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의 충돌 - 아메리코필리아와 옥시덴털리즘을 넘어
타리크 알리 지음, 정철수 옮김 / 미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타리크 알리, 라는 이름 때문에 책을 사놓았던 것인데 어째 표지나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좀 그랬다. 쿨 하게 보이지가 않아서 그냥 놓아두고만 있었다. 요사이 다시 '이슬람 주간'이라서 책장을 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타리크 알리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저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란 것은 거의 '정체성의 충돌'로 점철돼 있는 듯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이슬람권 사람'이다. 인도의 명문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아니다.

명문가의 좌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무신론자 아들. 또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출생했지만 명문가의 아들답게 영국에 가서 공부한, 즉 식민통치의 아픔과 수탈보다는 특혜와 서구화의 혜택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사람이다(그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했다. 알리네 집은 아마도 대단한 명문이었던 모양이다. 파키스탄 독립의 아버지 무하마드 알리 진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자와할랄 네루, 파키스탄의 군부독재자 지아 울 하크, 줄피카르 부토와 그 딸 베나지르 같은 당대의 정치가들이 모두 그의 '지인'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리는 이슬람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랍인은 아니다. 그의 가문의 토양인 인도-파키스탄은 무굴의 이슬람 문화와 인도 고유의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므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변방이라 할만하다. 어쨌든 그는 다양한 정체성의 갭들 사이를 넘나들었고, 이슬람세계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아주 폭넓고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지적했듯, 알리는 무슬림이 아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세계 대부분이 이 제국(미국)을 '착한 나라'로 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작정이다'라고 밝힌다. 그는 종교적 근본주의 자체를 '근대성의 산물'로 정의하면서, '두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제국의 횡포를 비판하고, 또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를 비판한다. 그 광기에 몸을 내던지고도 반성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쪽이 워낙 신랄해서, 전세계의 무지한 친미주의자들보다는 '이슬람 동포'들에게 읽히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좋았던 것은, 앞서 지적한 알리의 독특한 내력 덕분에 '안에서 보는 바깥의 시선'으로 이슬람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점. 이슬람 주요 국가들의 지나온 사정을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지적을 해놨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됐다. 덕택에 니자르 카바니의 시들을 읽게 됐으니, 그건 덤으로 얻은 수확.

짧은 이야기 한 토막.

 

1920년대 카슈미르 지식인들이 농민들의 참상을 부각시킨 이야기 중 하나는 마하라자(왕)가 캐딜락을 구입한 일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전하가 페할감으로 차를 몰고 갔을때, 감탄한 농민들이 자동차 주위로 몰려들어서 그 앞에 신선한 풀을 흩뿌려놓았다. 마하라자는 농부들이 자동차를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몇몇 농부가 울기 시작했다. "왜 울고 있느냐?" 통치자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농부 한 명이 대답했다. "전하의 새로운 동물이 도대체 풀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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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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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때 동화책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아마도 이 책, '작은 책방'의 서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먼지 쌓인 다락방 냄새가 나는 듯했던 그 글, 저렇게 책 속에 쌓여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경. 어른이 된 지금도 '보리와 임금님'의 한 구절 한 구절, 머리를 길게 기른 일곱 공주 이야기, 서쪽 숲나라에 나오는 명랑한 하녀와 무뚝뚝한 임금님 이야기를 언제건 떠올릴 수 있다.

또래 사람들(아저씨, 아줌마들)과 엘리너 파전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이 책을 꺼내어 읽어봤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그 느낌은 별로 살아있지 않았다. 책은 그대로인데 나는 나이를 먹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특히 기대했던 '서쪽 숲나라'의 느낌이 예전같지 않아 섭섭했다. '우리말 다듬기 이오덕'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말을 너무 다듬어서일까. 아이들용--당연한거지만--의 친절한 존대말투가 오히려 감정을 퇴색시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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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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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반전 모드 타고서 촘스키 책이 하도 많이 나와 요새 좀 지겨워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래오래 붙들고 있다가 오늘에야 뗐다. 하도 오래 붙잡고 있다보니 군데군데 포스트잇 붙여둔 페이지를 펼쳐봐도, 대체 왜 붙여놨는지를 모르겠다. '예의' 촘스키식 세상보기는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유행처럼 상품화되어버렸기 때문일까. 다만 번역은 참으로 훌륭하다. <숙명의 트라이앵글> 때문에 열받았던 생각을 하면-- 이 책 번역은 정말 칭찬할만 하다.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밍고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질질 끌고 또 끌어서 별다른 감흥 없었지만 저 구절은 스크랩해두고 싶다. 아이티라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 아닌가. 그런데 저 구절을 읽으니 갑자기 그 나라가 조금, 아주 조금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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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2004-03-0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명의 트라이앵글 절판됐더군요. 비싼 돈 주고 읽다만걸 생각하면...으으 돈아까워라,,,이 책은 번역이 잘되었다니,,땡기는군요.

딸기 2004-03-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동과 관련된(?) 학계에서, 트라이앵글 번역한 분이, 저 책 번역 잘못한 것 때문에 완전히 망신당했다고 들었어요. 출판사에서 부랴부랴 절판시켰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히 팔아치운 뒤였다죠. 그쪽 학계에 계신 분한테 들었어요.
<507 정복은 계속된다>는 번역 추천 만빵입니다. 실은 번역자가 저하고 절친한 분인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번역 잘 했어요. 오죽하면, 저 책 읽은 제 친구는, 저 번역자 팬하겠다고 했을 정도. 그 친구도 트라이앵글에 완전히 데었더랬거든요. ^^
 
존재하는 무, 0의 세계
로버트 카플란 지음, 심재관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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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와 없음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숫자 '영(0)'이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는 0이라는 숫자를 통해 존재의 역설을 증명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살핀다.저자는 0이라는 숫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고대유적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돌며 0이 남긴 자취와 그것이 취해온 다양한 형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시간과 사상의 강물을 헤쳐온 0의 여정'은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비를 넘나든다. 바빌로니아에서 탄생한 0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렸다. 숫자에 기하학적(시각적)으로 접근했던 피타고라스 시대의 수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0을 보는 투시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0은 인도에 가서 다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카, 수냐, 아카사, 암바라 같은 여러가지 이름을 거느리고. 0은 장소를 옮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만한 없음'이라는 인도 특유의 공(空) 사상과 맞물리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 건너 마야에서 이 불가사의한 존재는 시간과 결합돼 어둠의 주술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시간의 메커니즘에 집착했던 마야인들의 순환론적 세계관,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시간의 주기성이 이 곳에서 0을 이해하는 열쇠다. 0은 달력의 첫 장과 끝 장 사이, 시간의 주기가 끝나고 시작되는 교차점에 위치한 불길한 숫자.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얼굴을 한 0의 앞에 제물을 바쳤다.

중세 유럽으로 건너가면 0은 신비로운 연금술과 만난다.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를 운운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0은 악마였다. 그러나 0은 '살아남았다'. 수학(이성)의 시대가 종교의 시대를 흔들기 시작하고 오늘날 보는 것과 유사한 방정식이 등장하면서 0은 드디어 문제의 해답을 주는 친구, '인수분해라는 춤의 안무자'가 된다. 미분적분 단계에 오면 0은 '극한'이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안내자로 모습을 바꾼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을 기호화하는 과정을 통해 수학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합성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작업을 거듭 거치면서(반복적 추상화) 인간은 '현재 바라다 보이는 전망을 뛰어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당나귀가 사자가 되고 싶어하듯 허풍을 떨며 마치 자기가 숫자인 것처럼 행세했던 0이라는 놈'(15세기 프랑스 문헌)은 당당히 숫자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넘어, 위계질서에 젖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알레고리와 변화의 리듬을 부여하는 존재로 격상된다.숫자의 세계를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수학책'이다. 이 책의 묘미는, 수학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한껏 찔러준다는데 있다. '인류의 역사는 0의 역사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상상력과 이성이 만나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며 이 세계를 이끌어왔다'고 하면 그럴듯한 얘기로 들리지 않겠는가.

역사의 강물을 따라 흘러온 독자에게 저자는 재미난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無)'라는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을까? 뒷부분에서 저자는 '완벽한 진공'을 포함해 '무'를 눈으로 보고 싶어했던 과학자들의 몇가지 실험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영, 즉 '무'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는 없을까. 공간의 끝과 시간의 시작이 만나는 곳, 우리의 0이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없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옴팔로스(세계의 배꼽)는 어디일까.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라.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0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20세기의 거인이 서있다. 때로는 악마의 얼굴로, 때로는 산술판의 빈 자리로, 때로는 열쇠로 여겨졌던 0은 최근 들어 '1'이라는 짝을 만났다. 디지털 세상을 이끄는 코드,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 하는 0의 위력은 21세기에 더욱 커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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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거닌 날들
막심 고리키 지음, 한은경, 강완구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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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거닌 날들.(Reminiscenes of Lev Nikolaevich Tolstoy).톨스토이, 그리고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만 보고 선뜻 책을 집어들었다. 톨스토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어릴 적 읽었던 바보 이반 류의 동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따위 몇개의 단편들 외에는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톨스토이라는 이름이 내 맘을 움직인 것은 마하트마 간디 때문이다. 얼마전 간디 전기에서 톨스토이와 간디의 대화(편지라는 매개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를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그렇다면 톨스토이와 고리키의 대화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으려나.

막심 고리키. 그 이름 하면 또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싶어서 서점을 뒤졌었다. 나는 고리키가 그냥 위대한 작가인 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에서 그의 책이 정식 출간되어 판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뭘 모르는 10대 소녀는 동네 서점들을 찾아다니며 '<어머니>라는 소설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펄 벅의 <어머니> 밖에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을 수 있었는데 인상적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사실 내 기대에는 못 미쳤다. 그 소설의 제목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탓일까, '읽고픈 욕망을 오래 묵혔다 읽은' 만큼의 감동은 없었고 다소 교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고리키의 또다른 작품(제목은 생각 안 남)을 읽었는데 비슷한 감상을 가졌었다(여담이지만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역시 시대의 차이 때문인지 그저 그랬었다).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은 고리키가 톨스토이와의 대화, 톨스토이를 보면서 느낀 것들, 톨스토이가 숨진 뒤의 회고 등을 적은 것이다. 짤막한 글들과 뒷부분 추모사 비슷한 회고담으로 구성돼 있다. 톨스토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현자의 공격에 상처 입을 때마다 약간씩 뒤틀리는 심사를 숨김없이 드러내놨다. 글 속에 나타난 톨스토이는 아주 지적이고 위대한 문인인 동시에,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다중적인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리키는 존경해 마지 않았던 레프 니꼴라예비치(톨스토이의 이름)를 가리켜 '늙은 마술사'라는 표현을 썼다. 톨스토이의 말에 고리키의 글이니, 책은 당연히 멋지고 아름답고 재미있으면서 때로는 조금 고약하다. 하지만 짧은 글에 너무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놓고 나같은 무식자의 <감상>을 적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고리키가 톨스토이를 회고하며 한 말을 옮겨놓는다. '이 사람이 여기 살고 있는 한 나는 지구의 고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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