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달리 제주도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맑은 날이 계속 이어졌다. 구름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 바다의 빛은 햇살의 각도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어갔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둔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53쪽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쓰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예컨대 기호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너는 중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추리소설에 대해서도 잘 아니 중세를 다루는 추리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여자친구들의, 삼단논법에 가까운 권유에 혹해서 거의 쉰 살이 가까워 『장미의 이름』을 썼다. 이건 좋은 여자친구를 뒀을 때 가능한 얘기니까, 쉰 살이 가까워지더라도 여자친구는, 그것도 최소한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여자친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56~57쪽
나는 운명도, 운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오직 내 몸과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글을 쓸 수 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절, 바리케이드 안쪽에 씌어진 여러 낙서 중에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문학을 하는 이유로도, 살아가거나 사랑하는 이유로도.-68~69쪽
내가 황영조 마을까지 가서 본 것은 결국 내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백 같은 시인이 될 수 있고 황영조 같은 운동선수도 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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