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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집단 학살(集團虐殺) 또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 ――― 위키백과
제노사이드란 집단 학살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바로 이 제노사이드라는 소재에 집중에서 장편을 썼다. 국내에는 [13계단](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05년 12월)이라는 사형 제도를 다룬 미스터리 소설로 인기를 모은 작가다. 100권이 넘는 황금가지 밀리언셀러클럽 소설들 중에 높은 판매고를 보인 작품이며, 아직도 꾸준히 추천을 받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노 가즈아키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주목을 받은 소설이며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또한, 책 뒤표지에 실린 수상 기록도 화려하다. ‘일본 서점 대상 2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기록했다. 자연스레 독자의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 수상기록 때문인지 대표작이 [13계단]이기 때문인지, 최신작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12년 6월)를 미스터리라고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막상 책을 펼치고 초반만 읽어도 이 책은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으나,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라기보다는 다른 장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화한 인류, 초월종의 존재라는 점에서 이를 전 인류적인 재앙으로 다루는 점, 신약을 개발에 관한 다양한 과학적인 조사 등 소재적 측면에서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로 볼 여지가 많다. 또한, 긴박감 넘치는 상황이 연속으로 펼쳐지면서 액션과 스릴있는 장면 연출이 많아 헐리우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즉, 스릴러 소설의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테크노 스릴러라고 할까. 사실 세세하게 장르를 따지고 들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를 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작가들은 대게 어떤 장르를 써야지 하고 작품을 쓰기보다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적절한 방식을 선택하는 게 대부분이고, 추후에 독자들이 편의를 위해 여러 장르로 구분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특정 장르를 목표로 하고 쓴 게 아닌 작품을 가지고 이 작품은 이 장르의 특성에 안 맞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라는 식의 시선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구성과 자료 조사가 돋보이는 작품
그럼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제노사이드]는 [13계단]에서 보였던 작가의 탄탄한 구조를 쌓아올리는 장점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게다가 일본으로 한정되었던 [13계단]과 달리 [제노사이드]는 크게 미국 백악관과 아프리카 그리고 일본 등의 여러 지역을 선보이면서도 독자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작품 속에 빠져들 수 있게 노련하게 독자를 이끌고 있다. 자칫 산만하거나 허황되게 느껴질 배경들을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작업에 성공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작업은 쉬어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배경과 인종을 한 권 안에 모두 넣기가 어려우며 이런 방식의 소설을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이 매력적인 구조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독자들은 암시와 복선이 배치된 뒤에 이를 체계적으로 회수하는 작품에 구성이 뛰어나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느낀다. [제노사이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안정적이다. 작가의 실력은 독자를 충분히 만족케 할만큼의 탄탄한 구성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충실한 자료조사이다. 이 작품은 여러 소재가 쓰인 만큼 기본적인 자료 조사가 필수인 소설이다. 책 뒤에 실린 감사의 글과 주요 참고 서적 리스트를 보면 이 작가가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전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이 소설은 지구적인 스케일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바탕으로 한 스릴러 소설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 조사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 조사가 기반이 되면 소설에 현실감이 부여된다. 첫 장면부터 백악관에서도 대통령의 브리핑 장면으로 대범하게 시작되는데, 이런 장면 역시 조사를 통한 고증이 없으면 상상으로는 집필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작가는 조사를 통해 이런 장면들을 구현해 냈고 덕분에 독자들은 마치 영화를 보듯이 첫 장면부터 빨려들 수 있다. 상업 영화의 첫 5분이 독자를 끄는 데 중요한 것처럼, 이 소설 역시 그런 법칙에 맞게 초반부터 이 소설이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장면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초반부터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당연하다. 훌륭한 페이지 터너인 셈이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각하."
미리 불러 두었던 새뮤얼 깁슨 해군 중령이 이쪽으로 왔다. 그는 이른 바 '양키 화이트', 즉 국방부의 철저한 신원 조회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군인이었다.
"잘 잤나, 샘."
중령이 가방을 받아서 손잡이와 자기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번즈는 그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비밀 검찰국의 경호원과 합류한 뒤 백악관 서관으로 향했다. 도중에 국가 안보국(NSA)의 직원을 만나서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받았다. 대부분 이 카드를 '비스킷'이라고 불렀다. 카드 표면에는 난수 배열로 이루어진 핵미사일 발사 코드가 인쇄되어 있었다. 이 무작위적인 문자열을 대통령의 승인 하에 '뉴클리어 풋볼'에 장치된 키보드로 입력하면 핵공격이 실행된다. 번즈는 카드를 넣은 지갑을 윗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황금가지, 2012년 6월, 8쪽
작가가 많이 조사한 면이 드러날 수록 독자는 작가를 신뢰하고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나가게 된다. 작가가 성의없이 아무렇게나 적은 게 느껴지면 금세 글에 흥미를 잃는 것과 대조적으로.
'제노사이드'라는 주제에 집중한 소설
앞에서 말했듯이 [제노사이드]는 다양한 자료 조사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독자는 소설을 통해서 잡지식이라고 해도 다양한 지식을 훑어보는 재미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주제를 소흘히 대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중요한 메시지인 제노사이드에 대한 고찰을 내내 집중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노사이드가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많이 나오는 나머지 조금은 인위적이고 과도한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자료 조사를 통한 역사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들은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작가가 말하려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게 한다. 인류는 왜 제노사이드를 벌이는가. 인간의 잔혹성과 어리석음, 잘못된 역사. 이것은 나아가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인간 스스로 자기들끼리 집단 학살을 자행하는 종족이 과연 지구에 언제까지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자격과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인류가 자행한 제노사이드를 꿰고 있을 수 있지만, 별로 관심이 없던 독자들에게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인류가 벌인 제노사이드를 짚어보면서 인류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서 겐토는 일본인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를 알고 오싹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 '조센징이 방호를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푼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나돌자 정부와 정치가, 신문사까지 이 근거 없는 소문을 흘리면서 일본인들이 수천 명의 조선 반도 출신 사람들을 말살 하도록 부추겼다. 총이나 일본도, 방망이 따위로 사람들을 가지고 놀다가 살해하는 것으로 모자라 희생자를 땅 위에 눕혀 묶어 놓고 트럭으로 치고 나가는 잔학한 행위까지 벌어졌다. 일본이 조선 반도를 무력으로 식민 지배한 것이 당시의 일본에게는 켕기는 구석이었던 탓에,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공포가 오히려 흉폭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폭력이 한계치까지 달해 조선 반도 출신의 사람으로 착각하고 일본인을 살해한 일도 많았다. 인종 차별주의자인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현장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대량 학살에 가담했을 것이다.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무언가 계기가 주어지면 그들 안의 잔인한 감정이 폭발하여 살인자로 돌변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마물이 스며들어 있는 것일까? 살해당한 사람들의 공포와 아픔은 어떤 것일까? 일본인의 무서움을 일본인은 알지 못한다. ―――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황금가지, 2012년 6월, 170~171쪽
이 책은 기존에 인류가 저지른 제노사이드에 대한 고발을 하는데, 그걸 이끌어내는 것은 사건을 통해서다. 아프리카 오지, 콩고의 피그미족에게서 태어난 초월종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은 40명의 피그미 부족 하나와 초월종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집단 학살이다. 이를 통해 소설 속 인물들은 그 동안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를 떠올린다. 일본인이 저지른 동경 대학살도 같이 언급되어 작가가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작품을 집필했음을 보여준다. 자국이 저지른 잘못을 축소하거나 숨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제노사이드와 마찬가지로 다룸으로써 이 소설의 스케일을 실감나게 만들고 있다. 또한, 40명의 피그미족을 죽이지 않게 되더라도 초월종은 죽이려고 하는데, 위험 요소라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종을 단번에 멸종시키려는 인간의 오만과 잔학성을 보여준다. 인류 본성의 잘못을 소설 속에서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고발하면서 동시에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구성은 소설 전체가 제노사이드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이게 만든다. 미국이 석유를 얻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가공해서 벌인 전쟁을 고발하고 그로 인해 벌어진 집단 학살도 소설 속에서 고발된다. 잘못된 전쟁. 포로를 고문하고 살해하는 음지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이런 문제 의식들은 공감이 되고 흥미롭게 읽었다. 이런 사회 풍자적인 요소와 영상을 염두에 둔 듯한 스케일이 크고 영화적 연출 장면으로 인해 영미권에 번역되거나 헐리우드 영화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소설 속의 인물들
이 소설은 크게 중요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 진영의 주인공 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 활약하는 인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다. 또한,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잔혹한 임무를 수행하러 콩고로 잠입한 용병 조너선 예거가 있다. 그리고 이 두 명보다 등장하는 장면이나 비중이 적지만 미국 백악관에서 후반부에 등장해서 활동하는 루벤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세 명은 소설에서 흔히 주인공으로 볼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구성이 뛰어난 반면 인물들에게는 아쉬움을 느꼈다.
고가 겐토는 일본에서 활약하는 대학원생이라는 점에서 가장 주인공 포지션에 잘 맞는 인물들이다. 아무래도 천재로 설정된 루벤스나 용병 조너선 예거보다는 일반적인 독자가 공감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감정이입이 잘 되어야 할 고가 겐토가 의외로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로 비쳤다. 일단,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수께끼를 푼다는 설정은 좋았지만, 겐토가 나중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기를 쓰고, 모든 걸 걸고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그 동기가 잘 와닿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겐토의 캐릭터는 설득력을 잃고 이상한 인물로 전락해버린 느낌이었다. 왜 겐토는 이렇게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잘 와닿지 않다 보니, 계속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처음에 한 의심이 커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불륜을 의심하고 아니라고 안심하는 장면도 좀 뜬금없고 소설 전체의 흐름을 깨는 느낌도 있었다. 콩고에서는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는 중에 일본 쪽으로 화면이 넘어가면 긴장이 깨졌다. 일본에서의 위협은 대비가 커서 겐토는 위험을 쉽게 넘기는 편이었고 위험한 상황에 처할 거란 예상이 안 되어서 긴장이 약했다.
이에 반해 콩고의 잠입 임무를 맡은 예거는 아들을 향한 부성애가 절절하게 녹아져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동기가 단순하면서도 확고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캐릭터가 가장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콩고 한 복판에서 이야기가 흐름을 잃지 않았던 것, 일본과 백악관을 오가면서도 소설이 계속 독자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예거 덕분이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목숨 때문에 독자는 결국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하며 작품을 읽어가게 된다. 작가가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초월종을 데리고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는 계속 초월종의 시선에 대해 염려한다. 초월종이 구인류를 어떻게 판단내릴지 염려스러운 마음에 선한 인간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초월종의 시선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는 언급을 계속 하면서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초월종에 대한 신비롭고 모호하며 때론 섬뜩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 소설이 흥미로워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루벤스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로 어리석은 인물들만 있는 듯한 백악관 쪽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없었다면 미국 백악관 장면에서는 후반부에는 그냥 악으로만 묘사되고 지루한 파트가 되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설명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속내를 처음부터 많이 설명하면서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쉽고 생동감이 있는 인물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요 인물 몇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라 소설 전체적으로 아쉬웠다. 물론, 단 권으로 구성된 책에서 모든 인물의 감정과 사고를 묘사하고 독특한 개성을 부여해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미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류학자는 지나치게 사고가 나오지 않고 인물에 대한 소개나 행동의 동기가 나오지 않아 잘 와닿지 않는 캐릭터였다. 상황을 전개시키기 위한 수단, 기계적이고 도구적인 인물로 비친 것이다. 이런 인물은 겐토를 돕는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중간에 한국인만의 특성이라며 '정'을 설명하는 부분도 오그라드는 부분이도 공감도 가지 않았다. '정'은 어느 나라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이며 한국인이 특별히 유별난 것도 아니고, 별다를 게 없지 않은가. 순혈과 민족을 따지자면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차별적인 대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뛰어난 천재이고, 아무것도 받지 않고 돕는 인물로 설정되었는데, 이는 잔혹한 인간도 있는 만큼 선한 인간도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캐릭터이지만 그만큼 구성에 맞게 등장했기 때문에 역시 도구적인 느낌이 강하다.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인조인간 같은 느낌인 것이다. 따라서 인물의 매력이 살아나지 못했던 것이 많이 아쉬웠다. 좀더 인간다운 면도 부여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것이다. 이런 점들은 완벽한 구성 때문에 캐릭터성이 희생된 면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신처럼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물들이 인형처럼 틀에 맞춰져서 살아있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딘 쿤츠의 작법론을 떠올리게 한다. 쿤츠는 플롯을 대단히 중시하는 작가인데, 그 점에서 플롯이 잘 짜여진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도 유사한 면이 있을 것이다. 쿤츠의 소설에도 완벽한 구성에 비해 몇몇 인물들이 좀 부자연스럽거나 답답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쿤츠는 플롯을 중시하지 않으면 결말이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며 그 예로 스티븐 킹의 [스탠드](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7년 10월)를 예로 들었다. 반대로 스티븐 킹은 플롯은 허위라고 말한다. 플롯을 강조하면 너무 거칠어서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븐 킹은 플롯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 진행을 적은 스토리를 중시하고 퇴고에 집중하라고 한다. 이렇게 대조적인 작법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스탠드]는 결말이 아쉬운 반면에 많은 인물에게 애정을 갖고 보게 되며 [스탠드]를 포함한 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들 속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등장하며 읽고 나서도 오래 인물이 기억에 남는다. 각각의 장단점은 있을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한 편의 잘 짜여진 소설로 암시와 복선을 차례대로 회수하고 깔끔한 결말을 단번에 맺지만, 분량이 더 늘어나더라도 인물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각각의 매력이 살아나고 다른 느낌의 소설이 되었을 것 같다.(언급한 딘 쿤츠의 작법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키 백과를 참조.[클릭])
초월종에 대해서 - 데우스 엑스 마키나
SF에서는 예전부터 수없이 초월종, 신인류에 관한 소설이 나왔다. [제노사이드] 역시 그런 작품의 흐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올라프 스태플든의 SF [이상한 존](올라프 스태플든, 오멜라스(웅진), 2008년 7월)이 대표적으로 소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필립 K. 딕의 단편 {골드맨}도 포함된다.) 여기서 초월종들을 핍박을 받는다. 결국,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존재의 출현에 두려움을 갖는다고 묘사된 셈이다. 그게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예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노사이드]에서는 신인류의 지적 능력을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단계까지 높였다. 이를 통해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력한 동물 수준이 되었고 신인류는 인간을 갖고 노는 수준이 된 것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신인류가 구인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인류의 사고를 우리와 동격의 사고 체계를 갖고 있는 작가가 정밀한 묘사를 해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필연적으로 관찰자의 시점에서 신인류를 보여줄 뿐이다. 이는 신인류를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처음에는 '하이먼즈 리포트'라는 가상의 보고서를 등장시켜 신인류의 등장이 인류 멸종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흥미로운 사건을 제시한다. 여기에 신인류는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는 종으로 나오는데, 기존에 나온 어떤 소설보다도 현재 과학기술과 접목해서 현실감 있게 그 지력을 보여준다. 현재 최강국인 미국을 정보전으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력 시위를 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 [엑스맨2](X2, 2003)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사건 해결 방법도 유사하다.(돌연변이로 일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의 핍박을 받다가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무력 시위로 갈등을 대충 봉합하는 구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약간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서서히 신인류의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은 미스터리 작가의 뛰어난 장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인류의 측정 불가능한 지적 능력에 대한 묘사를 처음에 나뭇잎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예측하는 모습에서 암시하듯이,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보고, 혼돈 이론을 비롯한 모든 복잡계 이론을 인지한 능력을 차례차례 선보이는데, 이것이 물론 상황으로 체험하게 하면서 인물들과 독자들에게 인식시켜주는 방식은 좋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에게는 초반 몇 장면을 보고 나면 이후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려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지적인 존재는 사실 인류의 지능을 뛰어넘은 인공지능 등으로도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신인류의 전자전은 그러한 행동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약간은 새롭지 않은 것이다. 물론, '기프트'라는 프로그램을 주어서 이를 통해 신약을 개발하게 하는 과정은 신선한 면이 있었고 흥미를 유발시켰다. 하지만 주인공들을 계속 위험에서 탈출시키는 과정은 반복이 되면서 조금은 무미건조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예지 능력자를 다룬 몇몇 영화들 속 미래 예지나 영화 [이글아이](Eagle Eye, 2008)에서 인공지능 컴퓨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교통, 통신... 인류가 구축한 모든 전자 기계적 시스템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동일하기 때문에 비슷한 장면 연출이 나온다. 물론 영화와 차별화된 더 나아간 지점도 있다. 그러나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신인류를 부각시켰다면 소설이 풍부해지고 읽는 사람도 계속 감탄을 하며 이야기를 읽어나갔으리란 생각이 들었다.(비슷한 패턴이 계속되면 결국 독자에게 읽힌다.) 신인류가 초월적인 능력으로 신과 같은 상황 장악 능력을 보이는 것이 확실시 되는 지점에서는 아예 이 소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은 역으로 보였으며 긴장감이 확 떨어졌다. 물론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구조 속에 개연성을 갖추고 논리적으로 만들어진 신인류의 모습이었지만, 어느 정도 사건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지점에서는 조금 허탈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모든 게 소설 속 일들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고 경이로운 능력을 선보이는 쇼 같이 느껴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소설을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고의 경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소설의 세계관을 축소시키고 이야기의 흥미를 스스로 시시하게 만드는 부분인 것 같아 아쉬웠다. 다루고 있는 소재는 다를 지점까지 더 나아갈 수 있는데도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리뷰를 마치며
예전에도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 말이지만, 리뷰를 길게 썼어도 결론은 간단하다. 재미있고 즐거운 소설이었다. 680페이지가 넘는 소설임에도 내내 손에 땀을 쥐며 읽게 만드는 책이다. 어느 정도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할지라도 하루만에, 그러니까 몇 시간만에 단숨에 읽게 만드는 책은 많이 없다. 그것도 두께가 만만치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는 그것을 해냈다. 그렇다면 얼마나 놀라운 흡인력과 재미를 가지고 있는 책인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노사이드와 신인류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엄청난 속도감으로 무장한 책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빠르고 걸리는 문장이나 지루한 구석이 없다. 사건 전개가 그만큼 세계 곳곳을 오가는데도 숨막히게 빠르고 그러면서도 산만하다는 느낌이 없다. 플롯을 치밀하게 짠 만큼 독자가 적당한 시점에서 사건의 전말을 깨닫게 되며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한 곳에 집중된다. 거기서 오는 쾌감도 상당한 소설이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렇게 가독성 높은 소설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이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거나 예상치도 못한 반전을 가진 명작의 반열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중소설로써 높은 완성도와 재미를 가진 소설이다. 머릿속에 내내 헐리우드 영화 속 영상으로 재현되었고, 실제로 영상으로 보고 싶어지는 소설이었다.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13계단]과 미니 드라마 같은 초능력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단편 연작집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09년 3월)에 이어 [제노사이드] 역시 충분히 시간을 잘 죽일 수 있는 재미를 준 작가다. 개인적으로 아직 안 읽은 [그레이브 디거](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07년 6월)와 책날개에 근간으로 표시된 [K·N의 비극]도 얼른 읽고 싶다. 작가가 앞으로도 충실한 자료조사와 다양한 소재로 즐거운 이야기를 선사해주기를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