의 잘못을 덮는 면죄부로 이용돼선 안 된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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