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정병선 옮김 / 이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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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하게 붙였는데, 실제로는 원제 그대로 ‘빅토리아 후기 즉 19세기 말 엘니뇨로 인해 벌어진 범지구적 차원의 기근’을 집중 조명한 책. 따라서 ‘빈곤의 역사’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빅토리아 후기 기근으로 본 환경재앙’ 정도로 읽어주면 될 것 같다.

재미있었다. 중국, 인도, 브라질을 중심으로 엘니뇨와 대규모 환경파괴, 식민통치의 범죄적 양상과 그로 인한 19세기 말 초유의 대기근을 살피고 있는데, 저자 스스로 말했듯 ‘기근의 정치생태학’이라고 보면 된다. 요는, 가혹한 식민통치(중국의 경우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서구의 압박 속에 제국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점에서 맥락은 같다고 본다) 속에 우리가 오늘날 ‘제3세계’ 바꿔 말하면 ‘못 사는 나라들’이라고 부르는 지역들이 무대책으로 글로벌 경제구조에 통합됐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다 보니 인프라가 무너지고, 토양 침식 등 환경재앙의 요인들이 축적되고, 드디어 강력한 엘니뇨가 들이닥치자 수백만, 수천만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났다. 기근은 어느 시대에건 있었다지만 1870~1900년의 대지진은 규모 면에서 엄청났다, 하지만 기근은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는데 식민 모국에 이것저것 다 빼앗기다 보니 식량 수급이 잘 안 돼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대기근이 결국 그 지역들의 정치-경제-인구구조를 모두 왜곡시켰고, 결국 그 나라들을 오늘날의 제3세계로 만들었다는 것. 저자는 중국 인도 브라질을 주로 분석했는데 이 나라들은 오늘날 브릭스(BRICs)니 뭐니 해서 ‘신흥 경제대국’들로 각광받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야 ‘운 좋게도’ 땅덩이가 크고 가진 자산이 많아서 다시 기가 살아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세 나라가 아닌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 빈국들을 놓고 보면 저자의 통찰력을 부인할 수 없다.

책은 또 당시의 기근이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들에서 ‘천년왕국 운동’과 같이 보편적인 양상을 띠는 저항운동을 촉발했던 것, 남아프리카에서 줄루 왕국이 식민세력에 맞서 이긴 뒤에 기근 때문에 스러지면서 네덜란드계(보어인)가 어부지리 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인구 이동이 벌어지면서 촌락들이 붕괴되고 서방에 손쉽게 노예로 잡혀갈 수 있었던 것 등등,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후대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 기근의 파급효과들을 조명하는 데에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다만, 첫머리에서부터 야심만만하게 ‘기근의 연결고리’로 지목한 엔소(엘니뇨 남방진동)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렇다할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엘니뇨의 작용이 워낙 불가측적인데다가 인위적 지구온난화와 엘니뇨의 관계에 대해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문제는 굶주림이다. 빅토리아 후기에서 한 세기가 지나갔어도 기근은 여전히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의 목숨을 죄고 있다. 지난세기 후반 이후의 기근은 거의 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지금 당장 주린 배를 안고 죽어가는 이북의 동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긴급구호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곤 하는, 엄격한 의미의 기근(다수의 아사자가 발생하는)이 아닌 아프리카 곳곳의 ‘만성적 대규모 영양실조’ 현상도 심각하다. 기근을 어찌 할까. 기근의 해법은 정치에 있다는데.


 ▷ 알렉산더 드 발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사태를 누가 ‘기근’이라고 규정하느냐는, 사회 내부 및 사회들 사이의 권력관계 문제다.” 그는 대규모 기아 사태가 기근 정의의 필요조건이라는 맬서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한다. 굶주림, 빈곤, 사회 붕괴 등 더 광범위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지지하는 것이다. 기근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 이해방식이 바로 이렇다. 이들은 영양실조와 기근, 가난과 기아의 말뜻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근으로 공인된 곳에는 원조를 쏟아 부으면서 전 세계 유아사망률의 절반을 차지하는 만성 영양실조는 냉담하게 무시해버리는 부국들의 윤리적 계산법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 문제는 가난한 농민 수천만 명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상당히 모순되는 이유와 방식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노동력과 생산물이 런던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에 징발되던 특정 시기(1870~1914년)에 열대 지방의 인류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근대 세계의 경제와 정치 구조에 강제로 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 그들은 자유 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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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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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도도의 노래>를 통해 절멸돼가는 동물들의 비명, ‘슬픈 멸종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내 동족이 죽어간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 어렵다.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 맬서스식 위기론이 통용될 정도로 인구가 많아 지구가 터질 지경인데 인간의 멸종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희귀종 개구리, 외딴 섬의 희귀 새를 생각하면서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역지사지가 아닌 역(逆) 발상으로, ‘인간 멸종 이후’의 세상을 그린다. 책은 ‘세상 모든 인간이 어떤 사정으로든 지구상에서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전망하고 있다. 인간을 지구상에서 몰아낸 것이 ‘어떤 사정’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혜성의 충돌도 좋고, 전 인류의 동시다발 휴거가 일어났다 해도 좋다. 아무튼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저자는 한국의 비무장 지대를 포함해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땅, 또 다른 DMZ인 키프로스, 터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거대한 파이프들이 미로처럼 얽힌 미국 텍사스의 석유화학지대, 뉴욕의 맨해튼, 용케도 살아남은 동유럽의 원시림 등을 돌며 인류가 남긴 흔적들이 지워지는 모습을 예측해보고 상상해본다.

책은 인간이 남긴 흔적들을 지구에 가해진 상처로 보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탄소발자국’이 될텐데, 인간이 남긴 것이 어디 탄소의 흔적 하나뿐이랴. 화석연료에서 뽑아낸 그 많은 석유화학제품, 지구의 순환 사이클에서 소화가 이뤄지지 못한 채 수채 구멍에 걸린 머리카락들처럼 걸려있는 플라스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인류가 지구에 던져준 부담이자 짐인 것을.

우리의 죄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우리 종족의 절멸 이후를 상상하는 과정은 신기할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하다. 맨해튼이 사라지고 텍사스 석유공장들이 터져나가는 장면, 우리 시대의 자랑거리들이 무너져 내려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장대한 폐허로 남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전해준다.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의 북키프로스에서 폐허가 된 시가지에 풀잎이 돋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 분단의 땅 한반도의 허리에 새로운 생태계가 탄생한 모습(그 땅 밑의 지뢰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은 상상이 아닌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언제 다시 ‘개발’이라는 이름의 상처내기가 시작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연은 치유력을 갖고 있다니, 글로벌 환경파괴의 시대에 우리 자신의 멸종을 상상하며 조금은 즐거워해도 되지 않을까.

저자가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들을 통해 유추해낸 바에 따르면 인류가 사라진 뒤 단 이틀 만에 뉴욕의 지하철역은 물바다가 되고, 일주일 뒤에는 원자로들이 고장 난다. 3년 후엔 건물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20년 뒤에는 파나마운하가 막혀 남북 아메리카가 합쳐진다. 100년 후 코끼리들이 스무 배로 늘어나고 300년 뒤엔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납이 토양에서 씻겨 내려가려면 3만5000년이 걸리고,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진화하기까지는 수십~수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구가 인간의 흔적을 모두 지우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50억년 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삼키고 난 뒤에도 인류가 남긴 방송 전파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상처를 내기는 쉬워도 치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록 영원히 우주공간을 떠돌 전파들을 내보내는 것까지 막진 못한다 하더라도(외계생명체들에게 공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막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생채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많기만 하다.

신문 북 리뷰들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책인데, 기대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써내려간 것은 대단한 작가적 소질이다. 역 발상을 통해 인류가 저지른 파괴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어떤 책보다도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세상을 발로 뛰며 전해준 소식들은 생생하고 알찼다. 저널리즘 교수인 저자는 ‘속보성’보다는 심층적인 정보와 ‘해석’이 점점 중요해져가는 시대에 글로벌 저널리즘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국내에 출간돼 있는 <가비오따쓰>를 통해 와이즈먼을 이미 접한 바 있지만, 이 책은 정말 훌륭하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책들은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지식’이다. 특히 기후변화라는 큰 테마에 밀려 상대적으로 요즘엔 관심권에서 멀어져가는 듯했던 플라스틱 문제를 비롯해, 각질제거제의 스크럽 알갱이들이 대부분 플라스틱이라는 놀라운 사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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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의 노래 1 - 도도가 들려주는 자연의 생존과 종말 이야기 김영사 모던&클래식
데이비드 쾀멘 지음, 이충호 옮김 / 푸른숲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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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는 거인, 난쟁이, 잡종 예술가, 그리고 온갖 종류의 비순응주의자들이 존재한다. 마다가스카르섬에는 몸길이가 겨우 1인치 밖에 안 되는 지상에서 가장 작은 카멜레온종(이것은 육상 척추동물 중 가장 작은 동물이다)이 살고 있다. 마다가스카르는 지금은 멸종한 피그미하마의 고향이기도 하다. 코모도 섬에는 거대한 도마뱀이 살고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바다를 헤엄치는 이구아나가 다른 파충류의 신체적 한계를 비웃으며 바다 밑에서 해초를 뜯어먹으며 살아간다. 뉴기니의 중앙 고원지대에서는 리본꼬리 풍조를 볼 수 있다.
인도양의 작은 산호섬 알다브라에는 갈라파고스 거북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용을 가진 큰거북이 살고 있다. 세인트헬레나섬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이언트집게벌레종-세상에서 가장 크고 또 아마도 가장 혐오스러운 벌레-이 살고 있었다. 자바섬에는 피그미코뿔소의 일종인 자바코뿔소가 살고 있으며, 하와이에는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기이한 새인 꿀빨이새가 살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잘 알다시피 캥거루와 유대류가 살고 있으며 태즈메이니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도 희귀한 유대류인 주머니곰, 베통, 숲왈라비, 주머니고양이 등이 살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산타카탈리나 섬에는 방울 소리를 내지 않는 방울뱀이 살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큰도마뱀 투아트라가 살고 있다. 모리셔스 섬에는 유럽인들이 침략해오기 전가지만 해도 도도가 살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멀리 모리셔스 섬에 살다간 도도라는 새는, 인류에게 “아, 내가 이 두 손으로 다른 종(種)을 지구상에서 멸종시켰구나”라는 인식을 최초로 갖게 해준 새로 유명하다. 물론 그 전에도 그 뒤로도 인간이라는 존재로 인해 멸종된 종들은 많았겠지만.
인간 덕분에 살아가는 숱한 종들도 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플러스 & 마이너스 ‘똔똔’이 되면 종 다양성 문제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텐데,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요사이 인간들은 멸종을 너무 많이 초래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구 전체로 보면 종의 숫자가 점점 마이너스 되어간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멸종시켜온 종의 리스트는 점점 길어만 간다. 멸종을 쉬운 말로 풀면, ‘다 죽었다’가 될 테니 결국 인간이 멸종시킨 종이란 것은 ‘인간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죽여버린 혹은 다 죽어버리게 만든(그거나 그거나) 동물들 목록’이 되는 셈이다.
몇 해 전 번역자이신 이충호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이 책 두 권을 선물로 받았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마음에 담아만 둔 채 책표지조차 넘겨보지 못한 채로 서너 해가 지난 듯싶다. 그러다가 빚 청산 하는 심정으로 책을 펼쳤는데, 이건 완전히 내 취향의 책이었다. 나온 지 시간이 좀 지난 터라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표지, ‘도도가 들려주는 자연과 생존의 종말 이야기’라는 판에 박힌 문구. 하지만 책은 폭이 넓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생생했다.



인류가 새로운 장소에 발을 디딜 때마다 사라져간 동물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라면, 모리셔스와 도도라는 새의 사라져간 존재는 극적이면서도 또 너무나 상징적이어서 식상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겠다. ‘자연 생태 저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저자는 타이틀로 붙잡아놓은 도도를 잠시 제쳐둔 채, 일반인들에겐 생소하게 들리는 ‘섬 생물지리학’이라는 생물학의 한 분야를 설명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윈의 갈라파고스, 도도가 있었던 모리셔스, 코끼리새처럼 커다란 새들이 살았다는 마다가스카르 같은 섬들. 생물학자들에게 섬은 진화와 종의 신비를 보여주는 자연의 ‘고립된 실험실’이다. 그런 섬들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섬 생물지리학이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구나 싶지만, 섬 생물지리학은 우리에게 ‘멸종의 노래’를 들려주는 학문이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1천 년 전 그 코끼리새는 이 세상에서 오직 마다가스카르 섬에만 존재하였다, 이제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섬) 생물지리학이 하는 일이다.”
생물지리학, 특히 섬 생물지리학은 멸종의 위기들을 찾아다니는 작업이고, 멸종을 목도하고 기록하는 작업인 셈이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큰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또 가장 큰 슬픔을 안겨주는 직업 중의 하나가 ‘섬 생물지리학자’라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저술가이면서 또한 스스로 섬 생물지리학자가 되어 마다가스카르와 아마존, 말레이 군도, 뉴기니, 코모도, 태즈메이니아 등지를 찾아다니며 개발의 소음에 가려진 멸종의 노래를 전해준다. 코모도 드래곤과의 조우, 서양 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다 살해당한 원주민 청년의 비극적인 스토리, 희귀종 원숭이를 보기 위한 여성 생물지리학자의 집념 등을 소개한다.

세상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종들의 이야기를 담은 ‘생태 여행기’ 정도로만 읽어도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고 넘기기엔 2권짜리 책은 적지 않은 분량이다. 알짜배기 책들은 꼭꼭 씹어서 단물을 다 빨아내야만 수지가 남는다. 더군다나 이 책은 ‘단물’ 정도가 아니라 진수성찬을 차려주는 책이다.
이 책은 멸종이라는 것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종들에게 들이닥치는지에 대한 현장보고서다. 저자는 좀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다종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멸종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분석해나간다. 그러니 인간은 멸종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광범위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인류가 종 다양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멸종의 서사시, ‘도도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것은 섬 생물지리학을 통해 인류에게 멸종의 경고장을 던진 학자들의 논쟁이다. 개미학자이자 국내에서는 ‘통섭’을 주창한 사람으로만 잘못(?) 알려진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총, 균, 쇠’와 ‘문명의 붕괴’로 유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의 ‘진짜 공적’이 나온다. 책의 후반부에는, 쟁쟁한 이름들과 함께 ‘멸종을 막기 위한 생태계의 최소 면적’에 대한 다층적인 논쟁이 소개된다.
자연에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실용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이른바 ‘생물보호구역’을 최소한 얼마 이상 남겨둬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들의 인색한 자연 접근법에 대한 논쟁이 되는 것이고, 넓게 보면 자연의 재생력을 보전하기 위한 인간의 최소한의 의무로서 멸종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하다. 책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생물학자들의 여러 연구들을 소개함으로써 인색한 인류가 다른 생물종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개략적으로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어쨌든 도도는 멸종했다. 인간들은 아프리카 연안 작은 섬에 살고 있던 이 덩치 큰 새들이 더 이상 지구상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 못하게끔 모두 죽여버렸다. 몇 해 전에는 열대의 불쌍한 개구리 한 종류가 지구상에서 최초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멸종된 것이 확실한’ 종으로 기록됐다. 흥미롭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저자의 순례기에 등장하는 한 곳은 태즈메이니아다. 거만한 정복자들이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 그러니까 ‘인간 한 종’을 멸종시켰던 곳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종들 뿐 아니라 문화의 종들, 언어의 종들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에게까지 절멸의 칼날을 들이대왔던 것이다.
멸종의 순례기 끝에 저자는 도도의 고장에서 몇몇 사람들의 노력 덕에 힘겹게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모리셔스황조롱이’의 사례를 전한다. 비록 미약하나마 희망은 있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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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전 지구적 통합의 역사
나얀 찬다 지음, 유인선 옮김 / 모티브북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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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주고픈 책이다. 이렇게 열심히 썼다는 자체만으로. 책 겉모양도 훌륭하고, 이 정도면 ‘고전’ 급은 아니어도 이것저것 묶어놓은(‘짜깁기’라고 하면 좀 비하하는 감이 있으니까 이런 표현으로 바꾼다) 책으로는 꽤 괜찮다.
목차를 보면 알수 있겠지만, 제목 그대로 ‘세계화, 전지구적 통합의 역사’를 한눈에 훑어보려는 사람에겐 훌륭한 1차 교과서가 될 수 있겠다. 아니, ‘2차 도서’들을 안 읽고 그냥 이 한권으로 세계화의 기나긴 역사를 정리하고 만족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더욱 더 요긴할 것 같다(그러고 보니 요즘엔 세계화를 근대 이전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유행인 것 같다).


1차, 2차 도서 운운한 것은 이 책이 말 그대로 ‘정리요약본’이기 때문이다. 책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DNA의 이주경로를 살피고(브라이언 사이키스의 <이브의 일곱 딸들>과 루이 카발리-스포르차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중세 유라시아의 무역상들의 행로와 부(富)의 이동을 개괄한 뒤(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인도의 콜센터’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현장(토머스 프리드먼 <세계는 평평하다>)을 짚어간다.
중간 중간 세균 이야기(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와 재러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도 나오고 무기 이야기도 나오고, 사회문화적 측면도 간간이 짚어준다. 읽기 지루하지도 않고 분량도 ‘적당히 방대하면서 적당히 요약본인’ 수준이니까 참 좋다.


그런데 굳이 저렇게 내가 괄호 열고 내가 읽은 책들 이름을 넣어가며 잘난 척을 한 것은, 저 괄호 속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겐 이 책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기 언급한 책들을 읽고나서는, 그 뒤에 읽은 책들 상당수가 재미 없어져버렸다. 돌고 도는 참고문헌의 목록이 이젠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잘 정리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별로 뼈다귀를 건질 게 없는 책이 돼버렸다. 내용이 참신하면 뼈다귀를 건지고 사례가 방대하면 살붙이들을 건지는데, 이 책은 정리요약본이니 반찬거리도 많이 건지진 못했다. 책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그랬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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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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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건의 글은 항상 울림이 있다. 신간 좋아하는 내가 이미 돌아가신 세이건 박사님의 책을 뒤늦게 골라가며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그런 울림 때문이다.

UFO를 신봉하는 사람들, 외계인들에게 납치됐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동향 같은 것은 너무나 미국적인 현상들이어서 크게 다가오지 않았으나(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착각일 뿐이라고 저자도 지적하지만), 꼭 UFO 얘기가 아니더라도 ‘비과학적인 사람들’은 너무너무 많다. 개신교 골수 신자들, 점 보러 다니는 사람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건 그렇다 치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과학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해도 해도 정말 너무 비과학적인 얘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과학 지식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과학적 접근’, 그러니까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돌이켜보며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고서 세상을 살아야 할 필요가 점점 커지고 있다. 당장 지금 문제가 되는 광우병이니 조류독감이니 유전자변형 농산물이니 하는 것들에서부터 어린아이 어떻게 과외 시키고 두뇌개발을 해서 머리 속에다가 지식을 쑤셔 박고 하는 것들까지, 한발 물러서서 ‘과학적으로’ 생각을 좀 해봐야 하는 일들은 산더미처럼 많다.

세이건 박사님이 얘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후지따 쇼오조오가 ‘철학하는 법’에서 얘기했던 것들하고도 일맥상통한다. 곱씹어보고 뒤집어보고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얘기다.

“과학은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과학 스스로는 인간 행위의 방향들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대안적인 행위 방향들에게서 비롯될 가능성 있는 결과들은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아무리 이단적이라도 새로운 아이디어라면 무제한적으로 개방적일 것과 가장 엄격한 태도로 회의적으로 검토할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성의 지혜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변화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본질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인간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바란다. 인간은 절대적 확실성을 동경한다. 그러나 과학의 위대한 계명 중의 하나는 ‘권위에 의해 지탱되는 논변을 신뢰하지 마라’이다.”

그래서 과학이 없는 세상, 무시당하는 세상, 혹은 거짓 과학이 판치는 세상에는 광기가 돈다.

“모든 시대는 그 나름의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가 갑자기 시작한 거대한 계획이나 소규모 계획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공상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이득을 보려는 욕심에 의해서 또는 자극이 필요해서 아니면 단순히 모방력에 의해 박차가 가해진다. 이러한 것들에 빠지면 그 시대는 약간 광기를 보인다. 그러한 광기는 정치적 원인이나 종교적 원인 또는 양자가 결합된 원인에 의해 선동된다.”

생각은 자꾸자꾸 뻗어나간다. 우리 시대의 광기는 신문만 펼치면, 창밖만 열면 보인다. 이명박, 기독교, 이제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걱정되는 것은 그런 사기꾼이 매력적이고 위엄있고 애국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지도자를 지지하고 믿고 따를 기회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대부분의 기자들, 편집자들, 제작자들은 진정한 회의적인 정밀조사를 내던져버릴 것이다. 그런 지도자는 기도나 마법사의 수정이나 눈물을 팔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전쟁이나 희생양 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믿음의 다발을 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광우병 정치인들을 생각하며 울고 싶어질 지경이다.

“과학의 가치는 숨기거나 감추지 않는 데 있다. 과학은 특별히 유리한 조건이나 특권적 지위를 고집하지 않는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모두 판에 박히지 않은 의견과 활기찬 논쟁을 장려한다. 과학은 겉으로만 지식을 추구하는 척하는 이들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길이다. 과학은 신비주의에 대항하고 미신에 대항하며, 무관한 영역에 잘못 적용된 종교에 대항하는 보루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건 과학은 필요하다.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도 ‘과학적인 태도’는 필요하다. 생각, 또 생각.

“보통 보수주의적 혹은 근본주의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반증된 문제들에 대해서도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들에겐 과학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다.

종교지도자와의 신학적 토론에서, 나는 그들에게 만일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과학에 의해 반증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곤 했다. 이 질문을 달라이 라마에게 던졌을 때, 그는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종교 지도자라면 하지 못했을 답변을 해주었다. 즉 만일 그렇게 된다면, 티베트의 불교는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정말로 핵심적인 교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과학이 무엇을 더 알아낼 것인지 걱정하는 또다른 교리와 이해관계 그리고 관심이 있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모르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제안한다. 만일 남성과 여성이 다른 유전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실로 사용되지 않겠는가? 만일 폭력 성향에 유전학적인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한 민족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혹은 예방적 차원에서 미리 제거해버리는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가 진리에 최고로 가까운 근사치를 알게 되고 어떤 이익집단이나 믿음 체계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날카롭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거짓말 혹은 숨겨진 사실이 보다 고차원의 사회적 목적에 기여할 것인지 어떨지를 미리 알 정도로 현명하지 않다. 특히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과학에 대한 열정, 남아 있는 수렵채집가들에게서 얻은 교훈은 바로 다음과 같다. 과학적 성향은 어느 시대, 어느 곳, 어느 문화에서든 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 수단이고, 천부적 소질이다.”

“시민권자로서의 본분은 위협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민자들의 시민권 선서와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암송하는 맹세에 ‘나는 지도자들이 내게 말하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을 약속합니다’ 같은 것이 포함됐으면 한다. ‘나는 나의 비판 능력을 사용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나의 사고의 독립성을 개발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교육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래서 세이건 박사님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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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과학적 나라에 사는 슬픔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6-14 09:22 
    *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2008년 6월 13일자 딸기님의 리뷰에서 발췌  “과학은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과학 스스로는 인간 행위의 방향들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대안적인 행위 방향들에게서 비롯될 가능성 있는 결과들은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아무리 이단적이라도 새로운 아이디어라면 무제한적으로 개방적일 것과 가장 엄격한 태도로 회의적으로 검토할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성의 지혜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할 것을
  2. 과학에 대한 변호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03 16:20 
    * 과학에 대한 변호  미국 쇠고기 수입에 허가 조치에 따라 촛불 시위가 한창 있을 당시 저는 촛불 시위를 정치적 항변으로 보았습니다. 저의 의견은 당시에 백안시당했으나 알라딘 서평을 볼 때 현재는 과학적 논쟁보다는 정치적 논쟁으로 인식이 전환되었다고 봅니다. (저의 개인적인 인식에 의하면) 보다 논쟁의 본질에 접근했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는 것도 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 서평  
 
 
마립간 2008-06-1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러운 것은,... 보수주의(?미국소를 현재 조건을 수입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촛불 집회를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며 딸기님의 리뷰에 동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딸기 2008-06-1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문제는 광우병 자체보다도 저 정부의 행태인 거겠죠.

dd 2009-10-22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 학계에서 광우병에 대한 결론은 잠정적 소강상태 정도이지.. 아직까지 확정된 게 없습니다. 광우병이 극단적으로 위험하다는 주장도 맞진 않지만, 99.9% 안전하다느니 어쩌구하는 건 바보같은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