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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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짜 맘에 드는 소설 하나를 만났다. 진정한 이야기, 심오하고 풍요로운 소설, 매혹 그 자체. 지나친 찬사인가? 나 혼자 좋아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들이 열광에 열광을 보냈던 ‘덜 서구적인’ 작가를 꼽자면 이스마일 카다레와 오르한 파묵 두 사람일텐데, 지난 연말에 읽은 카다레의 ‘꿈의 궁전’과 비교해서도 ‘내 이름은 빨강’은 소설 중의 소설이다. 유행 타는 파울로 코엘료나 다빈치 코드 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고, 적당히 즐거운 일본 소설들하고도 깊이와 넓이와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

‘액자소설’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액자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소재로 층층이 이야기를 깔아놓은 이 책은 사전적인 의미의 ‘액자 같은 소설’이다. 겹겹의 액자 속에 숨겨진 의미 하나하나를 찾아야 하는 소설책, 삽화 한 장 없지만 중세 이슬람의 세밀화를 머리 속에 그리게 만드는 ‘그림 없는 그림책’.

소설은 16세기 말, 아마도 슐레이만 대제의 치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우물 안에 누워 말을 거는 화자(話者)가 시체라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지만 그 시신이 한때 ‘세밀화가’였다고 하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질 수밖에.

‘세밀화’는 수시로 목소리를 바꿔 변주되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내 이름은 빨강’을 읽는 것은, 아마도 서양이 아닌 세계 모든 것에 무관심했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세밀화를 알아가는 뜻밖의 재미난 과정이 될 것 같다. 세밀화는 이슬람 미술의 꽃이고, 세밀화를 상상하는 것은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엿보는 것이다. 아쉽게도 책은 ‘소설’일 뿐이어서 세밀화를 직접 눈으로 보는 기회는 ‘언젠가’로 미뤄야겠지만. 세밀화는 건축과 함께 이슬람 미술의 양대 축이라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함락함으로써 제국의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안에서 투르크는 ‘제국의 주인’이기는 했지만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진 못했다. 크게 이슬람세계를 아랍(아라비아)과 이란(페르시아), 투르크 세 지역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아랍은 이슬람의 발상지이면서도 이란의 화려한 문화에 곧 침식됐고, 투르크 역시 이란에서 문화적 자양분을 받아와야 했다.

중국풍이 섞인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밀화는 몽골과 이란의 합작품이다. 타브리즈, 쉬라즈, 이스파한. 이 책에 이란(페르시아)의 지명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은 세밀화의 본고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랍과 투르크가 페르시아를 잇달아 정복했지만 실은 페르시아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이 있었던 곳 아니던가.

 

이런저런 이슬람 세계 내부의 흐름을 이해하고 읽더라도, 16세기 이스탄불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액자는 ‘이스탄불’이다. 이 것은 이스탄불이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이스탄불은 세계의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도시다. 세상에 똑같은 도시가 어디 있을까마는, 런던을 파리에, 오늘날의 뉴욕을 과거의 로마에 비유한다 하더라도 이스탄불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수천년 역사의 더께가 (소설 속 스산한 눈발처럼 혹은 향료시장에 먼지처럼 떠도는 짙은 냄새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곳. 작가가 묘사한 술탄의 보물창고 속 화려한 보물들은 알리바바 이야기의 동굴 안 보물처럼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톱카프 궁전의 화려한 보석의 방을 본 이들은 그것이 살아 숨쉬는 이스탄불의 생생한 스케치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한적한 슐레이마니예(슐레이만) 모스크, 보스포러스, 위스크다르, 아야 소피아. 이 소설은 걸출한 투르크인 소설가가 세밀화에, 그리고 이스탄불에 보내는 헌사다.


그러나 겹겹이 쳐진 액자의 사이사이엔 동시에 ‘베네치아 화풍’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닥뜨리게 된 투르크 제국의 불안감이, ‘근대’와 대면해야 할 ‘중세’의 불안감이, 서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동양이 느끼는 혼란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풍을 받아들여 우리 기술로 삼자, 서양의 압박에 부딪친 동방의 나라들은 너나없이 저렇게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외치지 않았던가. 그런 불안감이 ‘제국의 정점’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 우물에 버려진 시체는 동도서기와 위정척사의 대립 사이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을 뿐이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대체 무얼까. 짧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매우 분명하게 ‘전통을 잃지 말자’고 말한다. 글로벌리즘 앞에서 세계가 서양문화의 홍수에 휩쓸려 제 모습을 잃는 시대, ‘이스탄불에 바치는 헌사’는 사라져가는 모든 오래된 도시들에 대한 헌사이고 그들을 지키자는 목소리인 것일까. 확대해석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작가 파묵이 터키 정부의 탄압을 받고 유럽이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도 참 아이러니다. 번역 매우 훌륭하고, 이런 작품을 중역 없이 국내에 소개해줬다는 점에서 번역자를 한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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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6-01-1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 전담 번역가로 이난아교수님께서 노력하고 계시지요. 곧 문학동네에서 <하얀성>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르한 파묵의 최대 걸작 <흑서>도 지금 번역작업중이라고 합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 널리 읽혀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흑서>에 대한 기대는 정말 큽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딸기님.

딸기 2006-01-1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그렇군요. 저도 그 책을 기다리고있어야겠네요.

인간아 2006-01-1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이 꼭 좀 서평 좀 올리셔서 홍보 많이 해주세요. 오르한 파묵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은 좀 나아졌나 모르겠습니다. 혹 알고 계시면 소식 전해주세요.

딸기 2006-01-1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열심히 알아보겠습니다!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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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으면서 하도 키득거리니까 옆자리 선배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하다가, 비웃다가... 이토록 나를 웃긴 책. 최근 몇년간 읽은 책들 중에서 날 가장 많이 웃게 만든 책이라면 단연 이 책이다. 이름하여 ‘악마의 사도’.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이고, 책 제목은 다윈의 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이름들을 들먹이면서 ‘웃기고 재미난 책’이라고 하면 외려 날 이상하게 볼 주변인(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들도 있겠지만, 허나 어쩌랴. 사실인 것을. 정말 웃기고 재미있다. 너무 웃겨서, 통 그런 일 없는 내가 사무실에 앉아 키들키들거리다 못해 푸칼칼거렸다.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괜히 흥분해 리뷰를 도저히 할 수 없다, 라고 하면 될까. 이 재미난 책에 쓸데없는 나의 감상 따위를 덧붙여서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이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로 맘에 들었다는 것, 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도킨스가 애정을 표현한 다른 저술가들의 글까지 몽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기나긴 제목의 SF 소설까지 읽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는 것,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애정마저도 더욱 깊어졌다는 것. 내 생의 책 중 하나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핀치의 부리’ 만큼 이 책이 좋다고 하면 어쩌면 내 친한 친구들은 내가 ‘악마의 사도’에 얼마나 폭 빠졌는지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악마의 사도’ 광분모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도킨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읽어선 안된다. 도킨스와 굴드의 다른 책들로 일단 바닥을 깔아놓고, 그 뒤에 이 책을 읽을 일이다. 굴드와 도킨스의 책을 각각 한권씩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특히 굴드의 ‘풀하우스’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매력 넘치는 인간들 같으니! 나 완존히 도킨스 아저씨 때문에 미치겟또...


도킨스 아저씨의 종교비판.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묘사하면, 종교를 비난하거나 심하면 적대시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둘 다이다. 나는 ‘체계를 갖춘 종교’에 왜 그렇게 적대적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종교에도 똑같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로 서두를 떼곤 한다...

체계를 갖춘 종교가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버트란드 러셀이 태양 주위를 도는 중국 찻주전자라는 가상의 사례로 압축시킨 상상을 예로 들자면) 러셀의 찻주전자와 달리 종교가 강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금을 공제받으며,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입된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들은 찻주전자를 다룬 엉터리 책들을 암기하면서 인격 형성기를 보내라고 강요받지 않는다. 부모가 기이한 모양의 찻주전자를 선호한다고 해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학교가 그 부모의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없다. 찻주전자 신자들은 찻주전자 불신자, 찻주전자 배교자, 찻주전자 이단자, 찻주전자 모독자를 돌로 쳐죽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찻주전자를 믿는 비정통파 부모의 딸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 찻주전자에 우유를 먼저 따르는 사람들이 찻물을 먼저 따르는 사람들의 무릎에 일부러 우유를 엎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이제 솔직해지자.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이다. 이제 ‘민족주의자’ ‘왕당원’ ‘공동체’ ‘인종집단’ ‘문화’ ‘문명’ 같은 완곡어법은 그만 써라. 당신에게 필요한 단어는 종교이다. 당신이 위선적인 행동까지 해가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단어는 종교이다.


이 책은 도킨스가 그동안 여기저기에 썼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비과학적인 모든 것을 혐오한다 어쩔래”가 되겠다.

더불어 책에는 도킨스가 지인들에게 보내는 헌사와 추모사들도 들어있다. 과학소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에게 보내는 추모사의 한 토막.


과학계는 친구를 하나 잃었고, 문학계는 등불을 하나 잃었으며, 마운틴고릴라와 검은코뿔소는 용감한 수호자를 하나 잃었고 애플 컴퓨터는 가장 달변인 대변자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적 동료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하나 잃었다.


과학계 동료인 윌리엄 해밀튼의 추모사에는 도킨스 특유의 유머와 애정이 넘쳐나서, 나는 추모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멍한 정신 상태는 전설적이라 할 정도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굴드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 굴드의 ‘풀하우스’에 붙인 서평, 굴드에게 보내는 편지 등 굴드와 관련된 부분도 한 챕터가 들어가 있다. 어찌나 솔직한지. 두 학자의 학문적 갈등과 인간적인 우정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는 태양이 지쳐서 하늘 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는 만났을 때에는 성의를 다했지만, 우리가 가까웠다고 주장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말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뻔뻔함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나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킨 경우가 한 차례 있었음을 독자에게 말한다 해도 용서하기를 바란다. “리처드와 나는 진화에 관한 글을 가장 잘 쓰는 두 사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붙어 있었음을 강조해두자.


1978년 한 유명한 과학 잡지의,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지는 서평 담당 편집자가 굴드의 ‘다윈 이후’에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유전자 결정론’의 반대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느 쪽에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전자 ‘결정론’을 선호한다고 시사한 쪽인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 서평을 쓸 것이라고 시사한 쪽인지 말이다.


나는 스티븐 굴드의 말이 왜곡되었다는 쪽에 돈을 걸고, 왜곡할 필요가 전혀 없는 프레드 호일 쪽에는 쥐꼬리만큼 걸었다.


빅뱅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호일은 2001년 숨졌다. 그가 이 책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굴드가 ‘산유리새의 불륜’이나 ‘개미의 노예 제도’ 같은 무해한 어구를 반대하는 설교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유감이다. 그런 무해한 의인화에 반대하면서 그가 멋들어지게 던진 질문인 ‘이것이 단지 현학적인 투덜거림일까?’에는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에 대한 도킨스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이로운 생명’은 잘 쓰여진 책이자 대단히 중구난방인 책이다.


굴드의 ‘풀하우스’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흑흑 바로 이거야, 굴드는 그 훌륭한 책에서 야구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고... 도킨스 아저씨는 바로 그 점을 짚었다. 대단한 리뷰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짧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55쪽 분량을 야구 전문 용어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나머지 세계라 불리는 어렴풋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사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가볍게 항의를 해야겠다... 굴드가 야구에 심취한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수준에서 야구 이야기를 조금만 가미했더라면 약간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장 6장에 걸쳐 시종일관 지속되는 야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읽으라는 이런 오만한 무례는 미국의 우월주의에 해당한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미국의 남성 우월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줄기차게 굴드를 비꼬고 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우정의 전류는 분명히 감지된다. 어쨌거나 진화론의 전사로서 동지를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사람은 도킨스였을테니까. 굴드가 사망한 뒤 도킨스의 글들에는 상실감이 역력히 묻어난다.


도킨스 아저씨,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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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11-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이 여기 언급하신 책을 다 읽어보겠습니다. 죽기 전에.....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깍두기 올림.

서연사랑 2005-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악마의 딸기'로 바꾸신거예요?^^

딸기 2005-11-3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저거 다 읽었다고 해서 죽으시면 안 돼요~~
서연사랑, 맞어, 그래서 악마의딸기가 된 거야. 곧 '딸기의 사도'로 변할거얌.

숨은아이 2005-11-3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핀치의 부리"도 아직 못 읽었단 말예요 !.!

로쟈 2005-11-30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책이 재미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게 아닌데요.^^ 저는 원서까지 구해놓았지만 아직 웃어볼 만한 시간을 못 내고 있습니다(흑...).

딸기 2005-11-3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책이 재미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느무느무 웃깁니다. ^^
숨은아이님, 핀치의부리는 진정한 명작입니다. 꼭!꼭! 읽어보세요!

windtreemago 2005-11-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를 여행하는~ 지금 읽고있는 중임
근데 그게 한권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5권인가 시리즈였더라는 -0-

마냐 2005-11-3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난 '주변인'이지만, 엄청난 뽐뿌군....'경고'에도 불구하고 말야.

딸기 2005-11-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어요 ^^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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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도 전에, 마치 이 작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칼비노의 작품이라고는 한두 편 밖에 읽지 못했고, 작가의 이력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바가 없는 주제에 말이다. 이 작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많이 상상하고 기대했다는 편이 맞겠다.

처음 칼비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습지만 소설이 아닌 조너선 스펜스의 역사책(‘칸의 제국’)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 인용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구절이 맘에 들어, 인터넷에서 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다운받아 훑어봤었다. 나의 생각과 달리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SF문학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책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게으른 독서습관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었다.

소설책을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이 필요한 경우가 꽤 있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던 셈이다. 어떤 소설일까? 이 작자, 꽤 마음에 드는데, 이런 종류의 판타지는 딱 내 취향인데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올까. 이런 식의 문체는 잘만 풀려나오면 정말 매력 있단 말이다.


제목의 ‘남작’에서 보이듯 소설은 좀 오래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간적 지리적 배경은 18세기 이탈리아인데 읽어나가다 보면 중세에서 근세로, 근대로 아주 오랜 시간 흘러내려오는 것만 같다. 작가가 남미산(産) 이탈리아인이어서 그런지 마술적 사실주의 분위기가 묘하게 스며 있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보는 듯 기나긴 세월과 시대의 흐름을 축약해놓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역사소설이다. 귀족, 종교, 전쟁, 봉건제, 혁명. 엽기적인 사건들까지 낙천적으로 풀어놓는 작가의 글 솜씨는 탁월하고, 천연덕스럽다.

또한 책은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의 정의를 학자들은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은 하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등장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말하는 것’. 그렇다면, 적어도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책은 판타지가 아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책은 개연성 있는,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존재하기 힘든, 그런 ‘상황’을 다룬 독특한 판타지 소설이다. 달팽이 요리를 먹기가 싫어서 어릴 적 나무 위로 올라간 뒤 평생을 나무 위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라니, 거짓말 같으면서도 참 그럴 듯하다.

칼비노라는 작가는 이런 식으로 ‘상식’과 전쟁을 벌인다. ‘생각의 기존 질서’를 깨버리는 것이 이 작자의 목표가 아닌가 싶을 정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두 남자,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흰 옷 입은 기사, ‘나무 위의 남작’의 이 귀족 남자. 그럴 듯한 이야기로 독자를 우롱하고 기만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칼비노의 재주다. 정돈돼 있는 듯하면서도 모순 그 자체인 이 세상에 대한 칼비노 식의 풍자. 그럼 이 책은 풍자소설이런가?


“예전에는 달랐다. 우리 형이 있었다. 나는 혼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벌써 형이 생각해 놓았을 거야.’ 그래서 나는 사는 일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 내게 세상이 변했음을 알려준 것은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의 도착도 피에몬테로의 합병도 새로운 세금이나 내가 아는 다른 그 어떤 일도 아니었다. 바로 창문을 열고 저 나무 위에 균형 있게 앉아 있는 형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무위의 디 론도 남작은 귀족제가 수명을 다해가는 시대의 귀족이고, 자연이 인간의 도끼질에 날아가는 시절에 자연을 사랑하는 인간이고, 반동의 소용돌이에 계몽과 자유의 이상이 강타당하는 시기에 혁명을 선동하는 민중의 수호신이다. 작가 자신이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설정했다는 이 기묘한 인물은 젊은 날의 꿈처럼 빠져나가는 이상과 자유로운 정신, 이성인 동시에 낭만과 희망, 자연, 고향의 상징이다.

 

책에서 작가가 상당부분을 할애하는 것이 바로 나무에 대한 묘사이다. 감탕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등등, 나무 자체와 숲의 모습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작가는 말미에 ‘자연’에 대한 복고풍 감수성을 담은 문장을 넣어놓았다.


“하늘은 텅 비어있다. 초록의 지붕 밑에서 사는 데 익숙한 우리 옴브로사의 노인들은 그런 하늘을 보면 눈이 아프다. 우리 형이 사라진 후에, 또는 인간들이 미처 도끼를 들고 날뛰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무가 견뎌날 수 없게 되었다고들 한다. ... 옴브로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옴브로사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자문해 본다. 이리저리 갈라진 나뭇가지, 잎맥이 섬세하고 끝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나뭇잎들은 불규칙적으로 조각조각 섬광처럼 보일 뿐인 하늘 위에 펼쳐졌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형이 물까치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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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9-2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건진 잡지에 이 사람 단편이 실려 있는데, crime 에 대한 짧은 글인데, 정말 나자빠지겠더군요. 조만간 한번 올려봐드릴래요. 저도 아껴서 안 읽고 있는 책인데( ;;; 말 됩니까?) 반디엔루니스 종로점 오픈한 기념으로( 혼자 기념으로) 칼비노의 원서;;라봤자 영어 원서 3권정도 사 놓았는데, 며칠적에 읽은 그 단편에 이어 딸기님 리뷰까지, 어서 어서 읽어라 하네요.

딸기 2005-09-21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원서를 3권이나 사놓으셨다고요... 우와...
단편 꼭 올려주세요. 읽어보고 싶어요.
이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쓴 '나무 동화'라는 것 사놓고 이제 읽으려 하고 있어요, 저는.

하이드 2005-09-2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742005


작가 사진까지 두장짜리 단편인데,, 이탈리아 사람이 이런글 쓰니 어찌나 와닿는지요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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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건 영화건 만화건, 정말 재미있는 것은- 한참 웃다가 눈시울 시큰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책이 딱 그런 책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버려서 다 읽고난 이 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금박으로 포장해서 나무 상자에 넣어둘까? 한장 한장 찢어내서 벽지로 발라버릴까? 꽃띠로 리본을 매어 액자에 넣어 걸어놓을까? 차라리 몽땅 베껴써볼까?

독자를 웃게 만들려면 작자가 웬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너저분하지 않게, 살짝살짝 감각적이면서 솔직한 언어로 찌꺼기 없는 웃음을 선물해주는 책.


"몇달 전부터 그 마리오란 놈팡이가 제 주점 근처를 맴돌고 있죠. 이 자가 감히, 겨우 열여섯 살인 제 딸을 집적거립니다."

"따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요?" 

과부가 침을 뱉듯 말했다.

"메타포요"

시인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런데요?"

"네루다 씨, 메타포로 제 딸을 용광로보다 더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니까요!"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일월서각에서 출간된 '제3세계 시' 어쩌구 하는 책에 네루다와 옥타비오 빠스 같은 이들의 시가 들어있었다.

그 시들은 날카로웠고, 어두웠고, 무서웠다. 예쁜 그림 그려진 브라우닝 류의 시와는 전혀 다른, 칼날 같은 시들. 그리고 어느덧 내 나이, 처음 네루다의 시를 읽었을 때의 두 배가 되어 다시 만난 네루다. 이 소설의 네루다는 그 칼날 같은 시집에서의 이미지하고는 사뭇 다르다. 치열한 한평생을 보내고 바다와 사랑과 유머와 미소를 함께 갖추게 된 노시인. 판초를 입고 춤 한 박자를 선보일 줄 아는 멋쟁이 시인. 실제로 네루다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타포. 철부지 우편배달부를 사랑에 목매달게 하고, 열여섯 처녀 가슴을 후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과부를 두 손 들게 만드는 메타포. 어쩌면 이 책 전체가 메타포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메타포는 네루다인지도 모르겠다. 투쟁과 연륜을 짊어진 네루다라는 메타포,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찬 우편배달부라는 메타포, 라디오 군가로 흘러나오는 쿠데타라는 이름의 메타포, 칠레인들의 희망과 좌절을 상징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메타포, 인생을 힘겹지만 그래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어린아이라는 메타포. 그리하여 끝내 눈물 한 방울 떨구게 만드는 '진짜 같은 소설'.

바닷가 마을, 늙은 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사랑과 섹스, 사회주의 혁명과 쿠데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에는 음악과 시와 사랑과 섹스, 정치와 소설, 이런 것들을 엮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나보다. 그래서 네루다 같은 위대한 시인이 나오고 웃음눈물 뒤범벅된 이런 소설이 나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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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역 부근의 한 극장에서 맥주캔을 까만색 비니루봉다리에 숨겨가지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이 영화 봤습니다.
어제처럼 선명한데 10년이 다 되었네요. 흑흑.
영화 보고 나와서 또 한잔했죠.

딸기 2005-01-2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습게도 전 말이지요.
96년이었던가, 이 영화 보러 극장에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잤습니다. ^^;;
이 책 너무 좋죠, 로드무비님!

nemuko 2005-01-21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해로 정하셨다더니 요즘 열심히 읽으시나봐요^^

딸기 2005-01-2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요새 열심히 읽고 있어요. 맘 잡고 소설 읽는 것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정말 재밌네요. ^^

플라시보 2005-01-21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고 thanks to 하고 갑니다. 읽을책이 쌓여있지만 (좀처럼 그럴일이 없는데 어쩐지 요즘은 그렇군요.) 얼른 사고싶게 만드는군요. 기대됩니다.^^

딸기 2005-01-2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유명한 플라시보님이다! 반갑습니다 *^^*

겨울 2005-01-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좋고, 책 값도 저렴하고, 아직까지 책보다 매력적인 영화는 본 적도 없고 해서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딸기 2005-01-2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안녕하세요. 민음사 문학전집, 하드커버가 아니어서 좋더군요!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표지에 '퓰리처상에 빛나는'이라는 수식어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다. 자랑할 만하다. 무슨무슨 상을 수상했다 하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퓰리처'라는 말이 붙은 책 중에서 별 볼일 없는 책은 없었다. 나의 짧은 경험으로 봤을 때, '퓰리처'가 붙은 이 책은 필히 훌륭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책을 펼쳤고, 책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게는 이 책이 '올해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재미와 밀도를 동시에 갖춘 책이고, 영화 식으로 말하면-- 오락성도 작품성도 모두 별 다섯 개짜리다.

생리학박사인 저자는 '과학자'다. 이 책은, 과학자인 저자가 세계사를 과학적 관점에서 다시 쓴 책이라고 정리하면 되겠다. 저자는 한 뉴기니인의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째서 뉴기니인들은 훌륭한 발명품을 만들지 못했을까? 어째서 뉴기니인들이 유럽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뉴기니를 정복하게 됐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갖고 있을 역사적 불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에서 저자는 출발한다.

저자는 고고학, 고생물학, 진화생물학, 지질학, 기후학 등을 아우르는 학제간 연구의 성과물을 종합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구세계(유라시아)에 비해 인간의 정주가 늦어졌던 신세계(남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 등등)에서는 인간의 도래와 함께 대형 포유동물이 멸종했고, 따라서 동물의 가축화와 식물의 작물화가 늦어지거나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인구규모의 차이와 함께 사회/정치조직의 발달 수준에서도 차이를 불러왔다는 것이 저자가 찾아낸 답이다.


이렇게 축약해놓으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대답에 이르는 과정은 길고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자료가 구체적이고, 성실한 연구가 뒷받침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사례들만 놓고 읽어도 '가려진 역사'를 파헤치는 재미가 넘쳐난다.

저자는 중근동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출발한 '농경사회'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유라시아의 인간을 전염병에 강한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그들이 적응에 성공한 병균들은 어째서 '신세계' 사람들을 학살했는지, 복잡한 정치사회조직을 갖게 된 인류는 어떻게 발명을 자극해 '미개한' 사회들을 전멸시킬 무서운 무기들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비롯해 뉴기니, 남북아메리카, 중국 등지의 과거 생태계 특성과 역사적 발전 과정 등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물론이고, 저자의 이야기 솜씨 또한 놀랍다.


저자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지역적 불평등은 어느 '인종'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까마득히 오랜 옛날의 자연적 지리적 자원의 불평등에 기인한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종차별에 맞선다'는 것이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본적인 의문은, 외국에 대해 얘기할 때 근거도 없이 인종 혹은 민족 운운하는 한국인들의 황당한 습성은 어디에서 나왔나 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를 '경영'해보기는커녕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됐던 나라에서, '민족'이라는 외피를 쓰고 버젓이 살아 숨쉬는 인종차별주의는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인종차별의 직접적인 가해자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서방과 달리, 그리고 다민족(다인종)국가로서 현실적 고민들을 안고 있는 나라들과 달리, 유라시아 끄트머리에 달린 우리나라는 뭐니뭐니 해도 단일민족 국가다. 인종차별에 연루될 여지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동남아 사람들은 게으르니깐" "유태인은 머리가 좋아" 이런 식의 발언들에 구토감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그 희한한 아이큐 테스트를 지금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인종 국가로서 인종 간 지능차이를 수치화해 차별정책을 세울 속셈이 아니라면, 혹은 아이큐를 기준으로 우열교육을 실시할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에서 뭣 때문에 중고생들을 상대로 아이큐테스트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물며, 어릴 적 많이 들었던(주로 교사들한테) "유태인들은 머리가 좋다"라는 류의 이야기, 더불어 "유태인 다음으로 세계에서 머리가 좋은 것은 한국인들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서라면 여러 가지 반론을 댈 수 있겠지만, 다종다양한 인종적 편견에 맞서 그야말로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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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1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올해의 책'이라는 확실한 도장을 찍다니...이런이런.. 읽을 책 많아 큰일이군...암튼, 유라시아의 일원이자, 사회/정치조직이 꽤나 발달했던 우리나라는 왜 늘 정복만 당했답니까? 글구, 지적하셨듯..왜 우리나라는 그토록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에 빠져있는지, 그런 설명은 없나요?

딸기 2004-12-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그런 설명은 없지요, 물론! 우리나라에까지 한 챕터를 할애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우리나라가 '정복만 당했던'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국에 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정도는 대답이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가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에 빠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저자에게 물을 일이 아니라는 걸 마냐님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 아무튼 이 책, 꼭 읽어보세요.

마냐 2004-12-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괜한 심술인가요? 암튼, 저리도 인과관계를 잘 밝히는 똑똑한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을 뿐임다.

panda78 2004-12-18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고 안읽고 있었는데, 날 잡아 읽어야겠군요. ^^ 딸기님 리뷰 참 멋져요- 추천!

바람구두 2004-12-1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도 리뷰 올리려고 했었는데... 뭐라 해야할지 몰라서...

흐흐, 98년에 나온 책을 올해의 책이라고 하는 건...

그때 읽고 올렸던 리뷰를 다시 올린 건가요?

로즈마리 2004-12-1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겠네요. 정말. ^^

딸기 2004-12-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거는 분들이 많군요. ^^

저만의 '올해의 책'이랍니다. 랄랄라.

로쟈 2005-03-0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아몬드의 책 중에 <인간은 왜 섹스를 좋아하는가> 같은 것도 있는데, 왜 번역이 아직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초적으로 '섹시한' 제목인데...

수퍼겜보이 2005-09-19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리뷰입니다. 추천하고 가요.

장혁 2006-01-22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중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다. 인종차별에 연루될 여지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에서 외세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은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분명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중국과 몽고, 일본 그리고 숱한 전쟁들, 얼마나 피가 섞였겠습니까? 또 아일러니하게도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인종차별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단일민족의 세계최고로 우수한 민족이라는 우월성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당연히 인종차별이 생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