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자유
밀턴 프리드먼 지음, 심준보 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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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름만 듣고 정작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밀턴 프리드먼의 책을 올여름 읽었다. 유명한 책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와 자유>를 읽지 않고서는 현대 경제학을 논할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100권의 책 중 하나”.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320쪽 정도) 에세이풍이길래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도전해봤다.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62년. 1982년에 한번 다시 냈고, 그 다음에 2002년 다시 펴냈다고 한다. 내가 본 책에는 이 세 버전의 저자 서문이 모두 붙어 있다. 저자가 2002년판 서문에서 밝혔듯, 1962년과 이후 20년, 또 그 뒤의 20년 동안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프리드먼이 이 책을 썼던 시기 미국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고, 2차 대전 이후의 정부 주도형 경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1980년대 미국은 여전히 람보식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긴 했지만 세계화가 시작되고 ‘민간경제’가 커지면서 경제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그리고 2002년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화가 한창 진행된 시점이었다.

책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자유를 선사해준다. 자유는 자본주의 속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규제는 자본주의의 적이다. 따라서 자유의 적이다. 공산주의와 싸움에서조차 매커시즘 식의 규제, 헐리웃 블랙리스트 같은 멍청한 규제는 필요없다. 왜냐?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시장이지 규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을 믿으라. 자본주의와 자유를 믿으라. 정치적 자유도 시장이 가져다 준다. 인간 본성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경제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통화량이지, 기업인이나 노동자의 탐욕이 아니다. 프리드먼의 별명처럼 돼버린 ‘통화주의’의 사상적 배경은, ‘돈의 양만 빼고는 아무것도 손대지 마라’라는 것에 있다. 정부도, 공산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우익도, 모두모두 시장에서 손을 떼시오!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았다는 경제학자가 쓴 글을 놓고, 경제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비아냥거리려니 좀 그렇긴 하다. 하기사, 이 책이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렇게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속으로 뜨끔뜨끔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뭘 잘못해서 뜨끔하고 찔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긴가민가 싶은데 프리드먼이 딱 잘라 말하니 어쩐지 솔깃해진 부분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프리드먼은 2002년판 서문에서, 인류는 수십년간 초유의 ‘실험’(공산주의와 계획경제)을 해보았으며 이젠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한다. “경제를 조직하는 두 가지의 택일적 방식, 즉 하향식 대 상향식, 중앙집중적 계획·통제 대 사적 시장, 더욱 쉽게 말하면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를 놓고 70여년에 걸쳐 벌인 실험에 극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홍콩과 타이완 대 중국 본토, 서독 대 동독, 남한 대 북한이라는, 더욱 소규모로 이루어진 그와 유사한 여러 실험에 의하여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경제학은 그 특성상 과학자들의 실험과 같은 제한된 시공간 내에서의 인위적 실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힘든 학문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애당초 ‘실험’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인류는 20세기 근 100년 동안 실험을 한 꼴이 됐고,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말은 틀린가? 별로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제3세계에서 계획경제,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골랐던 나라들 줄줄이 실패했다. 프리드먼 말대로, 차라리 시장경제 택한 나라에서 전반적으로 소득이 늘어나면서 빈부격차도 줄어들었다. 정확히 빈부격차가 줄어들었는지 아니면 절대빈곤이 줄어들면서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아프리카 빈곤국들보다 자본주의 해본 나라들이 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세계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고립된 나라들보다 개방되고 세계화된 나라들, 외국과 무역 많이 하는 나라들이 더 잘 산다.
빈부격차 없는 나라 없고 세계화 시대에 빈부격차 더 커진다고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좌파가 됐건 우파가 됐건 사실은 사실인 거다. 따지고 보면 빈부격차가 커지는게 뭐가 문제랴. 100원 가진 사람, 1000원 가진 사람 나뉘어있던 사회가 1000원 가진 사람과 1000만원 가진 사람 있는 사회로 바뀌면 빈부격자는 엄청 커진 꼴이지만, 제일 가난한 사람들 돈이 많아진 것 또한 사실이다. 프리드먼은 45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고, 사회주의와의 싸움에 너나없이 달려들었던 시기에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그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겼던 것이다.

딱히 프리드먼의 말에 반박도, 동조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궁금할 뿐이다. 지구가 다 세계화/자본주의화 되면 지금 1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모두 하루 100달러씩 쓰면서 살수 있게 되려나(그렇게 하루 100달러씩 쓰면서 살수 있는 세상이 되면 이 지구의 에너지 과소비와 환경문제는 또 어떻게 되려나). 자본주의가 꽤 성공적이었는데 왜 지구상 어떤 곳에서는 실패가 계속되고 있나.
프리드먼은 아쉽게도, 구체적인 의문에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아니,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해야 하려나. 좋은 의도가 있건 없건 결과적으로 좋으면 좋은 거야, 자본주의 하니까 자유도 생기고 빈곤도 없어지고 복지도 찾아오는 거야. 하지만 아직까지 자유도 돈도 복지도 인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20세기 최고 경제학자였다는 프리드먼의 글은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기보다는 속을 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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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2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읽어야지 한 지는 오랜되 계속 밀려나고 있는 책이에요.꼭 프리드먼때문은 아니고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더 많아서.
자본주의 외에 다른 것이 있었나요?좌쪽에서는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의 실패라고도 하는데 맞는 말이긴해도 좀 밀어붙이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합니다.오히려 세계체계론자들의 주장은 그런 면에서 일청할 필요도 있어보여요, 처음부터 사회주의란 것도 자본주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런 견해는 또한 논란의 여지가 많아 보이지요^^ 어쨋거나 자본주의는 맑스가 예견했듯이 야만성을 존재론적 속성으로 삼게 되니 어떤식으로든 고삐를 묶어야지요.근대의 자본주의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고삐를 묶냐 고삐를 풀어주냐 ..그리고 조인다면 어떤 형태로 고삐를 조이느냐의 논쟁이었던 듯 해요..서재에 밀려 있는 10권의 책이 또 프리드먼을 밀어낼 듯 해서..내년이나 볼려나.
월요일인데 휴..오늘도 멀리 갔다와야되네.

딸기 2007-10-29 10:24   좋아요 0 | URL
에... 사실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간단 답글로 말하기가 뭣한데요. 프리드먼 책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 읽어봤기 때문에 제가 맞게 이해를 한것인지도 사실 100% 자신할 수 없고요.
자본주의 외에 다른것이라... 글쎄요, 좌파 우파 기준으로 본다면 이 책은 딱 '우파'가 쓴 것이기 때문에(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드먼의 관점에서 오늘날 '경제적 우파'라는 것의 시각이 많이 정리돼나온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아마도 그냥 드팀전님이 상상하시는 내용 그대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흔히 좌파 우파 나눌 때에 우파가 하는 바로 그 이야기, 그 정도라는 겁니다.
다만 세상 일은 좌우로 나눠 볼 일이 아니고, 특히 우파보다 좌파적 사고방식이 결과적으론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철딱서니 없는 좌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가 말 그대로 '발전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고 저는 생각해요. 문제는, 그런 눈으로 보더라도 프리드먼의 글은 너무 구식이라는 거지요 ㅎㅎ 좌우 양쪽 모두를 보고 장단점을 따져보니 우파 쪽이 맞더라, 하는 것이 아니라, 걍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쁘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 책은 1960년대에 나온 것이니깐...
읽을 땐 그냥저냥 재밌었는데, 읽고 몇달 지나고 나니 홀라당 다 잊어버렸어요. 별로 영양가가 없었던 셈이죠. ^^

비로그인 2007-10-3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프리드먼의'샤워실의 바보'란 비유를 듣고 정말 재미있었는데요. ^^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을 믿는다는 건 마치 사람의 피부 등 조직이 스스로 치료해나가고 (마데카솔과 후시딘이란 피부연고도 작용하는 점이 다른 것처럼), 자연의 자정작용을 믿는것과 같다고 보는데요. 어떤 시스템이건 간에 결국 누군가 일부 집단이 권력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고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요즘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마구 깨닫고있거든요), 자국의 시장이 좁다고 느끼는 국가는 다른 나라의 시장을 제국주의처럼 흡수하고자 하게 되겠지요. 학자이신 밀턴 프리드먼도 조금은 순진하신게 아닌가 싶어요.

딸기 2007-10-31 06:55   좋아요 0 | URL
그런지도 모르지요 ^^
 
보스니아 역사 - 무슬림을 중심으로
김철민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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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역사에 대해 충실히, 교과서적으로 중세부터 최근(2005년)까지를 설명하고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됐다.

발칸을 비롯한 동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사실 옛 유고연방의 내전은 참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 지역 상황이 비상식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게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그렇게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나, 어째서 그들은 티토 치하 수십년간의 한 나라 경험에도 불구하고 냉전 끝나자마자 갈라졌나, 어째서 그들은 한때 한 나라 국민이었는데 그렇게 격렬하고 잔혹한 내전과 인종청소를 자행하게 되었나. 의문은 많았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 답답했다. 그들의 내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은 너무나 끔찍했고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 문제는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웬만해서는 해석을 내리기도 힘든데, 정작 구체적인 과정과 전사(前史)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참고서다. ‘보스니아 역사- 무슬림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보스니아 무슬림에 국한하지 않고 옛 유고연방 지역의 전반적인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험난한 산악지형 때문에 중세 가톨릭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데다 비잔틴마저 강력한 성직자-종교통치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오스만제국이 밀고 들어오자 믿음이 약했던 보스니아 지도층은 쉽사리 이익을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오스만 하에서 지배층 자리를 유지했던 무슬림들은 19세기 오스만의 국력이 떨어지고 발칸에 민족주의 바람이 몰아치자 정교 계통(세르비아계) 민중들의 반발에 부딪쳤다는 것,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20세기에까지 파장을 미쳤다는 것.
사건들을 좀 빡세다 싶게 많이 나열하면서도 그 사건들의 역사적 의미와 이후 영향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재미가 있었다. ‘민족국가’를 만드는 동력이 됐던 서유럽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국가를 형성해 잘나가본 경험이 적은 동유럽 민족주의는 유달리 신화적(고대지향적, 영웅중심) 색채를 띠었다는 분석도 재미있다. ‘국가’라는 틀과 무관하게 흘러간 남슬라브의 이런 문화적 민족주의는 종교를 중심으로 민족들간 차이를 확대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20세기 역사는 사건들이 많아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티토 치하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만 유고에 대한 미국의 지원 부분은 처음 듣는 것이라 재미있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그 뒤처리 과정도 사건들 중심으로 컴팩트하게 정리돼있고, 파장과 문제점 등에 대한 설명이 충실한 것도 좋았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설명해놓고는 있지만 문장이 좀 꼬여있다는 것. ~를 제공했다, ~를 부여했다는 식의 중언부언이 많고 ‘정당성’ ‘인종청소’ 등의 용어를 남발하고 있다. 인종청소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뒷날 누구누구의 인종청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식의 표현은 백번 가감하고 들어도 용납하기 힘들다. 심지어 ‘인종청소라는 미명하에’ 라는 문구도 보았는데, 세상 어떤 가해자들도 자기네가 인종청소 하고 있다고 내세우진 않는다. 인종청소는 어떤 경우에도 ‘미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95년의 데이튼 합의안이 효력을 본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각 민족계파들이 자행한 인종청소를 통해 민족들간 분포양상이 비교적 정리됨으로써 수월한 분리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다”고 써놨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는지는 몰라도 ‘인종청소의 효과’를 저렇게 서술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인종청소에 찬성할리는 없겠지만 좀 무신경한 표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책들은 특징이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가 대개 한국외대 교수 혹은 강사들이기 때문에, 문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아닌 학자들이니, 그들에게서 ‘지식’을 넘어선 유려한 문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정말 편집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서울대출판부,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책들도 얼핏 보니 비슷비슷하던데, 디자인 개념을 철저히 무시한 단순무식한 편집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세 번째 특징은, 오히려 그래서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알짜배기 교과서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이 책이 그렇다. 디자인이 검소하고 조악한 대신 쓸데없이 하드커버에 줄 간격 글자크기 펑펑 키워 비싸게 받아먹는 책들보다 훨씬 소박하고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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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 저자 책 오랜만에 읽으셨네요 딸기님^^

딸기 2007-10-09 07:00   좋아요 0 | URL
ㅋㅋ 맞아요. 사실은 한국인의 이름이 들어있는 장자 책을
아주 오랜 시간 -_- 에 걸쳐 읽고 있긴 하지만요
 
기로에 선 미국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유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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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번 여름에 몇 권의 굵직한 책들을 읽었다. 두께나 분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의 무거움 측면에서 읽은 보람이 있다 싶어 뿌듯한 그런 책들이다. 그 중 가장 탁월했던 것은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의 미래’였고 나머지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 브레진스키 ‘제국의 미래’,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그리고 이 책, 후쿠야마의 ‘기로에 선 미국’이었다. 모두 무게가 적잖은 것들인데, 읽고 나서 정리를 제때 제때 하지 않은 탓에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두통을 안겨줬던 책들이다.

후쿠야마는 설명할 필요 없이 ‘역사의 종언’의 그 사람이다. 세상엔 그 책을 욕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말을 인용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 말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의 종언’을 (후쿠야마가 이미 역사가 끝났다고 말한지 15년이나 지나서) 몇 달 전에야 읽었는데, 왜들 그렇게 후쿠야마 욕을 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었다. 15년전에 그 책을 읽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욕을 했으려나? ‘역사의 종언’은 헤겔 칸트 어쩌구 하는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책이지, 곧이곧대로,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을 끌어다가 비판하면서 “역사가 뭐 끝났다 그래”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성질의 텍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쩌면 후쿠야마를 욕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역사의 한 패러다임이 진짜로 끝나는 줄 믿었던, “안 끝나!” 하면서 고집만 부렸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후쿠야마의 책이 나오고 15년이 지나 읽은 내 눈에, 그 책의 표현들은 좀 예스럽지만 개념들은 오히려 현재진행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 책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고, 다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똑똑한 학자의 똑똑하고 어려운 책’으로 기억에 남았다.


후쿠야마가 새 책을 내놨다고 해서 두말 않고 주문하려고 보니 번역자는 국제문제와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책들을 솜씨 있게 번역해왔던 유강은씨다. 이 저자에 이 출판사에 이 번역자는 참 조화로우면서도 안 어울린다 싶었는데,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책은 훌륭했다. 책은 후쿠야마가 본 미국의 현실, 네오컨에 휘둘리다 ‘막 나가버린’ 미국을 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주인공은 네오컨이다. 네오컨은 부시 행정부 들어서고 나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 뿌리는 오래됐다. 책은 네오컨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해서 세력을 잡았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막나가서 요모양 요꼴이 됐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나도 한때는 네오컨이 괜찮을 줄 알고 솔깃했는데 지금 보니 너희들 대체 왜그러니. 그렇게 하면 미국 망하고 세계도 망한다니까.” 요지는 이렇다.


후쿠야마는 책에서 네오컨의 뿌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거명해가며 누구는 진짜 네오컨이지만 누구는 사상으로 봐서 어정쩡하다, 누구는 첨엔 아니었지만 나중엔 주위 사람들 말에 솔깃해져서 네오컨이 됐다 등등으로 좀 거칠게 설명한다. 문체는 다소 공격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선악을 판단기준으로 삼던 가치 중심의 옛 좌파들(이 점에서 네오컨은 브레진스키나 키신저같은 정통 보수파와는 태생부터 다르다)이다. 그런 면에서 레이건은 네오컨이었고, 부시는 나중에 네오컨이 된 부류에 속한다. 람보 식의 대결주의, 부시 식의 ‘악의 축’ 운운하는 복음주의 비슷한 공격 성향은 이렇게 해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들의 관심사는 원래부터 ‘유리하냐 불리하냐’ 하는 전략전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였던 것이다. 


부시와 그 떨거지들이 너무나, 너무나 ‘확신범’처럼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라크전쟁 전에 네오컨이 아닌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 쪽에서 레이건주의자들로 구성된 현 부시 행정부에 딴지를 걸었다는 분석과도 맥락이 맞아 떨어진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 선악의 판단이 끝났다며 역사의 종말까지 선언했던 후쿠야마가 네오컨들에게서 돌아선 데에서는 이라크 전쟁과 그 뒤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널리 알려진 대로, 새뮤얼 헌팅턴이나 크리스토퍼 히첸스가 이라크전에 쌍수 들어 환영한 것과 달리 후쿠야마는 처음부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네오컨들은 이라크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한 정권, 미국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워 세상을 안전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 막나가버린 짜가 네오컨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미국 군사기술의 성공은 군사 개입이 언제나 걸프 전쟁이나 코소보 전쟁처럼 깔끔하고 값싸게 진행될 수 있다는 환상을 낳았다. 이라크 전쟁은 이런 형태의 가볍고 기동력이 있는 전쟁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재래식 군사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반란에 맞서 싸우는 데에는 특별한 이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통합정밀직격탄과 TV 유도형 대전차 미사일은 반란자와 비전투원을 구별하지 못하며 병사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지도 못한다.”(58쪽)


그래서 럼즈펠드 류가 이끄는 이라크 전쟁은 실패했다. 더불어 네오컨의 ‘체제 변경’(레짐 체인지) 전략도 실패했다. 백악관을 자기네편으로 끌어들인 네오컨이 너무 오만해져서 상황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오컨의 대부인) 스트라우스식으로 이해된 정치 체제는 공식적인 제도나 권력 구조만을 의지하지 않는다. 정치 체제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사회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50쪽). “스트라우스도 고대의 정치철학자들도,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정치 체제여서 일단 독재를 제거하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51쪽).


그런데 네오컨들은 무식하게도, 후세인을 없애면 이라크가 ‘민주화’ 될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세상 사람들 다 ‘불가능하다’ ‘쉽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왜 백악관의 그 자들은 착각의 늪에 빠졌던 것일까? 후쿠야마의 시각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과거부터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과 정말 비슷하다.


“냉전 기간 신보수주의자들은 멸시받는 소수 집단의 지위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인습적인 지식에 도전하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해결책을 추구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공산주의의 갑작스런 붕괴는 이런 생각들의 정당성을 많은 부분 입증했으며, 1989년 이후에 이런 생각은 분명한 주류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감 속에 ‘우리 대 그들’이라는 유대감을 강화했다. 2001년 권력의 자리에 돌아온 국방부와 부통령실의 전쟁 주창자들은 자신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끼리끼리 소수파로 뭉쳐 세상에 맞섰던 선(善)의 수호자(누구 맘대로;;)들은 자신들만이 옳다며 배타주의를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세계 최강 미국의 권력을 손에 쥐고 남의 나라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손에 망치만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처럼 보인다는 말처럼” 그들은 단단한 힘만을 생각하다가 부드러운 힘은 아예 잊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부드러운 힘의 사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88쪽)


남의 나라 아수라장 만들어 수만명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평가 치고는, 후쿠야마의 평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분석은 잘하는데 나쁜 놈이 나쁜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고 좋은 일을 제대로 잘 못해서라고 하는 꼴이다.


뒷부분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쪽은 대략 민주당 주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찌 됐든 책은 재미있었고, 미국 네오컨들에 대해 알려주는 점이 많았고, 구구절절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각론 측면에서)과 못돼먹은 생각(전체적으로)이 잘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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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0-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는 어려운 책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리뷰를 써주세요. 그리고 적절한 비유로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요. 리뷰가 맛있었어요^^

딸기 2007-10-05 17:21   좋아요 0 | URL
마노아 혹시 내일(토요일)도 일하니?
나 우리 딸 데리고 시내에서 놀 것 같은데, 마노아랑 만나볼까 해서.
너무 늦게 말했나... ^^;;

마노아 2007-10-05 19:07   좋아요 0 | URL
아앗, 이럴 수가! 내일 일이 있어요. 흑흑...
멀리 진주에서 지인이 올라와서 같이 뮤지컬 보기로 했거든요. 우웅.. 아쉬워요(>_<)
아가도 볼 수 있는 기회인데..ㅠ.ㅠ

icaru 2007-10-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잘 읽었습니다. ^^

딸기 2007-10-05 17: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카루님. ^^

딸기 2007-10-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역시나 내가 너무 늦게 즉흥적으로 얘기를 했구나. :)
시간은 많으니깐, 10월 가기 전에 꼭 만나자.

마립간 2007-10-1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를 저의 서재 페이퍼에 올립니다.

딸기 2007-10-19 17:41   좋아요 0 | URL
넵. :)

maynard 2014-02-14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오콘이 노무현정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린 첨 들어본다.
노무현정권이 남의 나라 침략해서 그 나라를 반식민지 비슷하게 만들려했나?
아니면 누구처럼 국민을 기만해서 나라돈을 도적질을 했나?
네오콘들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뉴라이트와 유사하다고 할 수있지 않나?
그 이름과 근원도 유사하다.네오콘은 신보수,뉴라이트는 신우익인데 그들의근본이 얼치기 좌파라는 점까지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사실 좌파 우파를 떠나 오로지인간의 이기심과 물질숭배,힘(군사력,경제력)만이 유일한 가치판단의 척도가되는 천박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더우기 미국의 네오콘과는 달리 한국의 이익보다는 외세의 이익(엄밀히 말한다면 외세에 기생하는 자신들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매국적 집단이니 더더욱 한심하다.
위 서평이 오른 시점이 2007년. 아직 뉴라이트가 발톱을 드러낸 시기가 아니라 서평자가 잘 인식을 못했겠지만 지금 다시 서평을 쓴다면 그 내용이 달라질까?

남성일 2023-05-09 22: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동의합니다. ^^
 
부의 제국 -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나
존 스틸 고든 지음, 안진환.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그냥 쓱쓱 읽었다. 540쪽 분량인데, 제발 우리나라 책들, 하드커버 하지 말고 폰트 좀 줄이고 위아래좌우 여백 줄이고 줄 간격 좀 줄여줬으면 싶다. 이 책은 250~300쪽 분량이면 딱 적당할 것 같다.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답은 뭘까? 첫째, 미국은 땅이 넓었고 자원이 많았다. 둘째, 미국인들은 혁신을 잘 했다. 셋째, 미국은 20세기 양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대 수혜자였다. 넷째, 잘못된 정치인들과 어리석은 판단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은 비교적 정치를 잘 했다. 기타등등.

다 맞는 얘기인 것 같다. 그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째서 미국은 땅이 넓었나? 빼앗아서. 어째서 미국인들은 혁신을 잘 했나? 원래가 개혁적이고 고정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어째서 미국은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나? 고립주의와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어째서 미국 정치인들은 정치를 잘했나? 똑똑하고 애국적이니까.... 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책은 부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방대하지도 않다. 미국 역사(경제사)를 속도감 있게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19세기까지를 너무 좀 길게 적었다 싶은 감이 없지 않으나 20세기 부분(마지막 4분의1) 들어가면 제법 긴박감 있다.

회색 종이로 편집된 부분, 경제사 뒤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들은 요약이 잘 돼있어서 좋았다. 전반적으로 가치 평가 없이 서술한 책이라, 특별히 경제 분야가 아니더라도 미국사 전반 간결하게 훑는다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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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지음, 권영주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십자군에 대해 별반 관심 없는데, 어찌어찌 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미가 있고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서 쑥쑥 넘겼다. 책 원제는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인데 한글판에 부제를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로 달아놨다.
제목 장난질이야 흔하다 해도, 이 경우는 좀 심했다. 요즘 ‘이슬람 바로보기’ 같은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2005년 출판된 책에서 겨우 이따위 19세기 풍의 부제를 달아놓다니. 이 책은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목에서 표현한대로, 십자군 역사를 충실하면서도 컴팩트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이다. 인물평이라든가 전설 따위는 사건 이해에 필요한 정도로만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이 책에선 로망스 같은 것은 냄새도 맡기 힘들다. 전설에서 ‘팩트(fact)’를 가려내 당대의 ‘사실(史實)’ 중심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인데, 저 부제는 완전히 책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역사를 볼 때 누구의 ‘편’에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본질적인 문제다. 십자군을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 유럽과 이슬람 사이의 십자군 전쟁은 분명 유럽이 ‘일으킨’ 것이지만 일방적인 침략 작전 혹은 어느 한쪽이 가해자(이득을 얻은 자)이고 어느 한쪽이 피해자(손해를 입은 자)인 것은 아니었다.
이 오랜 전쟁은 유럽이 일으킨 것이고,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두고두고 미쳤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어쨌거나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했고, 다만 이슬람의 유럽 완전정복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유럽은 많은 것을 잃었고(경제적으로 유럽은 손해를 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싸움에서 졌지만 십자군의 감수성은 이베리아 반도의 리콩키스타 등으로 나타나는 등 오랜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아랍국과 뒤이은 투르크제국 등 이슬람권에게 십자군 전쟁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군 전쟁이란 용어를 아는 이들조차 드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 지도자 살라딘을 부각시킨 것은 오히려 월터 스콧 같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었고, 아랍인들에게 살라딘은 19세기 혹은 20세기까지도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그저 수많은 전쟁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 어떤 성스런 의미가 있는 대단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 십자군 전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이른바 ‘근동’ 지방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쪽이었을 뿐이지 이슬람제국의 내륙이었던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는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이슬람권에는 그저 그런 전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구지상주의라는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많은 저 부제(저런 식의 ‘십자군전쟁론’이 아직도 통용된다면 유감스럽다)와는 달리, 저자의 시각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눈으로 십자군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유럽과 십자군 전쟁을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바보 같은 학자는 아니다. 그저 유럽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 전쟁은 이러저러한 전쟁이었음을 설명하는 데에 치중할 뿐, 무식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슬람 식으로 남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서술 자체는 무미건조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럽의 눈’으로 보되 ‘당대인의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입성 후의 혼란 속에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다수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었거나 성밖으로 추방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예루살렘의 거리마다 무릎까지 차오는 피바다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과장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80쪽)

재미난 지적이다. 저자는 중세인에게 십자군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종교의 시대’에 ‘성전(聖戰)’의 의미가 대단히 컸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한다. 맑스주의 역사관이 퍼지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십자군 전쟁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강했지만, 이는 온당치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주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이들이 유산 혹은 봉토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의 둘째 아들이나 기사 계급 실업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당대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봤을 때에 십자군 전쟁은 분명한 성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반론이다. 십자군은 스콧 같은 소설가들이 바라본 세련된 아랍 군주와 과격한 유럽 기사의 싸움도 아니었고, 19세기 민족주의자들이 예찬했던 것 같은 ‘유럽의 로망스’도 아니었으며, 20세기 좌파들이 말하는 것 같은 ‘유럽 실업자들이 벌인 싸움판’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 유럽인들의 성전이었지만 후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해석의 변화를 거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저자의 말대로 철저히 ‘유럽의,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전쟁이었던 십자군의 진실을 지금에 와서 파헤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서문은 역시나 9·11을 끌어당기고 있다. 유럽은 중세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근세 이후 십자군 전쟁의 재판(再版)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니까 이슬람도 거기 맞선 성전을 일으켜 십자군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오사마 빈라덴 류의 시각이다.
십자군 전쟁을 끌어다 이리 붙이고 저리 둘러대는 세력이 많고 그들 사이에 싸움(테러가 됐든 ‘테러와의 전쟁’이 됐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21세기 지구인 모두를 둘러싼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전쟁이었으며 별나게 멋진 전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달리 저질스런 전쟁도 아니었다, 20세기 시리아와 이라크 독재자가 뒤늦게 살라딘 흉내를 냈었지만 실상 아랍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왔다, 십자군 전쟁이란 말이 모종의 은유로 통용되고는 있지만 역사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낭만도 증오도 모두 일단 가라앉히고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책은 문체가 냉랭해 재미가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흥미로웠다. 저자가 뒤에서 혹평을 하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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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김태권님의 <십자군이야기>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일까요? 더 와 닿아요.
제가 읽고 있는 책과는 또다른 느낌이 있을듯...

딸기 2007-10-05 07:29   좋아요 0 | URL
아, 그 책도 인기가 많던데... 저는 1권만 읽었는데, 그 책하고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다르지만
둘다 재미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