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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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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소설은 자유롭다

  박형서의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은 소설의 형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소설은 언제나 개연성을 가진 이야기여만 하는가?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소설은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해왔고, 그 어떤 장르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소설은 편지, 신문기사, 인터뷰, 보고서 등등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다. 가령, 이기호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보자면 이런 형식 실험이 상당히 많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랩 형식으로 쓴 「버니」라든가, 성경 형식으로 소설을 써내려 간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든가.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은 단지 형식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내용이나 구성에서도 기존 소설과 차별화된다. 도무지 개연성을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이것은 소설이라는 꽉 짜여진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이다.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혹은 친구가 친구에게 해주는 기발하고도 신기한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기묘한 이야기, 8개의 단편

  논쟁이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이는 현교수와 나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논쟁의 기술」, 11쪽

 

  첫 번째로 실린 「논쟁의 기술」은 마치 사이버 상에 리플로 벌어지는 쓸데없는 논쟁을 소설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사람들은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 백 개의 리플을 달며 싸움을 벌이곤 한다. 이 소설은 이것을 두 교수가 지적인 듯한 대결로 진지하게 묘사하면서 오히려 풍자적인 웃음을 주고 있다. 자기 영역으로의 초대, 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 돌리기와 문단법,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기, 정신없이 들이대기,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몰아세우기, 괴상한 어법, 딴청 부리기, 막나가기, 서둘러 결론 내리기, 마지막 수단. 이런 소제목들을 붙여놓고 두 교수의 논쟁이 진행되는데 굉장히 유머스러운 글이다. 작가의 말에서 「논쟁의 기술」은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를 밝히고 집필에서 1차 퇴고까지의 과정을 실시간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미리 이야기를 알고 읽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런 예비지식 없이 읽은 나로서는 굉장히 유쾌하게 읽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일과는 상관없이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할 미래는 170년 후, 그러니까 제정신인 사람들은 모두 태양계 밖으로 빠져나가고 지구는 방사능과 바퀴벌레와 프리메이슨의 소굴이 된 서기 2175년도다. 인류는 지구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고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맹렬한 속도로 우주를 더럽히는 중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그들의 행태를 볼 수 있지만 그들의 과학을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학은 언제나 극소수만을 위한 예술인 법이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날개」, 53-54쪽

 

  「날개」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화자의 이야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SF 요소가 들어있는 재미있는 글이다. 화자는 누구라도 원한다면 어느 장소든 어느 시대든 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미래는 어둡거나 밝기 보다는 우스꽝스럽다. 지금 현재의 모습을 비틀어놓은 것만 같다. 그 속에 살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는 처량하고 슬프다. 미래를 볼 수 있는 화자는 이야기만 전달할 뿐이고, 이야기의 실질적 주인공은 미래에서 사는 여자다. 이성과 감성의 대립적인 면도 엿보이고 무엇보다도 애틋한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솜씨가 일품이기도 하다. 이 단편집에서 인상적인 단편 중 하나다.

  실제로 그런 지옥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내전 중인 국가답게 망자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그들은 구덩이를 피하지 못하고, 혹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굴러 떨어져 자전거와 함께 나뒹굴었다. 그 위로 새로운 망자들이 끊임없이 쌓여갔다. 밤이건 낮이건 구덩이 안쪽에는 겹겹이 포개진 자전거와 무표정한 망자들이 구더기처럼 꾸물거렸다. 그건 너무 끔찍한 광경이라 누구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노란 육교」, 95-96쪽

 

  노란 육교의 소재는 죽음이다. 만약, 죽은 망령들이 가는 길이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면? 그 독특한 상상력은 노란 육교로 형상화 된다. 측량 기사 셋이 처음 발견한 길은 망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길이 발견되고 처음 발견된 춘천에서는 구경꾼들이 자전거 행렬을 방해되지 않도록 육교를 설치했다. 게다가 눈에 띄지 않도록 노란색으로 칠해놓기까지 했다. 이후, 이 ‘노란 육교’의 변천사가 펼쳐진다. 이런 길이 나타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대처하는 자세를 보여주며 작가는 자신만의 놀라운 상상력을 선보인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풍자하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했다.

  선명한 피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면서 아이는 맑고 깊은 호수 속으로 몸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듯한 섬망(譫妄)에 빠졌다. 전율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만히 눈이 감겼으며, 부신수질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현관이 수축되었고 빨라진 심장박동은 교감신경계를 흥분시켜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떨리도록 만들었다. 곧 어머니가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한 뼘이나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한쪽 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자신의 자궁에서 나와 이제 홀로 호흡하고 있는 작고 어린 생명의 맥박을 탐색했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물속의 아이」, 114쪽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 오로지 엄마의 관심만 받으면 행복한 한 아이의 섬뜩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단순하면서도 불안한 아이의 심리가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핏빛 이미지가 강렬해서 강한 충격을 준다고 할까? 아이의 행동은 실제 일어나기 힘든 극적인 것이나, 공감 가는 심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들킴의 욕망과,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감의 대비가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1. 숨겨진, 그리고 발각된 키워드로서의 ‘달걀’ 

  텍스트에서 총 스물한 번, 인물들간의 대화에서만도 일곱 번이나 나오는 ‘달걀’은 소설의 내부로 들어가는 열쇠다. 물론 작가가 마련해놓은 정교한 제반 장치들에 의해 달걀이 가진 키워드로서의 성격은 가려진다. 최초로 진술되는 ‘달걀’은 주어진 환경을 설명하는 도입부에 위치한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95-96쪽

 

  이 『자정의 픽션』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이 아닐까 싶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제목만 봐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단편은, 논문 형식으로 쓰여 있다. 극단으로 치달은 논문 형식의 패러디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재치 있는 논리 전개 방식으로 음란 소설로 규정하는 본문 내용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어 준다. 기대가 많았던 탓인지 광고 문구처럼 개콘보다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작가의 입담에 감탄 할만은 했다.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논문이 일말의 설득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지 않은가. 작가의 극단성이 빛을 발하는 단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어수선한 거실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예민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정리되지 않은 곳에 오래 있으면 왼쪽 겨드랑이의 임파선이 부어버린다. 예를 들어 책은 책꽂이에 있어야 한다. 책이 책꽂이에 있지 않고 침대나 바닥에 놓여 있다면 그건 책꽂이를 얄밉게 조롱하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오랑우탄이 정글에 있지 않고 YMCA에 있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 박형서, 『자정의 픽션』,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 169쪽

 

  가장 긴 제목을 달고 있지만, 가장 짧은 분량의 단편인 것 같다. 내용이 짧은 만큼, 쉽게 읽고 내용도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서사가 없고 화자의 내면만 비추다가 끝나기 때문이다. 소품으로 읽혔다고 할까? 뒤에 작가가 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쓴 것이고 동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집필할 때 생각한 호기심만 떠오른다고 밝히고 있다. 딱 그 의문대로만 읽히는 짧은 글이다.

  아니, 아프지 않을 거야, 라고 경감이 달래주었다. “진실은 다정하니까. 진실만 있으면 누구도 아프지 않아.” 경감은 사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꼬마야, 너는 몹시 귀엽고 착해서 이 어두운 곳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니 어서 진실을 고백하고 여기서 나가도록 해. 너는 영리해서 진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 박형서, 『자정의 픽션』, 「진실의 방으로」, 194쪽

 


  진실의 방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집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 중 하나인 「진실의 방으로」는 취조실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도 밝혔듯이 ‘낯설게 하기’ 수법을 사용하여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음울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답답한 방에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인디언이라면……” 깜짝 놀란 당직 장교가 대답했다.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 지대에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다가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로 삶의 터전인 초원 지대가 황폐해지자 지금으로부터 약 삼만 년 전에 북미대륙으로 이동하여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머리에 깃털을 꽂고 야호야호 신나게 사냥과 수렵을 하던 몽골로이드 계통의 그 아메리카 인디언이란 말씀이십니까?” 
  ― 박형서, 『자정의 픽션』, 「두유전쟁」, 235쪽

 

  이건 개콘보다 웃겼다.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가지고, 만만치 않은 분량에 기대했던 단편이었다. 만약 이 소설집이 「진실의 방으로」를 끝으로 그냥 페이지가 끝났다면 큰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유전쟁」이 마지막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만족하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물론 전체적으로 소설집 분량이 적긴 적은 듯한 느낌이지만) 간이 나쁘면 머릿기름도 많아진다는 의학 상식을 입수한 후 엄청난 두려움 속에서 적었다고 하는 이 「두유전쟁」은 풍자와 해악이 살아있는 소설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공식 같은 장면들의 연출이나 통쾌하게 터져주는 전개들이 빠르게 읽히면서도 폭소가 터지게 만든다.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는 점에서 불쾌한 느낌도 들어 국산 극장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의 느낌도 떠오르게 만들었는데, 아무튼 간에 어떤 우스꽝스러운 판타스틱 망상들의 폭주가 재미있었다.

  자정의 픽션, 자정 너머의 픽션을 기대하며

  기대한 것보다 더 나아간 것도 있었고, 기대보다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좋은 작가 하나를 얻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박민규가 문단에 독특한 충격을 주었다면, 박형서의 상상력과 이야기는 더욱 파격적으로 막나간다. 책 뒤에 실린 해설도 마음에 들었는데, 단편들을 어떤 알레고리의 해석으로 읽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박형서 작가가 하고 싶은 것은 온갖 해프닝들의 비위계적 유쾌함 그 자체가 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단편들을 다 읽고 나서 거기에 공감이 갔다. 이야기들은 한마디로 신나는 꿈을 꾼 뒤에 막 집필한 것 같은 개연성 없고 상상력 풍부한 그리고 통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실제로 장르문학잡지 『판타스틱』6월호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노란육교」같은 작품은 꿈을 꾸다가 자다 깨서 바로 타이핑 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안정적인 구조 안에서 정교하게 짜여진 소설들만 읽다가 이런 탁 트인 소설을 읽으니 해방감마저 드는 기분이었다. 월간『판타스틱』6월호에 실린 「냄새가 나요」, 「가족의 기원」도 인상적이었지만, 소설집을 읽고 나서 제대로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판타스틱』에 나온 인터뷰에서 보면 작가는 7월 말쯤부터 홍콩 근처의 주하이에서 1년 동안 살 계획이라고 한다. 월급은 적게 받지만 주하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했고, 거기서 장편을 쓸 생각이라고 한다. 이제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작가의 장편이 무척 기대가 된다. 박민규는 문학동네 여름호에서 한국문학은 아직 사작도 안 했고, 앞으로 더욱 진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를 말한다는 자정. 이 자정의 픽션은 진화의 한 증후가 아닐까? 자유로운 상상력이 소설의 낡은 틀을 벗어버리고 날개로 돋아나고 있다. 얕은 꿈을 꾸거나 잠을 이루지 못하게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자정의 시간에 한국 문학은 천천히 날개를 펴고 있다.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며. 
  난, 3년이 걸리든 5년이 걸리든 이 작가에게 패를 걸고 싶다. 이 작가라면 새로 돋는 날개에 힘을 불어넣고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침으로 향하는 날개짓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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