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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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탁구를 쳐본 적이 있다. 물론 충분하게 쳐봤다는 건 아니다. 한 시간도 채 안 될 정도다. 제대로 자세를 배우고 기술을 익힐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탁구는 뭔가 매력적인 스포츠임에는 틀림없다. 그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복잡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 즉,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쉬워 보인다. 쉽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자기도 선수처럼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하지만 막상 시도해 보면 공을 제대로 주고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드민턴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어려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몸은 덜 움직이는데도!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게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막상 자신이 직접 글을 쓰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따라 쓰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글을 창조해 낸다는 것은 더욱이 어렵다. 핑! 퐁! 선수들의 랠리는 보기에 즐겁지만 그들은 그 몇 시간을 위해 수천 시간을 연습했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쓰인 듯한 독특한 문체가 특징인 박민규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민규의 장편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앞의 두 작품은 소외된 - 혹은 『핑퐁』의 본문을 상기하자면 배제된 -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웃음이 묻어나는 글들이었다. 야구 다음에는 탁구일까? 이번에는 또 어떤 인물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막상 펼쳐진 세계의 이야기는 그렇게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다들 잘 하고 있습니까?


  소설 속에서 작가는 계속 되묻고 있다. 다들 잘 하고 있는 거냐고. 『핑퐁』은 일단 우주와 인류가 중심인 소설이다.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소재가 중심인 것이다. 일상에서도 인류라는 말은 낯선 편이 아닌가.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인류’라는 단어가 마치 친구처럼 불린다. 생각해 보니, 인류는 매우 친한 녀석인데, 아주 나쁜 녀석이다. 왜 사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공간만 축내고 있다. 게다가 살인까지 쉬지 않고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살 가치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녀석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못과 모아이는 세계가 깜빡한 존재들이다. 세계가 깜빡하다니. 그런 일이 실제로 곳곳에서 벌이지는 것이다. 중학교에서 왕따란 이제 흔한 사회 현상이 되었다. 옛 고대 석상을 닮은 모아이와 두개골까지 금이 간적이 있는 못. 별다른 이유 없이 치수라는 아이에게 찍혀서 반에서 따를 당하고 매일 폭력에 시달린다. 돈을 바치고 심부름을 한다. 삶은 폭력적이고 또한 지루하며 비루하다. 그저 어떻게든 살아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세계를 언인스톨하냐, 마냐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들의 결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결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은 계속 이 세계를 질린 듯이 묘사한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세계라는 듯이. 학살과 봉사가 연이어 세계의 듀스 포인트를 만들고 있지만, 그것뿐이다. 단지 그렇게 버텨나가는 것만이 다인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생존이 아니라 잔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살아있다는 것.

  소설의 스케일은 작으면서도 크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두 왕따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소설이 계속 말하는 것은 인류의 운명이다. 그 둘은 세계가 깜빡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대표이다. 또 다른 인류의 대표는 과로사했다. 그만큼 인류는 바쁘게 맹목적으로 살아왔다. 주어진 대로 교육받고 오로지 교육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두 동물이 인류의 대표였던 것은, 인류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적을 가지지 못한다. 삶의 목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인간은 무의미한, 혹은 무가치한 학살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사를 통틀어 전쟁이 없는 기간은 한 달도 되지 못한 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류의 존재가치란 정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탁구를 통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었지만, 미국 드라마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사일런이라는 인류가 만든 로봇이 인류를 언인스톨한다. 그 드라마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지금 인류는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냐고. 국경과 인종을 넘어 소설가든 드라마 작가든 똑같은 질문을 작품 속에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그 동안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반복된 영원한 테마일지도 모른다. 다들 잘 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당당하게 무언가를 답할 수 있을까?

  답은 쉽게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자세를 우주 너머로 보낼 뿐이다. 언젠가 답이 올 것이다. 리씨브가 올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이 못내 궁금하지만, 조급한 마음을 가지려 하진 않는다. 무슨 일이든 쉽게 되는 것은 없다. 라켓을 쥐고, 하나하나 자세를 익혀야 하는 탁구처럼 말이다.


  안심해


  『핑퐁』은 굉장히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인류의 운명이라니. 게다가 인류는 학살을 저지르는 종이며 어디까지나 잔존해 왔다. 사실 가망이 없다. 그걸 세계가 깜빡한 두 중학생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세계 인식이 불편하기 보다는 너무나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술술 읽히는 것이다. 그래, 맞아. 이 세계, 인류는, 더 이상은 안 돼. 사람보다 낙지가 불쌍하다고 중얼거리는 못의 말이 공감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죽은 남자가, 갇힌 여자가 불쌍하지 않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떨어져 버리고 갇힌 여자에게 비명을 들은 낙지가 불쌍한 것이다. 철저한 인류 불신.

  그렇지만, 항상 세계는 폭력 속에 있고, 학살을 자행하는 인류가 지구를 점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생존해야 하는 이유도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생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듀스 포인트를 만들 수 있는, 인류의 죄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핑퐁』은 분량이 짧은 편이다. 만약 소설 속에서 모아이가 존 메이슨의 소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분량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편 정도로도 충분히 스토리는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존 메이슨의 소설들이 없었다면 『핑퐁』은 작품의 힘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작품을 진행하는데 내용과 결말이 없어 보이는 존 메이슨의 소설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마치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가 현실과 기묘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작품의 재미 면에서도 필자는 존 메이슨의 소설 이야기에 깊게 빨려 들어갔다. 항상 마지막에 어이없는 결말은, 진지한 이야기들을 조롱하는 듯한 부조리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핑퐁의 결말 역시 존 메이슨의 소설 결말과 비슷하다. 그들은 언인스톨을 선택했고, 서로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헤어진다. 그걸로 그냥 끝이 난다. 무거운 선택, 그 때문에 독자의 마음은 무거워지지만 소설은 더 이상의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것이다. 그저 무책임하게 중학생인 두 소년에게 세계의 운명을 맡기고 또 그들은 세계를 언인스톨 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에서 우리들, 인류는 멸망을 맞이했다. 맞이하고 있거나. 혹은 지금 우리 인류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이미 두 명의 중학생이 세계를 언인스톨 하기로 결정했고, 그건 아주 천천히 일어날 뿐인 건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도 아직은 이유를 찾지 못하고 존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언제나 말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작가는 차례보다 앞선 페이지에서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소년들은 스푼을 구부리고, 학교를 가고, 작가는 가까운 탁구장을 찾으며 독자들에게 권유했을 지도 모른다. 탁구는 혼자 치는 게 아닙니다. 먼 우주 저편 너머의 대답을 기다리다간 늙어 죽기 십상이니, 일단 가까운 탁구장의 상대를 찾아보죠. 라는 의미는 아닐까나? 탁구를 치며 상쾌한 땀을 흘리고 누군가와 얼굴을 장시간 마주보며 서 있다. 탁구라는 스포츠의 두 번째 매력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다시 핑! 다시 퐁!


  사실 가까운 탁구장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직도 탁구장 같은 곳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치 스키너 동물들처럼 끝없는 교육과 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필자가 탁구를 칠 여유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이야기한 삼미 정신을 지킬 여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모모』에서 나온 회색인간이 다녀간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만 바꾸면 가능한데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뭐, 아무튼 모두 다 제멋대로 살려고 애쓰는 거다. 왜 사는가, 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난제일지라도 제 멋에 사는 것은 당장 실천 가능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시간이 되고, 기회가 되면 아마도 탁구를 쳐볼 것이다. 부디 이 소설 때문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핑퐁』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처음 내 기대와 어긋나버린 무겁고 진중한 내용. 우주와 인류. 우리는 왜 사는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 왜 하필 인간인가. 대답 없는 공허한 질문들. 언인스톨 해버리고 싶은 욕망. 그래도 그보다는 스푼을 구부리고 탁구를 치고 싶다. 못이 그랬던 것처럼 학살을 보지 않고 학교를 향하게 된다. 일단, 잔존이 아닌 생존을 목표로 하자. 세상은 다수결로 움직인다. 소수는 배제된다. 핑퐁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고, 탁구는 점점 소수의 몫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다수는 거짓이며 허상이다. 60억 명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60억 개의 감상이 존재할 뿐이다. 모두 다수인 척 살고 있는 세계라고 못은 말한다. 인류와 다수결 그리고 시스템을 비판하고 혐오한다. 그럼에도 외로움과 연민 그리고 따뜻함이 있다. 화자인 못의 시선에는 분명 그런 따뜻함이 있었다. 우울하고 절망적이면서도 책을 덮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된다. 쿨 앤 더 갱의 쎌러브레이션을 들으면서. 컴온, 쎌러브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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