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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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흔히 말하는 ‘씨니컬’하다는 것, 냉소, 차가운 웃음, 이런 것이 신랄함의 한 종류가 된다. 냉소를 듣고 나면 씁쓸하다.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진다. 나는 그만 ‘너나 잘해보시지’ 하는 심사가 되어버린다.
냉소와 다른 맥락의 신랄함, 유쾌한 비꼬기도 있다. 갈레아노의 글이 그렇다. 비유는 비유이되 작은따옴표가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농담인지 새겨들어야 한다. 귀담아 듣다보며 모든 것이 농담 같으면서 동시에 진담이다.

"이 책에는 공범이 많다. 그들을 고발하는 일은 즐겁다. 1013년에 사망한, 멕시코의 위대한 예술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만이 오로지 죄가 없다. 이 책에 실린 삽화들은 그도 모르는 채 출판되었다. 우선 나는 엘레나 비야그라, 카를 휘베너, 호르헤 마르치니와 그의 컴퓨터 마우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음의 사람들도 내 범행 유혹을 읽고 논평을 해주면서 사악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또한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 성녀 리타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거꾸로’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은 범죄행위로 몰리기 십상이다. 비꼬기의 귀재, 갈레아노의 재치가 넘쳐나는 서문. 책은 더러운 세상을 비꼬는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 던지듯, 내지르듯 진실을 떨구어 놓으니 이것이야말로 ‘광대극’이고 명쾌한 풍자다. ‘거꾸로’는 무엇이며 ‘학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우리는 어릿광대가 펼쳐 보이는 신랄한 한 판의 광대극이 진실임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책은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서 쓰이는 교과서 형식으로 되어있다. 말이 좋아 교과서이지, 그다지 치밀하진 않다. 역사, 민주주의, 폭력, 환경, 매스미디어 등등 오만가지 주제를 섭렵하면서 속사포같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문장이 주옥 같냐면, 그건 아니다. 이 책이 지겨워져 신물 나거나, 이 세상이 우울증 걸리도록 신물 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고문: 고통을 주는 새로운 기술(종교재판소), 적당한 신체적 고통(이스라엘 대법원), 불법적 핍박(라틴아메리카), 벙어리마저도 불게 하는 기술(갈레아노)
법: 거미줄과 같아서 파리 같은 작은 곤충은 잡지만 커다란 짐승의 진로를 방해하지는 못함
우연한 사고: 자동차가 저지르는 범죄
존엄: 칠레 독재시절 어느 수용소의 이름
평화와 정의: 1997년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살해한 준군사조직

거꾸로 된 교과서의 용어들은 대부분 이렇게 용도 변경된 단어들이다.

"평생 마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은 무역의 자유를 거스르는 그 용서할 수 없는 불경스러움을 비난하며, 중국 해안에 전함을 파견했다. 여왕은 두어 차례를 제외하고는 1839년 시작되어 20년 동안 지속된 아편전쟁 기간 동안 전쟁이란 단어 역시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다."
유행하는 말로 하면 ‘뒤집어보기’이지만, 어느 쪽이 제대로 본 것이고 어느 쪽이 거꾸로 본 것인가. 영국의 중국 침탈이 잘못된 것인가, 빅토리아 여왕을 감히 ‘19세기 최고의 마약 거래상’이라 부르는 갈레아노의 입담이 잘못된 것인가.
"1997년 브라질리아를 방문 중이던 인디언 지도자 갈디노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다가 산 채로 타 죽었다. 좋은 집안 출신의 십대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그에게 알코올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다. '거지인 줄 알았어요.' 1년 후 브라질 법원은 살인 의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벼운 금고형에 처했다. 법원의 기록관은 이렇게 말했다. 소년들은 가지고 있던 알코올의 반 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살인이 아니라 즐기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인디언 ‘지도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었는지는 묻지 말자. 책은 역사와 지역,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거꾸로 된 진실’의 잔치이며 곳곳에 유혈이 낭자한 ‘자본주의 잔혹사’다.

세상이 거꾸로 된 것인가, 책이 거꾸로 된 것인가. 거꾸로 된 세상과 진실 사이, 장자의 꿈처럼 나비가 날아다닌다. 세기말과 세기초의 호접몽(胡蝶夢). “세계에는 1억 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흩어져 있다. 이 장치는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폭발하고 있다. 어린이를 유인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지뢰들은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인형이나 나비, 색색의 잡동사니 모양을 하고 있다. 희생자의 반 이상이 어린이들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양심이라는 불편한 분비선을 달고 태어난’ 덕일까.
그 날카로운 펜 끝으로 군더더기 분비선을 쿡쿡 찔러놓고, 갈레아노 스스로도 미안했나보다. "어떤 시간이 될 지 알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바라는 시간을 상상할 권리는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무기력하게 상상하길 포기했던 시간의 목록을 풀어놓는다. 거리의 자동차는 개들에게 짓밟히리라, 사람은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하리라, 역사가는 모든 국가가 침략당하기를 반긴다고 믿지 않으리라, 음식은 더이상 상품이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은 장사가 아니리라, 거리의 어린이는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으리라, 정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자 동시대인이 되리라...

거꾸로 된 세상이지만 꿈꿀 수 있다면, 우리가 바라는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 적들이 우리에게서 가져가려는 것이 바로 그것, 상상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었기에, 상상이 곧 힘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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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3-19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저도 이책 읽었었는데, 반갑습니다. 그리고 역시 딸기님은 리뷰를 참 잘쓰세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와 그렇구나 싶어요.

nemuko 2005-03-1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를 유인하기 위한 지뢰....끔찍하네요. 그나저나 저처럼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거 아닌지 몰라요^^

딸기 2005-03-1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마태우스님! '어머나'라는 감탄사가 너무나...너무나...
네무코님, 이 책, 재미있지는 않아요. 끔찍한 얘기들만 계속 늘어놓으니까요.
 
그녀에게 (무삭제판) - 할인행사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자비에르 카마라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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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모도바로가 뭔지 몰랐다.
극장에 갔는데, 이 영화 포스터에 '알모도바르'라는 말이 있었다. 어쩐지 멋지게 들렸다.
"저 영화 보자. 일모도바르래."
"그게 무슨 뜻인데."
"나도 모르겠는데, 하여간 일모도바르래."
무덤덤한 관객과 무식한 관객, 감독 이름은 물론이고 한글조차 제대로 못 읽는
내 친구 h와 나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녀에게.

하필 그녀는 춤추는 여자다.

불쌍하다, 알리샤. 그 좋은 나이에.
발레리나의 꿈(좀 상투적이군)을 안고 살던 너, 식물인간이 돼서 식물처럼 늘어져있다니.

그리고, 그 놈, 베니그노.식물인간을 강간한 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표정을 보라. 딱 관음증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가. 순수함을 가장한 변태의 눈...

제법 강렬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커플, 마르코와 리디아.
내가 본 정말 몇 안 되는 스페인 영화 중의 하나인 '안나이야기'에는 서커스단이 나왔는데,
이번엔 투우사로군. 일종의 '과거와 현대 뒤섞기' 코드인 것인가.
리디아의 남성성과 알리샤의 여성성이 두드러지게 대비되누만.
감독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대비시킨 것일까. 베니그노의 여성성은 좀 느끼하단 말이다...

이들 네 명이 함께 있는 장면이 한번 나왔는데 "두 둥물과 두 식물이 서서 혹은 늘어져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아름답다면, 아름다울 수도 있지.

쿠쿠루쿠쿠 팔로마는 아주 아름다웠고 피나바우쉬의 무용극도 근사했고
무성영화는 정말정말 인상적이었다. 이미지와 소리, 장치들을 속닥속닥 섞어 만든 예!술!영!화!

그러나 지겹고, 두드러기 날 것 같아. 사랑의 여러가지 단면들--이라고 하기엔
그러니까 당신, 결국 변태 정신병자 아니냐구.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덤벼드는건 여자가 진짜 '나무'인 줄 아는 미친놈이다.
'바라보는 사랑' 어쩌구 하면서 들러붙는 건 관음증 아니면 찐드기 껌같은 놈이다.

사랑의 여러가지 이름, 진절머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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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3-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가 좀 별로였는데...왜 별로였더라? 근데 베니그노는 끝까지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딸기 2005-03-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미친놈 변태였습니다, 그놈은.
'잘 만든 영화다'라는 말엔 동의해줄 수 있는데요
'공감'은 못하겠더군요.

mannerist 2005-03-1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덤벼드는건 여자가 진짜 '나무'인 줄 아는 미친놈이다."에 동의 한 표요. ㅎㅎㅎ 너무 멋지세요~

하루(春) 2005-03-2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DVD 사려고 벼르고 있는데... 아직 못 봤거든요.

비로그인 2005-03-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모도바르의 다른 영화들도 찾아보세요. 계속 변태야, 변태...란 말과 정말 공감은 안간다는 말이 계속 나오겠지요...ㅋㅋㅋ 저는 그의 광팬이에요.
 
살인의 추억 [dts] - 일반판 - [할인행사], (2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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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일이냐, 내가, 대박 터진 영화를 '제 때에' 보다니.
너무 무서울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보고야 말았다. 우선 재미있었고, 영화가 참 깔끔했다.
우리나라 감독들이 이렇게 영화를 테크니컬하게 잘 만들어버리면
대체 남의 나라 감독들은 어쩌라는 거야...

송강호 연기, 진짜 리얼하더라. 경찰서에서 봤던 형사들 모습이랑 거의 똑같애.
그런데 영화평 쓰는 기자들이 "범인은 1980년대였다!" 쿵짝쿵짝 한 건
솔직히 오버 내지는 영화사의 판촉작전에 놀아난 것이라는 생각이 짙게 들던걸.
여기저기 언론에 나온 걸 보니까 아마 감독이랑 제작사에서
그 쪽에 포인트를 맞춰서 홍보를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386'이 광고 키워드니깐, 특히 영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구매력 강한 그들의 '도덕적 자부심'을 또 자극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지.

그런데 내 눈에는 80년대가 아니라, 형사 두 놈만 보이는 거야.
80년대라는 시대적인 특성은 그냥 '존재의 조건'으로만 보였고,
이 영화에서 '보편성'에 해당되는 부분이 더 크게 와닿았거든.
(참고로 말하자면 학교에서 죽은 여학생-- 우리 중학교 때에, 그렇게 긴 머리 날리면서 다니면
선생이 즉시 달려들어 귀밑 3센티로 자르라고 발광했었는데)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시대가 아니라 "미친 놈 잡으려다 미쳐간 사나이들"인 것 같은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박두만 서태윤 두 형사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송강호 김상경이 영화를 끌어간다.
'미친 놈 쫓다보니 몽땅 미쳐가는'. 그런데 사실은 사회 전체가 좀 미쳐있는.
깜이냐, 논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알고보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도다.



김상경이 몇 살이지? 이 '배우'를 처음 본 건 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전쟁'에서였다.
강남길이랑 심혜진이 죽도록 부부싸움하는 드라마. 심혜진의 후배이자, 김현주의 애인으로 나왔는데 
번듯하게 생긴 얼굴이, '잘 나가는 법대 졸업생'으로는 딱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이 탤런트에게서 '연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으니.
그리고 또 뭐였더라--나는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표민수-노희경 듀오의 시청률 바닥 드라마에 출연한 걸 보고 의외네, 싶었는데. 이제보니
저렇게 '배우'가 되려고 그랬나보지.
'살인의 추억'의 히어로는 단연 김상경이다.
송강호의 연기력은 이미 다 아는 것이고 (이 영화에서 보니 정말 물이 오를대로 오른--).
나는 김상경이 미친듯이 띠발띠발 거릴 때, 송재호가 옆에서 "니가 미친 놈 같다"고 할 때.
그 장면이 아주 우스웠다. 마지막에 김상경이 울 때는
약간의 감동--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그 땀내 나는 감동같은 것이 전해오더라 이 말이지.

"그래, 삽질을 저렇게 열심히 하면 금덩이가 반드시 나올겨!"

어쨌든 김상경이라는 '배우'를 발견하니깐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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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5-03-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마지막에 김상경이 미국의 자료를 부정하면서 총을 겨눌때..정말 맘이 찡하더군요. 미치도록 잡고 싶었을텐데...그리고 재때 보신것은 아닌듯 한데요?
이게 개봉한지 이년은 되가는듯^^

딸기 2005-03-1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때 봤어요. 이 리뷰??가 옛날 겁니다. ㅎㅎ
 
첨밀밀 - [초특가판]
진가신 감독, 여명 외 출연 / 리스비젼 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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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억은 모두 달콤할까.
인연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모두 소중하다...고 하면 될까요. 어떤 인연인들 소중하지 않겠냐마는, 그 중에는 특히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대단한 인연도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옷깃만 스치고 지나는' 그런 인연도 있겠죠.
'첨밀밀'은 중국과 홍콩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고, 따라서 돈에 대한 이야기이고, 돈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체제의 틀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첨밀밀의 핵심은 첨밀밀이다'...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이 영화의 키워드는 타이틀인 '첨밀밀'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첨밀밀은, 아주 달콤하다는 뜻이죠. 달콤한, 그대의 미소는 마치 봄바람처럼 달콤해요, 어디에선가, 그대를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요, 그대의 미소짓는 모습은 이렇게 익숙한데...소군(여명)과 이교(장만옥)의 '기찻간 인연'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는데, 등려군의 '너무나 달콤한' 노래가 흐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결코 달착지근하지 않은, 오히려 시큼하고 씁쓸한 맛까지 느껴지는 이들의 인연에 감미로운 가락을 붙여놨습니다. 이들의 '첨밀밀'은 일종의 역설인 셈이죠. 돈을 좇아 고향을 떠나온, 자본주의의 최첨단 홍콩으로 건너온 두 중국 남녀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저런 달콤한 향내를 뿌려놓다니. (몇달전부터 등려군의 노래에 심취해 있는데, 등려군이 부르는 '첨밀밀'은 사실 알려진 것처럼 뽕짝풍의 단내 나는 노래는 아닙니다. 특유의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귓가를 살살 간지럽히는 맛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두리안'인가 하는 애들이 드라마에서 부른 것처럼 경박한 노래는 더더욱 아니구요.)

제법 그럴듯하게 생긴 젊은 남녀의 사랑을 쌉싸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돈인데...이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돈도 모으고 희망이란 것을 이야기하던 장만옥의 배신을 때린 것은, 바로 증시였군요. 뉴욕발 '블랙 먼데이'의 충격이 그녀의 인생을 휘어잡은 겁니다. 자본주의에 배신당한 젊은 여인은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새 삶을 찾습니다. 좋건 싫건간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조폭과의 동거를 시작합니다.

궁금한 것 한 가지. 여명은 장만옥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폭 '오빠'한테 작별인사만 하고 오면, 그녀는 부둣가에서 기다리는 연인과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끈 떨어져 도망가는 조폭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 배를 타고 떠난 것일까요. 조폭 기둥서방조차 "새 애인 찾아 떠나라"고 했는데.
그것도 인연이라는 것일까요? 무릇 모든 인연은 다 소중한 것이어서, 억척또순이처럼 '캐피탈리스트'가 되고자했던 장만옥조차 그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든 남자를 따라갔던 것일까요?

다시 등려군 이야기. 당대의 스타였다는 이 여자가수 또한 장만옥같은 인물이더군요. 원래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는데 대만과 홍콩을 오가며 활동을 했고, 일본에서도 10여년간 가수 일을 했었답니다. 그래서 등려군의 노래에는 엔카가 섞여있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중국노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심각한 슬럼프를 겪으면서 중국인들의 애를 태웠다가(!) 기사회생해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다는군요.
중국인들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작년에 홍콩 구경을 갔을 때 등려군의 소지품 경매광고를 봤는데, 죽은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중국인들은 그녀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려군은 장만옥처럼 자본주의를 따라다녔지만 그녀의 노래들은 아주 오래된 정서를 담은 것들입니다. '첨밀밀'도 그렇고, 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노래들이나 베스트앨범에 담겨 있는 노래들도 그렇구요. 아주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눈길 주지 마세요,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 전해줘요...그래서 중국인들은, 자본주의를 피해갈 수 없게된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몹시 서글픈 사랑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은 뉴욕의 길모퉁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혹시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에반젤린'을 아시는지. 운명의 장난도 이들을 영원히 갈라놓지는 못했다-라는.
'에반젤린'에서는 두 연인이 만나는데 평생이 걸렸지만 다행히 현대의 두 남녀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몇년 만에 만나는군요. 홍콩은 중국에 귀속됐지만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는 역설처럼, 두 사람의 만남을 이어준 것은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쇼윈도를 들여다보다 불현듯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의 미소는 참 감미롭더군요(첨밀밀!).
(참, 원래 '첨밀밀'은 인도네시아 민요인데 중국말로 가사를 붙인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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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전, 아이구 지겨워... 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고있었다.
지나가던 선배가
"아이구 지겨워..라고 낙서하면서 읽고있나?" 
라고 말하는 것이다. 속으로 
'어떻게 알았지'하고 생각만 하고 있는데.
"전에 딸기씨 책 보니깐 '아이구 지겨워'라고 낙서가 돼있던데."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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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3-1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다른 분들도 님을 딸기씨라고 부르는군요^^

마태우스 2005-03-1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전 지겨우면 책에 빨간줄이 더 많이 그어진답니다^^

바람구두 2005-03-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리뷰의 달인 100위 안에 들었네요? 흐흐..
언제 그렇게 열심히 한 게지... 난 지겹단 말보단 심심해란 말을 선호한 답니다.
심심해.....

딸기 2005-03-1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아... 리뷰의 달인 100위 안에 든지 오래됐다고요!

바람구두 2005-03-1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뭐 그런 걸... 원래 그런 거에 서로 별관심없지 싶은데?

딸기 2005-03-1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긴 관심 많으면서... 흐흐

바람구두 2005-03-1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솔직히 잘난 척하긴 싫지만... 관심없소. 우연히 얻어진 결과일 뿐... 잘 암시롱. 쑤셔보긴...

딸기 2005-03-19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잘난척이 아닌 것이 아니자나요!

바람구두 2005-03-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재섭는 것들은 다 나처럼 말하는 법이잖우. 흐흐.

딸기 2005-03-1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재섭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