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읽은 <도도의 노래>를 통해 절멸돼가는 동물들의 비명, ‘슬픈 멸종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내 동족이 죽어간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 어렵다.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 맬서스식 위기론이 통용될 정도로 인구가 많아 지구가 터질 지경인데 인간의 멸종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희귀종 개구리, 외딴 섬의 희귀 새를 생각하면서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역지사지가 아닌 역(逆) 발상으로, ‘인간 멸종 이후’의 세상을 그린다. 책은 ‘세상 모든 인간이 어떤 사정으로든 지구상에서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전망하고 있다. 인간을 지구상에서 몰아낸 것이 ‘어떤 사정’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혜성의 충돌도 좋고, 전 인류의 동시다발 휴거가 일어났다 해도 좋다. 아무튼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저자는 한국의 비무장 지대를 포함해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땅, 또 다른 DMZ인 키프로스, 터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거대한 파이프들이 미로처럼 얽힌 미국 텍사스의 석유화학지대, 뉴욕의 맨해튼, 용케도 살아남은 동유럽의 원시림 등을 돌며 인류가 남긴 흔적들이 지워지는 모습을 예측해보고 상상해본다.

책은 인간이 남긴 흔적들을 지구에 가해진 상처로 보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탄소발자국’이 될텐데, 인간이 남긴 것이 어디 탄소의 흔적 하나뿐이랴. 화석연료에서 뽑아낸 그 많은 석유화학제품, 지구의 순환 사이클에서 소화가 이뤄지지 못한 채 수채 구멍에 걸린 머리카락들처럼 걸려있는 플라스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인류가 지구에 던져준 부담이자 짐인 것을.

우리의 죄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우리 종족의 절멸 이후를 상상하는 과정은 신기할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하다. 맨해튼이 사라지고 텍사스 석유공장들이 터져나가는 장면, 우리 시대의 자랑거리들이 무너져 내려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장대한 폐허로 남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전해준다.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의 북키프로스에서 폐허가 된 시가지에 풀잎이 돋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 분단의 땅 한반도의 허리에 새로운 생태계가 탄생한 모습(그 땅 밑의 지뢰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은 상상이 아닌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언제 다시 ‘개발’이라는 이름의 상처내기가 시작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연은 치유력을 갖고 있다니, 글로벌 환경파괴의 시대에 우리 자신의 멸종을 상상하며 조금은 즐거워해도 되지 않을까.

저자가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들을 통해 유추해낸 바에 따르면 인류가 사라진 뒤 단 이틀 만에 뉴욕의 지하철역은 물바다가 되고, 일주일 뒤에는 원자로들이 고장 난다. 3년 후엔 건물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20년 뒤에는 파나마운하가 막혀 남북 아메리카가 합쳐진다. 100년 후 코끼리들이 스무 배로 늘어나고 300년 뒤엔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납이 토양에서 씻겨 내려가려면 3만5000년이 걸리고,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진화하기까지는 수십~수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구가 인간의 흔적을 모두 지우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50억년 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삼키고 난 뒤에도 인류가 남긴 방송 전파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상처를 내기는 쉬워도 치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록 영원히 우주공간을 떠돌 전파들을 내보내는 것까지 막진 못한다 하더라도(외계생명체들에게 공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막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생채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많기만 하다.

신문 북 리뷰들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책인데, 기대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써내려간 것은 대단한 작가적 소질이다. 역 발상을 통해 인류가 저지른 파괴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어떤 책보다도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세상을 발로 뛰며 전해준 소식들은 생생하고 알찼다. 저널리즘 교수인 저자는 ‘속보성’보다는 심층적인 정보와 ‘해석’이 점점 중요해져가는 시대에 글로벌 저널리즘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국내에 출간돼 있는 <가비오따쓰>를 통해 와이즈먼을 이미 접한 바 있지만, 이 책은 정말 훌륭하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책들은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지식’이다. 특히 기후변화라는 큰 테마에 밀려 상대적으로 요즘엔 관심권에서 멀어져가는 듯했던 플라스틱 문제를 비롯해, 각질제거제의 스크럽 알갱이들이 대부분 플라스틱이라는 놀라운 사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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