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이 만화를 감히 별점 다섯개 정도로 끝내버릴 수 있을까? 처음 이 만화를 고르게 된 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느새 이 만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부류에 들어와 있었고, 나는 34권 전질을 꼬박 다섯번을 읽었다. 이 엄청난 흡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잊고 지내온, 그러나 내게도 틀림없이 있었을, 아니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를 '청춘'이라는 것의 위대한 영향력이고, 이 책은 청춘들에게 바치는 가장 멋진 찬사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줄곧 열일곱(고교 1학년)의 나를 생각했다. 나한테도 열일곱살이 있었을텐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바다 건너온 만화책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내 마음은 H2를 만나는 순간 마구 흔들려서, 공중을 떠돌았다. 머릿속마저, 야구공처럼 어딘가를 한정없이 날아다녔다.
열일곱살. 그 나이를 떠올리면서 칙칙한 교실과 여고괴담 분위기의 유관순 초상화, 무거운 도시락통 같은 걸 떠올려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래서 난 좀 다른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열일곱살 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9월17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면, 올림픽 개막식 날이었으니까. 올림픽 공원에 갔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추억거리가 그날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속에는 열일곱살에 대한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을 이어주는 건 강경옥 식으로 그려본다면 '약간 희뿌연 공기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다.  

그래도 좋지. H2의 주인공은 히로와 히데오다.  그리고 두 여학생 히까리와 하루까. 2쌍의 H2의 열일곱살 청춘스케치다.
유난히 성숙이 빠른 히까리와 유난히 성장이 느렸던 히로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소꼽친구 사이. 그런데 코흘리개였던 히로는 중학교의 어느 순간에 히까리와 비슷한 키로 훌쩍 자랐다. 히까리가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세상에, 중2라는 나이도 이미 '너무 늦은 나이'였다. 히로한테는.  

겉으로 보면 전국고교야구대회를 둘러싼 히로와 히데오의 경쟁과 우정을 그린 '야구만화'인데, 속을 보면 10대들의 성장을 담은 '사춘기 만화'다. 사춘기 아이들의 미묘하고 복잡하고 돌발적인 심리를 너무 잘 그려내서 기가막힐 정도다. 또 몹시 웃기다. 아주아주 코믹해서, 진짜로 혼자 만화책 들고 데굴데굴 구르며 봤다. 무려 34권이나 되는 책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게 만든다. 그림은, 요즘 우리나라의 잘난척하는 만화작가들이 이미 옛날에 집어치운 소년중앙風의 명랑순정 터치다.

히데오의 야구감독이 독백처럼,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열일곱살은 너무 좋은 때이지만, 너희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열일곱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까...그렇다. 적어도, '그런것 같다'. 열일곱살 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난 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재미있으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지겨운 학교, 입시, 어느 학교에나 있던 '미친 개' 선생, 학교 올라가는 힘든 언덕길, 그런것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이미 지나온 길이기 때문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내가 히로라면, 혹은 히까리라면, 하루까라면 하는 생각은 정말 유아적인 상상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부럽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부러운 열일곱살. 오랜만에 '나의 사춘기'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참 동안 학교 복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머리속에서 안 지워져서, 붕 떠오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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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물고기 2004-11-1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2 재밌죠^^ 전 고등학교때 터치를 읽었어요. 분위기가 너무너무 맘에 들었고 그 만화책 번역이름으로 바다인 쌍둥이 동생이 죽었을때, 나중에 하늘이 갑자원 진출할 때, 등등은 또한 너무 감동적이어서 야자 빼먹고 나와 다시 읽고 다시 읽고 그랬죠. ^^;;

아다치의 다른 만화론 러프 역시 추천. 벌써 보셨나?



근데, 딸기님. 여기서 이렇게 놀고 계셨군요... -- 타조

딸기 2004-11-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조라니... 혹시 또*니?

까만물고기 2004-11-14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하옵니다..

딸기 2004-11-1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만물고기라니... ㅋㅋ 그럼 난 무지개도마뱀이다 ^^
 
숨겨진 질서 - 복잡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존 홀런드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재미로 따지면 이 책은 무조건 별 다섯개다.

숨겨진 질서(Hidden Order).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질서(작동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얘기도 되고, 반대로 작동원리가 꼭꼭 숨겨져 있어서 정말 찾아내기 힘들다는 얘기도 될성 싶은데.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는 바로 그같은, 꼭꼭 숨겨져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질서를 찾는 작업이다.

복잡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거다. '복잡적응계(CAS)'라고 이름붙인, 보통 복잡계라는 말로 표현되는 아주 복잡한 세계를 대상으로 그 세계의 질서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뉴욕시와 같은 거대한 도시에서 어느날 빵 공급이 잠시 중단되는 등의 '사소한' 실수도 없이 어떻게 모든 일들이 제대로 되어나가는지(물론 테러참사와 같은 일도 있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지구는 생태적인 도전에 어떻게 응대하는지, 조그마한 아메바 따위가 존재하던 곳에 어떻게 인간 같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생물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하는 것들을 파헤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복잡계라는 개념 자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거기에 '유전알고리듬'이니 비트니, 또 숱한 공식들이 나오면 상당히 머리가 아프다. 허나!(경빈 version) 미 MIT 출신의 물리학자인 홀런드는 이 복잡한 세상을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낸다.

복잡한 세상의 질서를 깨우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한 것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작은 단세포 생물과 같은 기초적인 '행위자'를 설정해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것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전자 조합이 어떻게 교차되고 변형되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 작동하는 원리를 조금씩 복잡하게 만들어보고, 그렇게 해서 최초에 극히 단순했던 '계'를 복잡계로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질서)에 맹점은 없는지, 이 작은 '계'의 설정과정에 모순은 없는지를 현대 물리학의 여러 성과들을 바탕으로 꼼꼼이 검토해 설명하는데, 꼭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작은 생물들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 과정은 실제로 아메바를 실험실에 데려다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머리 속의 계산과 상상을 통해 이뤄지는 일종의 탐험이자 게임인데, 책에 나오는 다양한 공식과 유전자 표현을 모두 해석해보지 않고(완전히 이해할 능력도 없지만--;;) 핵심 길잡이만 따라가도 줄거리를 너끈히 소화할 수가 있다.

굉장히 어려운 모형화 과정을 쉽게 설명해놓은 이 책에 대해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홀런드가 수십년동안 쌓아온 연구성과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극찬했다.
그 말 그대로, '생동감 넘치는 지성'이다. 컴퓨터공학과 생물학, 경제학, 수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활달한 섭렵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형을 만들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복잡계의 '진화'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세상을 이런 눈으로 볼 수도 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통찰, 꿰뚫어보고 살펴보는 그 능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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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핀치의 부리(The Beak of Finch). 네이처지에서 '그동안의 과학저술 중 최고'라고 격찬했다고 책 뒤표지에 써있는데, 정말 네이처지에 그런 서평이 나왔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어떤 호평을 붙여도 이 책을 다 칭찬하기에는 미흡할 거예요.

계속 도는 칼, 보이지 않는 해안, 보이지 않는 문자들, 낯선자의 힘, 특별한 섭리...이 책의 단락단락에 붙여진 소제목들인데, 꼭 판타지 소설의 소제목들 같죠. 이 아름다운 '소설'의 주인공은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참새과의 작은 새들, 핀치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한마리 한마리를 20년간 지켜보면서 열정적으로 연구활동을 펼친 진화생물학자 그랜트 부부와 제자들. 주인공은 또 있습니다. 찰스 다윈 말입니다.


이 책은 갈라파고스 군도의 작은 섬 다프니 메이저에서 외롭지만 의미있는 연구작업을 해온 그랜트 부부의 활동을 꼼꼼히 기록한 '인물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의 모든 성과들을 모아놓은 '진화의 역사책'이기도 합니다. 부부 생물학자의 학문적 열정도 인상적이지만, 진화론의 역사와 의미를 입체적(말 그대로 입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앞서 이 책을 판타지 소설에 비유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주 유려해서 읽는 재미가 문학작품 못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진화생물학 연구 현장과 다프니 메이저의 지나온 20년, 그리고 150여년전 다윈의 항해에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뇌파의 활동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타스틱'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나친 찬사가 아니냐구요. 과학저술가인 지은이 조너던 와이너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2000편의 책과 논문을 뒤졌다고 합니다. 당초 그랜트 부부의 활동을 다큐식으로 쓰기 위해 다프니 메이저에 갔다가, 지은이 자신이 진화론의 역사에 푹 빠져든 거죠. 진화에 관한 논문 뿐 아니라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포함해 방대한 자료들을 문장 속속에 인용해놓았습니다.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는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이 보고서가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왜 진화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인간은 오만합니다. 어느 정도 오만하냐면, 자기들이 이 세상 40억년 진화의 역사, 진화의 방대한 나무에 달려 있는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간해서는 인정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다른 생물의 한 종류를 아예 절멸시키려 하기도 하고, 지구의 생태계를 마치 핀치가 선인장 씨 빼먹듯 멋대로 빼먹으려 하기도 하지요.


'핀치의 부리'는 그런 인간들에게, '진화는 나의 집 마당에서, 가로수에서, 내 방 안의 화분 위에서, 심지어는 나의 몸 안에서도 언제나-지금 이순간에도 이뤄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만함으로 눈을 가린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이 지구의 생물들은 끝없이 적응하고 투쟁하고 공존하고-즉 '진화'해 나간다는 겁니다. 지구 환경에 대해 인간이 오만하게 주먹을 들이댈수록 자연의 적응, 즉 진화는 인간이 의도한 반대방향으로 가속화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되풀이해 읽고 싶은 책을 만나게 돼서 아주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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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11-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인문학적 이성 죽이기>란 '선정적인' 책도 나온 듯한데, 그들의 자부심의 배경에는 (저도 즐겨 읽는) 이런류의 교양과학서들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도들이 분발해야 할 텐데, 워낙에 생계도 힘든 형편이라...(자업자득인가?..)

딸기 2004-11-13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적 '이성'이라면 굳이 죽여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

어쨌든 저 책은, 최근 몇년간 읽은 책들 중에 최고봉이었어요, 제게는. 로쟈님도 저 책 마음에 드셨나요?

하이드 2004-11-1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thanks to 를 하면 추천이 되는거군요. ^^

딸기 2004-11-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그런가요? 추천 고맙습니다. ^^

숨은아이 2004-11-1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는 인간이 의도한 반대방향으로 가속화"... 모기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 (앗, 썰렁하다. =3=3=3)

딸기 2004-11-1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썰렁하지 않아요, 숨은아이님. 바로 그 얘기거든요. 이른바 '해충'들.
 
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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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하면, 한 친구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년 전이던가.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친구와 "'천안문'을 다 읽고나서 이야기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친구는 약속대로 책을 읽었고, 나는 그저 책장에 꽂힌 '천안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책 중에서 나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권과 2권을 가장 먼저 읽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빠져든 스펜서의 세계. '강희제'와 '칸의 제국', 그리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읽고야 만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왕여인의 죽음'. 한권 한권 내게는 주옥같고, 추억같은 책들이다. 스펜서의 책 몇 권을 '찜'해서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고, 그의 모든 저서들을 다 읽어봐야지 하는 꿈까지 꾸고 있다. 스펜서의 책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의 책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그의 책들을 읽을 때 내가 빠졌던 함정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스펜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의 스타일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정말 우습게도 '중국'을 잊고 있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 특유의 독창적인 방식과 박식함, 유려한 문장에 끌려, 그저 읽어내려왔달까. 그런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안문'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중국을 생각했다. 유구유구유구한 역사, 그만큼 화려복잡노도 같았던 중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질풍 같은 시기의 중국을. 대학시절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연작을 읽은 이래 처음인 것 같다. 소용돌이 같은 시기의 인간의 군상을 이렇게 생생하게 접해본 것은.


'천안문'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름일 뿐, 책의 배경은 '중국 곳곳'이다. 청말-열강의 반(半)점령-내전-공화국-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 자금성에서 난창으로, 창사로, 충칭과 옌안으로 흘러간다.

스펜스가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선택한 세 사람은 사상가이자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 작가 루쉰, 또다른 작가 딩링이다. 이들은 생(生)의 한 시기에 겹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지만, 사상적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캉유웨이가 주로 청 말기, 왕조의 멸망을 회한어린 눈으로 바라본 개혁사상가였다면 루쉰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발흥을 지켜본 지식인이었다. 봉건제의 모순에 맞섰던 여성 작가 딩링은 공산당 치하에서 영욕을 잇따라 맛봐야 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 세 명을 '축'으로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책에는 이들과 교차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 지도(地圖)라 해도 될 정도로. 생각이 다르고, 이름 붙여진 주의(主義)가 다르고, 인생역정이 다르지만 모두들 시대에 부딪치거나, 혹은 치이거나 했던 사람들이다. 스치고 엮이는 인물들 사이로 당대의 중국 풍경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픽션처럼 생생하되 사서(史書) 답게 정교한 스펜스 특유의 방식은 역시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봉기와 처형 장면이 당대 지식인의 글을 통해 '담담하게' 전해질 때 나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전율했고, 혁명가 취추바이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만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으며, 늙은 딩링과 작가 라오서가 홍위병들에게 모멸을 당할 때에는 우습게도 혼자 분개하고 있었다.


역사는 사람을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든다. 역사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진실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 같기도 하다. 역사 속에 제 갈 길을 걸어간, 혹은 제 갈 길을 원하는 대로 걸어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은 후대 사람의 마음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천안문'을 통해 나는 또다시 뒤흔들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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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0-06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좋은 책'만 읽는듯 하군요. 딸기님을 이런 식으로 쪼기도 하는 신지군은 여전히 잘 살고 있나보네...(맞죠? ^^)...스스로 함정을 인정하시니...부럽슴다. 저는 늘 '눈 먼 책읽기'를 하죠.

딸기 2004-10-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씬지군, 군대갈 준비를 벌써 몇년째 하고 있답니다. ^^
 
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구자현 외 옮김 / 중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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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분야에서든, 대가(大家)는 통한다고 할까요. 스스로를 `외로운 여행자'라 불리웠던 20세기 최고의 지성. 사람들은 보통 그를 ‘뇌가 쪼글쪼글한 천재' 정도로만 생각하지만(오죽하면 우유 이름이 아인슈타인일까요), 노벨상을 받은 뛰어난 과학자일 뿐 아니라 그는 사상가이고 철학자였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까지 핵문제와 교육, 인권, 과학과 인류애의 문제를 고민한 인도주의자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기고문과 연설문, 편지, 성명서 등을 모은 이 책에는 젊은 시절부터 1955년 사망하기 직전에 쓴 것까지 망라돼 있습니다. 오만한 인류의 손에서 양날의 칼이 되고 있는 과학의 이슈들을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보았는지, 핵무기 개발에 대한 그의 솔직한 생각은 어땠는지, 왜 그를 `위대한 철학자'라 불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밴드의 선율에 맞춰 4열 종대로 행진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여지없이 경멸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큼직한 두뇌를 갖게 되었다면 이는 오로지 실수 때문이다. 그에겐 보호막이 없는 척수만 있어도 될 것이다'


군대를 혐오하는 과학자, 어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그래도 멋지지 않습니까? ‘4열 종대로 행진하면서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은 ‘뇌 없는 뼈다귀’란 얘기인데요^^ 그는 적극적으로 불의를 거부할 자유, 거부할 권리, 거부할 책무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해주는 말들은 지금 들어도 딱 맞는 것들이어서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글을, 요즘 '우리' 이야기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읽은 것이 아니라 읽는 내내 '지금, 이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죠.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이 1921년에 지적한 군비축소 문제, 기술향상에 따른 실업 문제, 과잉생산 운운하면서 분배의 불균형을 가리려 하는 자본가와 정책 입안가들의 양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덕성과 도덕심, 시대정신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책임감과 교육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문장이 화려한 것도 아닌데 가슴에 와서 잘 '먹힌다'고 할까요. 나는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로 박애주의자로구나, 이 사람은 현실을 고민하면서 더 좋은 세상을 절실하게 꿈꾸었던 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어느 분야에서건 큰 인물이 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감동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2차대전을 겪고 나서 국제적인 평화의 메커니즘으로서 ‘세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요, 책의 백미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들과 아인슈타인의 서신 부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소련이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소련을 빼놓고서라도 세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소련에게 압박을 가해 세계정부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각 국가의 전쟁욕구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민족주의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도 필요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소련 쪽에서는 '민족주의는 제3세계 국가들이 식민국가들의 압제에 맞서 쟁취해낸 것이다, 식민지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민족주의를 제한하자고 하는 것은 또다른 횡포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은 '순진하게도' 세계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그런 주장을 뒤에서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민족주의의 국경 안에서 이윤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초국적 자본들이다'라고 반박합니다. 세계정부 구상은 물론 현실에서는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의 '정신'은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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