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말 문학 걸작선 2
제리 올션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최후의 심판 _ 제리 올션
1권보다 2권이 더 재미있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2권의 첫 번째 실렸으며, 시작을 여는 단편으로 나쁘지 않다. 발상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다 읽고 나서도 발상은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다. 그야말로 SF와 종교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결합시킨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강렬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발상은 이렇다. 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지구에 일어났다. 그런데 우주에 나가 있었던 우주인들은 그 최후의 심판, 휴거에 속하지 않았다는데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발상만으로도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구에 돌아 왔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남아있는 신문지상에는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휴거가 일어났다는 정황 증거뿐이다. 과연 이 우주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텅 비어버린 지구에 남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포칼립스 소설로도 어울리며, 종교적 관점으로도 SF적인 관점으로도 여러모로 상상해볼 여지가 많은 이야기였다. 발상만으로도 이미 완벽한 단편이었다.
음소거 _ 진 울프
종말 이후, 세상에 남겨진 남매의 이야기다. 버스 운전사가 남매를 아빠의 집이라고 내려준다. 버스는 가버리고 남매는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저택 안에는 TV가 있지만 음소거 상태라 말은 들리지 않는다. 리모컨은 보이지 않아 음소거를 풀 수 없다. 이미지가 강한 소설이고, 서사보다는 남매가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하고 집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는 일련의 과정들을 연극적인 분위기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구석이 존재하나 끝까지 읽으면서 그 형성된 분위기를 즐길 여지가 있다.
마비 _ 낸시 크레스
국내에 많은 글이 소개되지는 않았으나 잡지 『판타스틱』에 개제되었던 「스페인의 거지들」로 많은 호평을 받은 작가의 단편이다. 「스페인의 거지들」은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낸시 크레스 특유의 장점들이 잘 녹아있는 글이다. 발상이나 설정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없으나, 차분한 이야기 전개와 상황 설명 등은 바로 앞의 「음소거」를 비롯해 1권에 실린 다수의 이미지 소설들에 비해 선명하게 상황을 그려내어 독자를 편안하게 만든다. 불친절한 소설들이 많은 『종말 문학 걸작선』 단편들 중에서 이렇게 친절한 단편들이 나오면 반가운 것이다. 「마비」는 설정도 매우 이해하기 쉬울 정도인데 신체를 손상시키는 전염병을 걸린 사람들이 모인 마을의 이야기다. 곧장 나병촌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병이 서사를 따라가면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나중에는 세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다다르면 소설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강한 흡인력과 재미를 준다.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 _ 엘리자베스 베어
핵으로 종말을 맞은 세상. 한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의료품을 배달하는 이야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 적절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서사가 단순한데 비해 길에서 악마가 나타나서 막기 때문에 이미지가 선명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인상에 꽤 남는 편이고 재미있게 읽었다. 초반에 여자에게 의뢰를 맡긴 이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악마를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악마와 마주친 여자의 선택이 이 소설의 끝을 장식한다. 서양에서는 악마가 동양의 귀신들처럼 친숙하고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일지는 모르나, 개인적으로는 악마라는 소재가 친숙하지는 않다. 이건 마치 스티븐 킹이 오 헨리 문학상을 탄 「검은 정장의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데, 악마와 마주친 이야기를 회고조로 하고 있어 마치 미국 설화를 듣는 기분이었다면, 이 글에서는 미래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마주침을 그리고 있어 기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말과 소리 _ 옥타비아 E. 버틀러
올해 『야생종』으로 국내 SF 독자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은 옥타비아 E. 버틀러의 단편이다. 종말 이후에 말이나 글자가 과연 의미를 가질까. 이 소설은 다른 소설들이 다루지 않은 관점에서 이야기를 차분히 전개해나가며 연이은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주인공인 여자가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떤 인연을 만들어나가는지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진입장벽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상당히 몰입해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들고 점점 재미있다. 단편으로서 완성도도 뛰어나고 서사가 강렬하다.
킬러 _ 캐럴 앰슈윌러
이라크 전쟁이 자국 땅에서 벌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발상으로 시작한 소설이다. 전쟁 속 한 여인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여자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데, 전쟁터로 떠난 오빠를 찾고 있다. 그러던 중에 사람들을 죽이는 상처입은 적군이 집안으로 피신해 온다. 오빠를 연상케하며 또 남자를 원한 주인공은 그를 마을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나 심리묘사에 집중한 소설로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가 커지고 결말이 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지니 스위트힙스의 비행 서커스 _ 닐 바렛 주니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고 한 서커스 일행이 황무지를 질주한다. 섹스와 타코, 위험한 약을 파는 지니 스위트힙스. 그녀의 동료는 운전사이자 호객꾼인 델, 사격이 뛰어난 경호원 포섬 다크이다. 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며 돈을 버는지 비밀이 밝혀지면서 점점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설정과 인물들이 흥미로운 소설이다.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의 종말 _ 데일 베일리
앞의 단편들이 모두 1권의 아쉬움을 털어줄 만큼 재미있고 잘 읽혔다면, 이후 마지막 세 편은 조금 아쉬운 단편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의 종말』의 경우, 종말을 맞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곁가지로 역사 속 다양한 종말의 상황들을 병행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게 밀접하게 잘 녹아있다는 느낌보다는 지루하고 붕뜬 느낌을 받았다. 서사가 흥미롭지도,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도 아니었다. 따라서 겨우 읽어내려간 글이었다.
황혼의 노래 _ 데이비드 그리가
종말 이후에 살아남은 예술가는 어떻게 견딜까. 흥미로운 발상의 단편이었지만, 이야기는 생각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 상황 설명이 불친절하여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고, 벌어지는 사건은 소소하고 내면 묘사에 집중하여 재미가 덜하다.
에피소드 7: 보라꽃 왕국의 패거리를 향한 마지막 저항 _ 존 랭건
마지막에 실린 단편이지만, 가장 잘 안 읽히는 글이었다. 앞의 단편들이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음에도 이 단편으로 인해 책 전체의 인상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설명이 불친절하고 몰입도가 떨어진다. 문단이 거의 나누어져 있지 않아 가독성이 떨어지며, 내면 묘사가 잘 와 닿지 않아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플롯이 뛰어나거나 인물이 매력적이지도 않고, 배경 세계관이 흥미를 유발시키지도 않는 글이라 읽기가 힘들었다.
리뷰를 마치며
전체적으로 『종말 문학 걸작선』은 1권보다 2권이 더 읽기 편하고 재미있었다. 약간 더 잘 읽힌다고 할까. 혹, 1권만 읽고 실망한 사람이라면 2권을 읽으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단편들은 조금 잘 안 읽혔지만 앞부분에 흥미롭게 읽은 단편들이 있었다. 1, 2권을 통틀어서 마음에 든 단편들을 열거해 보자면 1권에서는 「폭력의 종말」,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 「절망은 없다」, 「아티의 천사들」 이고, 2권에서는 「최후의 심판」, 「마비」, 「말과 소리」, 「킬러」, 「지니 스위트힙스의 비행 서커스」이다.
종말 소설들을 모았기 때문에 SF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다. SF 단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SF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종말의 양상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삶을 그려낸 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22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면서도 같은 식으로 전개되는 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각기 다른 방식의 종말을 맞이했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진화하고, 다른 삶을 살아갔다. 인간들은 종말 이후에도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며, 우리는 거기서 우리와 공통점을 찾는다. 다양한 상상력과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물론 종말을 다루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밝은 소설은 적었고 어둡고 답답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종말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절망이 소설에 녹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똑같은 인간이다. 인간들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며, 우리에게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면서 한편으로는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단편들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테마로 엮인 SF 단편집이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