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박은주 옮김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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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은 멋진데 난 사실 바다가 무섭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물이 너무 많아서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사람들이랑 부산 태종대에 갔었다. 거기서 절벽 밑의 바다를 봤는데, 낮인데다 햇빛이 좋은 날이라서 그랬는지 물이 하늘색이었다. 내가 '물 정말 많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비웃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바위에 누군가가 '물 정말 많다'고 새겨놓은 게 보였다. 그래서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바다는 물 덩어리인데, 난 그게 너무 큰 덩어리라서 무섭다. 특히 밤에는. 난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밤만 되면 검고 커다란, 상상도 못하게 커다란 물덩어리가 있는데 무서워서 그 옆에는 못 살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처음 읽는데,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라는 제목만 듣고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가는 아무래도 정신나간듯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내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글이 참 좋고, 어두우면서도 매혹적이다. 그런데 그 어두움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분홍빛 토끼조차도 어둡게 느껴지게 만들다니, 이 작가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인생은 이토록 어두운 것'이라며 협박을 한다.
아마노 세이지. 그의 집안은 비극적인 집안이다. 얼마전에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는 비극이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다. 마루야마의 이 작품이 고대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비극적 운명에 끝까지 순응하지 않는다는 거다.
타락한 아버지, 뒤룩뒤룩 살쪄서 지방에 눌려 죽은 엄마, 은행강도로 복역중인 형, 더우기 애인은 어느 나쁜놈의 총에 죽었다. (이 집안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건 북해도의 끝쪽 바닷가에 살아서도 아니고, 품성이 악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믿었던 장남이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집안이 망했다니, 작가가 짖궂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비극인데 세이지에게는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다. 작가는 그 기운에 청춘이라는 이름을 붙여놨다. 그 덕분에, 밤에 보는 시커먼 물덩어리만큼이나 무서울 수 있었던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주체할 수 없었던 청춘의 일기로 변모한다.
아주 무겁고 우울한데도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은 젊은이의 기운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고, 힘센 해파리와의 교감만 놓고 보면 매력있는 환타지 소설이다. 내 눈으로 보자면 무서운 물덩어리같은, 그렇지만 낮에는 하늘색으로 바뀌는 그런 소설이다.

지금은 밤이고, 소설이 마지막장을 막 덮고 난 지금의 나는 좀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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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불의 잔 1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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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자면, <드래곤볼>이 생각난다. 토리야마 아키라는 <닥터 슬럼프>와 <드래곤볼>로 유명한데, 나는 닥터 슬램프를 무지무지 좋아했었다. 상상 속에서 가능한 모든 익살을 그림으로 풀어놓는 재주가 놀라운 작가다.

초창기의 드래곤볼에는 토리야마의 재능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아주 재미있고, 웃기고, 명랑하다. 그런데 어찌된 게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고, 그림도 제 색깔을 잃어버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기를 끌다보니 출판사에서 작가에서 '질질 끌 것'을 요구했고, 결국 드래곤볼은 생명력 없이 연장방영되는 희한한 전투극이 되어버렸다. 요약하자면, '더 강한 적'의 함정에 빠진 셈이다.

주인공 손오공은 적과 싸워서 이긴다. 주인공이니까 이겨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안 되니까, 더 강한 적이 나타난다. 놀랍게도 전투력이 향상된 오공은 적과 싸워 또 이긴다. 그 다음엔 더 강한 적이 나타난다. 이렇게 강하고, 더 강하고, 또 더 강한 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불의 잔>을 보면서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솔직히 난 기다리고 기다리던 <불의 잔>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둠의 지배자 볼드모트는 드디어 육신을 얻어 부활했다. 사실 볼드모트의 부활은 1권에서 이미 나왔던 내용이다. 단지 이번에는 '뼈와 살'이 볼드모트에 더해졌을 뿐이다.

작가가 '드디어 부활했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난 이미 첫 권에서부터 볼드모트의 부활을 봤기 때문에 그다지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부활했다'기보다는 '육신을 얻어 더 막강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이제는 여학생들에게도 관심을 쏟게된 사춘기의 해리 역시 더 강해졌다. 그리고 해리는 볼드모트와 싸운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이긴다. 그러나 작가는 여운을 남긴다. 해리는 싸움에서는 일단 이겼지만-살아서 돌아왔으니까- 볼드모트를 없애지는 못했다. 왜? 5권, 6권, 그리고 7권까지 볼드모트가 나와야 하니까.

더 강한 적, 더 강해지는 주인공의 반복되는 싸움. 물론 조앤 롤링의 작가적 능력에는 높이 쳐줄 부분이 많다. 영상문법에 충실함으로써 영상세대의 어린이들을 페이퍼북으로 끌어들이는 능력도 놀랍고, 과거의 전통들을 아주 맛있게 버무리는 능력도 놀랍고, 이전의 마법동화들에 비해 탁월한 시나리오로 어른 독자들까지 책을 손에 쥐게 만드는 능력도 놀랍다.

그런데 시리즈의 중반부에 해당되는 네번째권을 읽으면서, 어쩐지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꿈이나 희망 같은 것, 동화가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그런 것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다. 물론 재미는 있다. 갈수록 기름기가 끼어가는, 스필버그의 영화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찝찝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 재미조차 전편이랑 비등비등하다는 것. 내 기대가 너무 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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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마야 막스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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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바나나에게는 안녕을 고하고 싶다.

바나나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가볍다'는 생각과 달리, 나에게 바나나의 작품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처와 치유라는 주제는 사실 가볍기보다는 오히려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이고, 그걸 다루는 방식도 가볍지많은 않게 보였다.

물론 바나나의 작품들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들을 모두 끊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 같은 극히 개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측면도 있고.

그렇지만 상처와 치유라는 문제를 사뿐사뿐(적절한 표현을 도저히 찾지 못해서 이렇게 안 어울리는 부사를...) 다루는 게 마음에 들었고, 또 바나나의 소설을 읽다 보면 따스한 기분이 많이 들어서 좋아했었다.

그런데 <허니문>에 와서는, 너무너무 '지겨워졌다'.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것, 말하자면 그게 내 취향인데, 그리고 환타지를 조금 섞은듯한 비현실적인 분위기도 나름대로 별미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한마디로 '영 아니다'. 담담한 것이 지나쳤는지 재미가 없고, 현실도피가 너무 심해서 따뜻한 느낌도 안 들고, 그저 세상 사람 누구나 갖고 있는 작은 어두움이나 우울함 따위를 극대화, 극단화시킨 것 같아서 염증이 났다.

작가는 이 책에서 주인공 남녀와 올리브라는 개와의 우정을 계속 얘기하는데, 대체 그 개가 무슨 역할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애정, 살아야 한다는 의지, 희망을 일깨워주는 개? 아무런 모티브도, 설명도 없이 쉼표만 많이 집어넣는 것은 신경숙이 쓰던 방식 아닌가.

바나나가 나태해진 건지, 독자인 내가 혼자 지겨워진 건지. 혹은 바나나가 늙어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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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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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을 쓰는 동안 장 지오노가 그리스의 비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항상 운명과 함께 간다는데. 운명,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더우기 나처럼 말초적인 드라마들에 몰두해 있는 독자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한 단어다.

운명은 선대의 실수나 악의, 또는 신의 저주 따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극복해낼 수 없기에 생기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업보'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을 말하는 것 아닐까.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에 '폴란드의 풍차'라는 영지가 있다. 이 소설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화자가 지켜본 한 집안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이 우리를 망각해버리기를!'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던 한 부유한 지주는 신의 장난으로 인한 불행을 피하겠다는 신념으로 두 딸을 어느 평범한 집안의 형제에게 시집보낸다.

결과는? 비극이다. 가족들은 4대에 걸쳐 사고로 죽거나 실종되거나 정신이 이상해져버린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다. 사람들은 항상 타인의 비극 그 자체를 미워하면서 마치 전염병이나 되는 것처럼 비극의 주인공을 왕따시키는 동시에 또 비극을 즐긴다. 그래서 비극은 더욱 증폭되고 운명은 더욱 가혹해지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의 역사, 그런 불행한 역사를 가진 가족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사실 현대인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지워져버린 일종의 추억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뇌세포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그 추억을 건드린다. 잊은줄 알았던 기억을 그집어낸 작가는 무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훈계라도 하듯이, '운명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힘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명에 몸을 던지기 위해 유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보여주는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면서, 어느 고전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이 소설은 자연주의 작가로 알려진 지오노의 다른 작품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나는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지오니즘'으로까지 불리는 자연주의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말년의 작품에 해당하는 이 소설에서 지오노는 비극의 모티브와 함께 마키아벨리즘, 즉 권력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보인다.

'풍차'라는 제목에 걸맞는 조용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기대했기 때문인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마저 아름답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은 이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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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눈 힘찬문고 20
론 버니 지음, 지혜연 옮김, 심우진 그림 / 우리교육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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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동화를 보는 건 처음이다. 호주라는 나라, 어릴 적에는 백호주의라는 이상한 사상을 가진 나라 또는 캥거루나 코알라같은 동물들이 사는 낯선 나라 정도로만 알았었다. 물론 지금도 내게 호주는 낯선 나라다.

호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계기를 굳이 찾으라면 한 장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사냥하는 그림을 책에서 본 일이 있다. 말을 탄 백인들이 총과 창을 들고,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그림. <독수리의 눈>은, 내가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을 글로 써놓은 동화다.

동화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의 페어리 테일은 절대 아니다. 사촌지간인 소년과 소녀는, 가족들이 백인들에게 몰살당한 뒤 다른 부족에게 의탁을 하지만 역시나 도망쳐야 하는 신세. 나는 소년과 소녀가 '어디론가' 도망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동화'이니까, 분명 어디론가 도망을 쳐서 오래오래는 아닐지언정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착한 백인'과의 화해 따위를 설파할 것으로 믿었다. 물론 그랬다면 나는 아마 작가를 욕했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어설픈 화해 따위를 주장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년과 소녀는 끝까지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그냥, 계속 도망칠 뿐이다. 가뭄 속에 굶어죽을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백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책은, 동화라는 외피를 쓰고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얘기하려 한다. 그 역사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짐승처럼 '사냥'했고, 원주민들은 희생됐다. 백인들이 원주민의 문화를 몰살하기 위해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와 따로 격리시켰다든가 하는 따위의 '고도의 식민전략'은 훗날의 일일 뿐이다.

환경운동가들이 종종 인용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땅도 이 하늘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도 모두 있는 그대로의 것들이지 나의 땅이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팔고 사고 할 수가 있느냐고. 물론 인디언들의 외침은 백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연설문은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을 가진 선량한 인간의 목소리였고,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아름다웠다.

나는 결말이 궁금하다. 시애틀 추장은 그 연설 뒤에 어떻게 됐을까. 인디언 '보호구역'에 격리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냈을까, 아니면 '서부개척'에 나선 '카우보이'의 총탄에 숨졌을까.

독수리의 눈을 가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넓디넓은 호주라는 땅에서 백인들을 피해 맨발로 도망치던 소년은, 어딘가 숨어살 구석을 찾았을까, 아니면 결국에는 백인들의 사냥감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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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2004-12-3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늙을 때까지 이곳저곳으로 달아다니다가 세상을 떠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