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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인의 귀향 ㅣ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집행인의 귀향』은 국내에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신들의 사회』 등으로 유명한 SF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편도 장편도 아닌 중편이다. 이렇게 중편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중편인 만큼 페이지 수도 해설까지 포함해서 158쪽 밖에 되지 않는다. 가격은 7천 7백원. 그렇다면 사는데 주저함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다. 오히려 줄어드는 페이지 수가 안타까울 뿐이다. 중편임에도 불구하고 글의 밀도와 무게감은 웬만한 장편소설을 상회한다.
에스프레소 노벨라. 북스피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중단편 전집의 이름이다.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가볍게 중편을 접할 수 있다. 양이 적은 대신 진하고 강렬한 향기를 담은 에스프레소 같은 중편들을 모았다는 의미를 지녔다. 아직 본격적으로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이제 막 0호가 출간되었을 뿐이다. 이후 관심 있는 작가나 작품들을 따로 모으면 한 가지 색들로 구별되는 등, 전집이 쌓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와 전집을 모으는 재미가 동시에 생길 것이라고 한다.
중편 분량의 소설 전집으로 장르에 처음 진입하려는 독자들에게 안내서 역할을 하는 전집. 멋진 기획이다. 보통 SF나 추리에 관심이 있어도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독자들이 많다. 그렇기에 이런 중단편 전집은 참신하고 적절하게 보인다. 분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편하게 책을 펼칠 수 있다.
흔히 국내에서는 문고본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몇 번 시도되었던 적이 있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된 문고본이 자리를 잡은 경우를 찾기 힘들다. 특히 장르소설 문고본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출범은 반가운 한편, 우려도 드는 게 사실이다. 문고본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이겨내야 할뿐만 아니라, 판매량의 한계가 있는 장르소설 전집의 한계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 시도인 『집행인의 귀향』은 과연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까.
외형은 깔끔한 디자인이 먼저 눈에 띈다. 통일된 노란 빛깔의 색에 외국의 거리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시집 같은 판형의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읽기에 좋아 보인다. 큰 주머니에도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다. 중편이라는 분량의 장점을 잘 살린 판형이다. 가격은 6천원대라면 적절했을 듯한 생각이 들지만, 번역서라는 것과 디자인 등에 신경을 썼다는 점. 또 문고본이라고 해도 문고본의 특징인 박리다매가 장르소설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원자재 값은 계속 오를 테고, 이후 나오는 책들도 비슷한 가격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낮은 가격을 책정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처음의 가격을 유지하는 것과 중간에 가격을 올리는 것은 또한 느낌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가격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다. 내용 때문에 가격이 아깝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정도다. 이 중편은 네뷸러상과 휴고 상 최우수 중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그만큼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재미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훌륭한 SF 중편이라는 소리다.
원래 이 『집행인의 귀향』은 단독적인 작품이 아니다. 세 편의 연작 중편으로 이루어진 로저 젤라즈니의 중기 걸작 『내 이름은 레기온』의 마지막에 실린 중편이다. 이 마지막에 실린 중편이 바로 네뷸러상과 휴고 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별다른 배경 설명이 없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다. 작가가 그만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작품 내에서 세계관을 잘 소화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차츰 세계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공에게 한 가지 의뢰가 들어온다. 외행성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사라진 인공지능 로봇 행맨이 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맨을 설계했던 네 사람 중 한 명이 살해됐다. 설계자 중 한 명은 행맨이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맡게 된 것이 주인공이다. 초반에 이 도입부에서는 마치 필립 K. 딕 원작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 책은 이야기의 전개나 결말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젤라즈니 특유의 화려한 수식이 들어간 현란한 문체로 미스터리 스릴러가 펼쳐진다. 기존의 로저 젤라즈니 작품들과는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여기에 행맨의 의도에 대한 미스터리와 ‘죄의식’에 대한 주제의식이 소설을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사소한 일이든 중대한 일이든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이 행동의 근간이 되는가 하면, 죄의식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로봇 행맨은 그 죄의식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인간처럼 죄의식에 얽매이게 될까. 아니면 죄의식을 초월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죄의식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한 번 펼치면 끝까지 궁금해서 읽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책이다. 탄탄한 과학 설정 아래, 치밀한 구성, 묵직한 주제의식 아래 SF와 추리 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평소 로저 젤라즈니의 팬은 물론이고,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목적에 부합하는 장르에 진입하려는 독자들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로저 젤라즈니라는 유명한 SF 작가를 접하는데 좋은 책이다. 중편이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전개와 충분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장르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라도,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영화 한 편 보는 값으로, 영화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근미래 미스터리 스릴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때로 선택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책은 실패할 걱정을 덜어도 좋다. 이미 많은 상을 수상하고,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재미있는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앞으로도 에스프레소 노벨라가 안정적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수 십 권의 SF, 추리 등 장르 소설 중편들이 책으로 소개가 되고, 또 많은 독자들이 장르를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