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
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 현실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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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문학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2007년도에 출간된 저서로 국내에는 5년이나 뒤늦게 소개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2001년 발표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오타쿠’를 통해서 일본 사회를 짚어보는 글이었다.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후속작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문학’으로 불릴 책으로 ‘라이트노벨’과 ‘미소녀 게임’을 다룬 책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를 통해 일본문학을 고찰하는 것이 당돌한 주장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포스트모던화의 발전과 오타쿠의 출현은 시기상 특징상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고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밝힌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즈마 히로키는 ‘제1장 이론’에서 사회학 측면으로 서브컬처를 살펴본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에서 먼저 상기할 점은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것과 ‘데이터베이스 소비’적 환경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 상황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순수문학이나 일반 소설이 아닌, ‘라이트노벨’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라이트노벨의 정의부터 라이트노벨의 기원까지 먼저 서술한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 라이트노벨을 읽고 관심이 많았던 독자라면 대부분 다 아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한 셈이다.
 국내에서도 라이트노벨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라이트노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독자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우기도 하고, 위키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라이트노벨을 정의하고 재단하기도 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반적 정의로 만화적이거나 애니메이션적인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개 문고판이지만 양장본 출판도 늘고 있다고 말한다. 아리카와 히로의 [도서관 전쟁] 시리즈나 고단샤에서 나오는 책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국내나 일본에서 이렇게 라이트노벨에 대한 정의가 문제시 된 것은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는 단어가 일반적인 장르소설들의 구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독자층으로 나뉜다면 아동소설, 청소년 소설, 성인 소설의 분류에서 청소년 소설과 연관이 되며, 소재로 나뉜다면, 라이트노벨 레이블에는 SF, 미스터리, 판타지, 전기, 러브 코미디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장르소설의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장르로 묶을 장르 규칙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소제목으로 “라이트노벨은 ‘장르 소설’이 아니다”라며 판타지, SF, 미스터리 등의 구분과 동일선상에 라이트노벨이 놓여 있지 않다고 말한다. 미스터리나 SF는 독특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라거나 ‘이것은 SF가 아니다’라는 논쟁이 일어나지만 라이트노벨에서는 그와 같은 기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이 단순히 독자층 구분으로도 소재별로 구분하는 내적 기준으로도 구분할 수 없다면 외적 요소인 레이블이나 겉 포장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국내에서도 라이틑노벨은 장르가 아니라 특정 레이블, 삽화와 표지, 문고본 형태 등으로 규정되는 ‘포맷’이라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고단샤 노벨즈나, 고단샤 박스 등은 이런 외적 기준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많고,(표지에 애니메이션적 필치가 없고, 삽화가 없으며 양장본으로 제작되는 등) 반대로 일본에서는 SF출판사에서 SF 레이블로 출판된 소설이 국내에는 라이트노벨 레이블로 출간되는 경우를 보듯이 외적 기준만으로 라이트노벨을 규정짓는 것은 완벽하게 라이트노벨을 규정짓는다고 볼 수는 없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에서 미소녀 게임, 보이스 러브 소설에서부터, 협의의 라이트노벨을 거쳐 미스터리와 SF 같은 장르 소설 그리고 순수문학 일부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위 안에 일관되게 유지되는 일정한 감성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막연하게 ‘라이트노벨’이라 불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노벨,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만들어지는 캐릭터 소설

 저자는 라이트노벨 감성의 정체를 짚어보면서 캐릭터를 이야기한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의 서브컬처에는 원본의 2차 차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소비된다. 소비자들은 이같은 ‘캐릭터의 자율화’에 매우 익숙하다고 지적한다. 오타쿠들의 세계에서는 캐릭터가 특정 작가나 작품에 귀속되기보다는 오히려 공유재로 의식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캐릭터 유형의 유행을 분석하여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이 작품 제작의 큰 과제가 되고 있음을 말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큰 이야기의 쇠퇴와 캐릭터의 자율화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근 10년간 오타쿠들의 작품과 시장을 규정하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한다. 저자는 전작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이야기가 아닌 작품의 구성 요소 그 자체가 소비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라이트노벨 작가는 이야기의 양식을 규정하는 장르적 규범의식이 아니라 그 하위에 위치하는 탈장르적 혹은 메타 장르적 데이터베이스에 의거해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마찬가지로 ‘라이트노벨적’ 감성에 의거하면서, 독자가 판타지를 원하면 판타지를, SF를 원하면 SF를, 청춘 소설을 원하면 청춘 소설을 유연하게 써내는 것이 가능하다. 신조 가즈마는 이것을 ‘장르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혹은 ‘제로 장르’라고 묘사하고 있다. “(라이트노벨은) 구매층의 유행에 대응하는 어떤 것으로, 혹은 읽는 쪽과 쓰는 쪽이 캐치볼을 하고 있는 과정으로 각 장르 픽션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라이트노벨은 그 자체가 특정 장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장르에도 우위를 두지 않고 모든 장르를 등가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도 지금 많은 독자들이 ‘라이트노벨적’이라는 말로 지칭하며 때로는 저항감도 표현하는 대상은, 이야기의 내용도 레이블의 특성도 아닌 이러한 상상력의 환경 그 자체가 아닐까.(35-36)



 라이트노벨의 본질,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우리는 여기까지 라이트노벨의 본질이 메타 이야기적이고 캐릭터적인 상상력의 환경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환경이 실현되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혹은 너무나 쉽게 성립해버리는 상황이 확실히 포스트모던의 문학적 반영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논해왔다.(41)
 (……)
 오쓰카 에이지는 순수문학에서 미스터리와 SF까지 포함하여 라이트노벨 이외의 소설 전부를 현실을 ‘사생’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미스터리나 SF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그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사생을 전제로 한 다음, 거기에 위화감을 끌고 들어가는 수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에 비해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이나 코믹이라고 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허구를 ‘사생寫生’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현실의 사생과 허구의 사생이라는 이 대치를 그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42)



 

 따라서 우리는 라이트노벨의 기법(데이터베이스의 참조)을 사용하여 SF, 미스터리, 판타지, 포르노를 쓸 수 있게 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의 기법(현실의 사생)을 사용하여 SF, 미스터리, 판타지, 포르노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기보다 바로 그 때문에 근대문학은 지금까지 그 파생형으로써 다양한 장르 소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순수문학은 원래 자연주의가 가진 이러한 메타 장르성을 가리키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SF 매거진』에는 SF만이 실리고 『소설추리』에는 미스터리만 게재되지만, ‘문학성이 높다’고 편집자가 판단하기만 하면 『군조』나 『문학계』와 같은 문예지에는 SF도 미스터리도 자유롭게 게재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이 문예지에 모인 편집자나 평론가의 의식이다. 물론 실제로 현재의 문예지에서는 그러한 자유로움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49)



 * 위의 인용에서 한국으로 배경을 바꿔보자면 『미래경』에는 SF만이 실리고, 『계간 미스터리』에는 미스터리만 게재되지만, ‘문학성이 높다’고 편집자가 판단하기만 하면 듀나의 SF 단편이 문학과지성사의 문예지 계간 『문학과 사회』에 게재되고, 배명훈과 김이환의 SF단편이 계간 『문학동네』에 게재되며 이후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집’과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실리는 경우가 연상된다.

 이 도식이 보여주는 상황을 ‘상상력의 이환경화’라고 명명해보자. 이와 같은 관점의 도입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이 도식은 SF나 미스터리 등 각각의 장르 가운데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두 방향성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51)



 * 이 뒤에 저자는 타니가와 나가루의 소설과 하야카와 서점의 2003년에 만든 ‘J컬렉션’ 시리즈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군과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이는 J컬렉션 시리즈 작품들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SF이며 타니가와 나가루 등의 라이트노벨은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SF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장르 소설을 다루는 커뮤니티에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SF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논의에 답으로 볼 수 있다. 즉,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가 SF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소설이면서도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클라크, 테드 창과 같은 작가들의 SF와 같이 묶을 수 없는 이질적인 정서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문학의 두 환경으로 방향성을 나누면서 구분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과 순수문학?

 저자는 캐릭터 소설에 초점을 맞추지만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2000년대 중반이 지난 지금도 순수문학은 사회적으로 캐릭터 소설보다 훨씬 큰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라이트노벨은 안정적인 판매망을 구축했고, 몇몇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 방영에 힘입어 높은 판매량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서브컬처에 속한 라이트노벨과 달리 주류문학은 바로 문단으로 지칭되는 몇몇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문단문학이다. 저자는 이것이 근거 없는 권위화에 의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주류문학의 독자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으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이트노벨이 주로 십대 후반의 독자층만이 읽는 것에 반해, 일반 소설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독자가 있기 때문에 영향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순수문학이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기대로 지탱되고 있다고 한다.

 미스터리와 공포물은 오락을 목적으로 읽지만, 순수문학은 오락이 아니라 사회를 알기 위해(가령 니트족의 현실, 재일한국인의 현실, 독일 여성의 현실을 알기 위해) 교양으로 읽는다는 전제가 일본에서는 반년 주기로 강화되고 있다. 물론 순수문학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비평에 친숙한 독자라면 오히려 이와 같은 문학관에 강한 저항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의 화제작과 그 작품에 대한 논의를 볼 때 순수문학에 대한 기대와 중심이 그와 같은 소박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마 오쓰카 에이지가 순수문학의 창작기법을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것도(문학 연구의 입장에서 볼때는 약간 난폭한 용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58-59)



 * 일본에서 아쿠타가와 수상작을 비롯한 순수문학들이 사회를 읽기 위한 기능으로 독자들에게 읽힌다면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흐름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폭주족의 현실을 그린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나 장애인․아동 성범죄 문제를 다룬 공지영의 [도가니], 현대 사회의 어머니라는 존재와 가족을 다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등 국내 소설들 역시 오락이 아니라 사회를 읽기 위한 교양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띄고 있다. 물론 다른 가능성을 찾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는 문장처럼, 천명관의 [고래]나 김언수의 [캐비닛], 박민규의 소설들 등 반사실주의, 환상성,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소설들도 얼마든지 있고, 한유주, 김태용 작가처럼 소설에서 서사성을 해체하거나 흩트리면서 언어 실험에 집중하는 문학적인 실험 소설도 있다. 한편으로는 ‘소박한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들도 존재한다. 이렇듯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으면서 구절마다 일본만이 아니라 국내에도 약간은 대입시키면서 읽을 부분들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물론 일대일로 대입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한국의 실정 역시 다각도로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현실에 나타난 새로운 문학이 독해법은?

 저자는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확대되는 한편, 문학과 현실의 연결을 1980년대보다도 훨씬 강하게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학이 현실을 묘사하기를 기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라이트노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현실’을 건드리는 ‘새로운 문학’으로 라이트노벨을 독해하는 비평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로 나카마타 아키오 같은 평론가를 들고 있다. 나카마타 아키오는 라이트노벨에서 ‘굳세디굳센 언어’의 가능성을 보고 있으며, 라이트노벨을 서브컬처보다는 오히려 팝 문학의 흐름 속에 위치시킨다고 한다. 이로써 라이트노벨이 캐릭터 소설로서의 가능성은 없고 오히려 새로운 현실은 그리는 새로운 자연주의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가능성에 맞춘 독해를 ‘라이트노벨의 자연주의적 독해’라고 부르자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 젊은 세대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고유명이 깊숙이 침입해 있으며 ‘만화적’이고 ‘애니메이션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 ‘새로운 현실’을 묘사하려면 만화적이고 애니메이션적인 표현이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이트노벨을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의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독해에 적당한 작품들도 출현하고 있으며 저자가 주목하는 작가로는 사토 유야, 다키모토 다쓰히코, 사쿠라바 가즈키의 일부 작품이 이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사유하려는 라이트노벨의 ‘문학적 가능성’은 이런 자연주의적 가능성과는 또 다른 것이라고 한다. 라이트노벨의 대두가 새로운 현실이나 새로운 문학의 출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현실을 묘사한다는 전제 그 자체에 감추어져 있는 ‘굴절’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굴절의 존재에서 역으로 캐릭터 소설의 문학적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게임적 리얼리즘

 저자는 앞에서 기존 연구사 검토를 통해 라이트노벨의 기원, 정의부터 시작해서 라이트노벨의 문학성에 대해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개념으로 짚어본다. 라이트노벨이 정체성을 밝히고, 그 특징을 규정하면서 논의를 축소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오쓰카 에이지가 검토하지 못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가령 오쓰카 에이지가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과제가 ‘캐릭터에게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의 의미를 소설이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에 있다고 기술했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의 과제는 ‘캐릭터에게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어떻게 피를 흐르게 할 것인가’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미소녀 게임’이든 ‘라이트노벨’이든 게임과 소설에서 텍스트 안에서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즈마 히로키가 명명한 ‘환경 분석’을 통해 텍스트 너머 플레이어 혹은 독자와의 영향 관계까지 독해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몇몇 라이트노벨과 미소녀 게임에서 단순히 독해할 수가 없고 메타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거나 읽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독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즐겁게 게임을 하거나 독서를 하고 만다면 이런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특별히 몇몇 게임이나 소설에서 독특한 느낌을 받았고, 그 감정이 정체나 이 게임이나 소설들에서 공통적인 구조를 읽어내고 싶다면 바로 이 새로운 게임적 리얼리즘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에 메타픽션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서 많이 쓰였고, 연구도 상당 수 되었으나, 여기서 말하는 메타적인 요소는 문학에서 나온 메타픽션과는 다르다. 그야 말로 소설에 대한 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나 플레이어의 존재를 작품 안에서도 인지하고, 계속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리얼리즘이고, 기존 독해 방식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게임적 리얼리즘은 미소녀 게임에서든 라이트노벨에서든 대세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분석한 [올 유 니드 이즈 킬] 같은 경우는 완성도가 있고, 그 구조의 특성상 비평가가 분석하기에 최적이 작품이기 때문에 선정되었으나, 역시 이러한 작품군이 많은 것은 아니다.(구성이 특이하거나 차별화된 요소가 많은 작품일수록 문학 연구가 집중된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작품들이 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지,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이 책은 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분석하거나 언급되는 책이나 게임들은 대부분 매니아들에게 작품성이 좋다고 인정받았으며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작품들뿐이다. 그만큼 비평할 가치가 있고, 분석하기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독해가 시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시도일 수 있으나, 작품을 읽고 난 뒤 비평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읽은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이러한 시도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나 독자가 알 수 없었던 제 3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고, 이를 받아들이거나 수정하거나,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인 것이다.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분석 도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작품을 일회성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곱씹어 보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장난감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며

 라이트노벨과 미소녀 게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접근한 책이며, 논리정연하고 흥미로운 구절이 많은 책이다. 한편, 모든 문학 연구가 그렇듯이 비약이나 근거가 약한 부분도 엄연히 존재하며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연구들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이런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반박하거나 새로운 길을 제시할 여지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논의를 제시하는 글을 시발점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가 쌓여서 다양한 문학사와 문학 비평 방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가령, 저자는 1980년대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2000년대의 마이조 오타로를 잇는 연속성을 도출하여 ‘완전히 새로운 일본 문학사’를 구체적으로 쓰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이를 더 전부터 잡거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외하는 다른 축을 통해 문학사를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전통적인 문학평론이 지금까지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던 우화적이고 환상적이고 메타 이야기적인 실존 문학의 계보가 쓰일 수도 있겠으나, 그 계보는 결국 상당히 매니악한 계보에 머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결국 대중친화적이지 않으며, 대세를 이루고 있는 라이트노벨 분석을 논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게임적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작품군은 완성도와 별개로 어디까지나 소수이고, 이러한 환경 분석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작품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비평이 대중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이론들이 특정한 작품군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소수의 작품들이 가치를 분석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책은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특정 작품군을 하나로 묶어서 구조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라이트노벨이나 미소녀 게임의 비평을 시도하고 싶은 독자나,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를 하고 싶은 평론가들에게는 이 책은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혹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 일반적인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라이트노벨의 문학성을 타진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에 맞춰 작품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개념을 만들면서 작품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라이트노벨 붐이 일면서 단순한 작품 소개가 아니라 전문적인 비평을 읽고 싶은 독자층도 소수나마 나타나고 있다. 늦게나마 소개된 이 책이 황무지에 내딛은 첫 발자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향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한 걸음만 내딛으면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책이다. 언젠가는 황무지에 무수한 발자국이 찍혀 수십 갈래의 길이 생길 날이 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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