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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18> 오독(誤讀)을 부르는 이름, 김태용 [중앙일보 - 2007.11.27]
# 사례 1: 이는, 비견(裨見)에는, 판켄드리야의, ‘白 Albedo’에로의 상승이었기보다는, ‘黑 Nigredo’에로의 하강으로 이해되어지는데, ‘몸의 우주’에로의 귀락(歸落)이 거기 있었던 듯하다. -박상륭의 『소설법』
# 사례 2: 나는 기침하느라 구급차(救急茶)를 부를 틈이 없었던 장애를 극복하고 ‘바라건대 진짜 물을 빨리…….’라는 간곡한 의사를 밝혔다. … (표정에서도 충분히 소리가 연출된다; 음성화될 광의의 몸짓이기도 하다). - 김록의 『악담』
위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해석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개인만의 언어(이게 맞는 말인가?)와 문법에 따라 문장이 엮인다. 시에서야 이런 경우를 종종 보지만, 앞선 예는 소설 문장이란 점에서 난감하다.
그렇다면 둘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박상륭은, 본인이야 한사코 손사래 치지만, 한국문학이 공인하는 가장 난해한 소설가다. 극소수 평론가만이 그의 소설에 평을 얹는데, 철학적 신념의 차원에서 겨우 해석을 시도한다. 반면 김록은 언어 자체에 대한 예의 다른 감각의 소유자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김록 역시 당대 비평이 꺼리는 작가다. 여하튼 이들은, 문학터치가 근자에 읽었던 한국소설 중에서 ‘독해불가’ 도장을 찍었던 두 사례다.
이제 그 사례가 하나 더 늘었다. 김태용(33·사진)의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는 드러내놓고 오독의 위험을 경고한다. 오죽하면 ‘작가의 말’에 “오독의 과정이 곧 글쓰기라고 말한다면 다시 그대들은 오독을 하고 말 것이다”라고 썼을까. 우선 다음의 구절을 보자.
“아이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으며 좋아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정말 좋아 미쳐버리게 만들 작정으로 그녀에게 이불을 든 채로 일어나라고 했다. … 아이는 좋아 미치겠다는 표정으로는 설명이 안 될 만큼 좋아 죽겠다고 환호를 냈다.”(49쪽)
영어의 ‘펀(Pun)’이 연상되는 말장난이다. 김록에게서 봤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전술과 유사하다. 그러나 김태용의 수법은 보다 치밀하다. 돼지와의 대화를 굳이 서술한 장면에서 비로소 작가의 의도를 짐작한다.
“대화의 끝에서 나는 말했다. 퀠퀠 퀠퀠 퀠퀠퀠 퀠퀠퀠 퀠퀠퀠퀠(내가 먼저 죽거든 돼지랑 이야기해). 그녀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퀠.”(42쪽)
작가는, 우리가 의미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언어가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를 시종 묻는다. ‘퀠’이란 정체불명의 의성어만으로도 모든 의사가 소통되는 까닭이 예 있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비슷한 구절을 수시로 부린다.
“언어의 도움을 빌려 나는 이런저런 외형을 가진 이런저런 인간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다. 다만 언어가 발화되기 이전, 문자화되기 이전의 나만 알아볼 수 있다.”(232쪽)
소설은 매우 전략적이다. 박상륭이나 김록처럼 독자의 접근을 애초부터 차단하지는 않는다. 김태용의 소설은 그나마 줄거리가 요약된다. 하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애써 압축했다 해도, 앞뒤 내용이 들어맞지 않는다.
대신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지 같은 게 있다. 아비로 상징되는 근원에 대한 부정, 비가 내리지 않는 불모의 땅,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불임의 남성에게서 찾아낸 ‘아니 불(不)’자다. 하나 이마저도 부질없는 짓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오독은 이미 시작됐으므로.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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