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무, 0의 세계
로버트 카플란 지음, 심재관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와 없음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숫자 '영(0)'이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는 0이라는 숫자를 통해 존재의 역설을 증명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살핀다.저자는 0이라는 숫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고대유적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돌며 0이 남긴 자취와 그것이 취해온 다양한 형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시간과 사상의 강물을 헤쳐온 0의 여정'은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비를 넘나든다. 바빌로니아에서 탄생한 0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렸다. 숫자에 기하학적(시각적)으로 접근했던 피타고라스 시대의 수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0을 보는 투시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0은 인도에 가서 다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카, 수냐, 아카사, 암바라 같은 여러가지 이름을 거느리고. 0은 장소를 옮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만한 없음'이라는 인도 특유의 공(空) 사상과 맞물리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 건너 마야에서 이 불가사의한 존재는 시간과 결합돼 어둠의 주술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시간의 메커니즘에 집착했던 마야인들의 순환론적 세계관,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시간의 주기성이 이 곳에서 0을 이해하는 열쇠다. 0은 달력의 첫 장과 끝 장 사이, 시간의 주기가 끝나고 시작되는 교차점에 위치한 불길한 숫자.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얼굴을 한 0의 앞에 제물을 바쳤다.

중세 유럽으로 건너가면 0은 신비로운 연금술과 만난다.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를 운운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0은 악마였다. 그러나 0은 '살아남았다'. 수학(이성)의 시대가 종교의 시대를 흔들기 시작하고 오늘날 보는 것과 유사한 방정식이 등장하면서 0은 드디어 문제의 해답을 주는 친구, '인수분해라는 춤의 안무자'가 된다. 미분적분 단계에 오면 0은 '극한'이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안내자로 모습을 바꾼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을 기호화하는 과정을 통해 수학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합성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작업을 거듭 거치면서(반복적 추상화) 인간은 '현재 바라다 보이는 전망을 뛰어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당나귀가 사자가 되고 싶어하듯 허풍을 떨며 마치 자기가 숫자인 것처럼 행세했던 0이라는 놈'(15세기 프랑스 문헌)은 당당히 숫자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넘어, 위계질서에 젖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알레고리와 변화의 리듬을 부여하는 존재로 격상된다.숫자의 세계를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수학책'이다. 이 책의 묘미는, 수학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한껏 찔러준다는데 있다. '인류의 역사는 0의 역사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상상력과 이성이 만나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며 이 세계를 이끌어왔다'고 하면 그럴듯한 얘기로 들리지 않겠는가.

역사의 강물을 따라 흘러온 독자에게 저자는 재미난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無)'라는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을까? 뒷부분에서 저자는 '완벽한 진공'을 포함해 '무'를 눈으로 보고 싶어했던 과학자들의 몇가지 실험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영, 즉 '무'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는 없을까. 공간의 끝과 시간의 시작이 만나는 곳, 우리의 0이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없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옴팔로스(세계의 배꼽)는 어디일까.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라.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0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20세기의 거인이 서있다. 때로는 악마의 얼굴로, 때로는 산술판의 빈 자리로, 때로는 열쇠로 여겨졌던 0은 최근 들어 '1'이라는 짝을 만났다. 디지털 세상을 이끄는 코드,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 하는 0의 위력은 21세기에 더욱 커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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