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 흑송림黑松林에서 대왕이 봉을 탈취하고 백니강白泥崗에서 촌민이 기이한 일을 목격하다
흑송림은 『서유기(西遊記)』80회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빈파국(貧婆國)의 진해 선림사(鎭海禪林寺)가 있는 곳이다. (참고로 빈파국은 토번국吐蕃國으로 예상되는데, 토번국은 지금의 티베트에 해당하는 곳이다.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땅을 Bod라고 불렀는데, 중국말로는 Tǔbō 또는 Tǔfān 으로 발음되며 문자로 적으면 토번吐蕃이 된다.) 모로호시 선생이 「현무문의 장」을 시작하면서 흑송림이라는 지명을 쓴 게 참으로 흥미로운데,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은 이곳 흑송림에서 지용부인(地湧夫人)을 만나게 된다. 지용부인은, 『서유기』에서도 그렇지만, 『요원전』「현무문의 장」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무시무시하면서 섹시한 캐릭터로, 용아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백니강은 아마도 『수호전(水滸傳)』의 황니강(黃泥崗)을 변형한 지명 같다. 『수호전』에서도 황니강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한 설명이 없다. 『수호전』에서 황니강은 탁탑천왕(托塔天王) 조개(晁盖)를 비롯,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 입운룡(入雲龍) 공손승(公孫勝), 적발귀(赤髮鬼) 유당(劉唐), 입지태세(立地太歲) 완소이(阮小二), 단명이랑 (短命二郞) 완소오(阮小五), 활염라(活閻羅) 완소칠(阮小七), 백일서(白日鼠) 백승(白勝) 천강 6명과, 지살 1명의 영웅들이, 북경의 양중서(梁中書)가 장인인 당조태사(當朝太師) 채경(蔡京)에게 보내는 생신강(生辰綱)을 강탈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역사 속의 채경에 대해 (아주) 조금 알아보자면, 북송(北宋)의 8대 황제(라기 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휘종(徽宗)이 정치에 무지한 것을 이용, 태사의 권력을 집중, 장악했으며 신법(新法)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징수, 대토목공사를 통해 왕실의 재정을 탕진 시켰다. 물론 상황을 모르는 휘종은 즐거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정치인이었으니, 착복하는 것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수호전』에서 조개를 비롯한 호걸들이 채경의 생신강을 탈취하는 것은 불법, 일탈의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원망을 대신 풀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과 방화로 얼룩진 이 하드고어 소설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성들의 원망과 원통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요원전』하고도 상충된다. 모로호시 선생이 괜히 『수호전』을 인용하는 게 아니다.
p.339
“아무튼 한동왕 유흑달 어르신도 요양饒陽에서 붙잡혀 명주로 압송된 모양이잖나...”
『자치통감(資治通鑑)』권190을 보면, 623년 “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諸葛德威)가 유흑달을 잡아가지고 성을 들어서 항복하였다. (...) 제갈덕위는 군사를 챙겨가지고 그를 붙잡아서 호송하여 태자에게 갔고 (...) 유흑달은 동생 유십선(劉十善)과 명주(洺州, 유흑달의 도읍지)에서 목이 베어 죽었다”고 한다. 고로, 지금은 623년임이 분명한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번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 ‘현무문의 변’은 626년에 일어나는데, 곧 현무문의 변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p.341
“역시 그때 죽여 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을...”
홍해아가 용아녀의 배다른 언니들, 호마・녹저 자매를 죽임으로써 세 자매는 모두 죽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들 호마・녹저는 『서유기』 44회~46회에 등장하는 호력대선(虎力大仙)과 녹력대선(鹿力大仙)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력・녹력・양력대선(羊力大仙)은 삼장법사 일행과 법력 대결을 벌이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호력대선은 머리를 잘랐다 붙이는 작두법(斫頭法)으로 대결을 한답시고, 머리를 자른 후 붙이려다가 손오공의 술법으로 사냥개가 호력대선의 머리를 낚아 채 먹어버려, 목을 잃은 호력대선의 몸은 피를 뿜고 죽는데, 자세히 보니 그 정체는 머리통이 없어진 얼룩 호랑이였다. 녹력대선은 배를 갈러 오장 육부를 꺼내고 다시 집어넣는 부복법(剖腹法)으로 대결, 칼로 자신의 배를 가른 후 오장 육부를 꺼내는 순간, 또다시 손오공의 술법으로 굶주린 매 한 마리가 녹력대선의 창자를 낚아채 가서, 뱃속에 핏물만 고인 채로 죽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뿔 달린 사슴 한 마리였다. 양력대선은 기름 솥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결을 벌였는데, 역시 손오공의 술법으로 실패, 기름 솥에서 녹아 죽고 만다.
p.358
“유흑달이도 붙잡혔으니 이제 천하도 태평해지겠지...”
“그러게 말이야. 그 치가 더 일찍 항복했으면 싸움도 진즉에 끝났을 것을...”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 우리 같은 백성들한테는 오히려 폐란 말이지.”
어찌 보면 냉정하고 무관심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나라로 갈려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왔던 민중들에게는 하나로 통일이 되어 수많은 전란이 없어지는 걸 가장 바랄 것이다. 그러다 진시황이나 수양제와 같은 폭군들이 등장하거나 무능한 황제들이 실정을 펼치면, 통일된 왕조는 다시 갈라져 전란에 휩싸이고... 아마도 중국의 역사는 이와 같은 역사의 반복일 것이다. 그런 역사 속에서 대를 거듭해 체득한 것이 아마도 중국인들 특유의 낙천주의와 순응주의가 아닐는지.
p.369
“두건덕은 어떤 사람이었지?”
“어르신께서는 우리 농민들을 위한 국가를 세우고자 싸우셨어. 사오년 전에는 하북 사람들이 어르신과 함께 단결하여 하夏라는 나라도 세웠다고. 하지만 이세민에게 패해서... 거기다 십 년 동안 계속된 난리에 다들 질려서 이제 그만 평화가 오기만을 바라게 된 거야...”
두건덕(竇建德)이 농민들을 위한 국가를 세우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선택이었겠지만, 그는 철저히 수의 신하라고 했다), 수 말기에 궐기한 여러 군웅들 중 가장 ‘협(俠)’의 기치를 드높인 것만은 틀림없다.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7의 기록을 보면, “두건덕은 매번 싸워서 승리하고 성곽에서 이길 때마다 얻은 재물은 모두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갖는 것이 없었다”는 기록과 “두건덕이 명주(洺州)에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니 그 경계 안에서는 도적이 없었고, 상인과 여행객들이 들에서 잠을 잤다”는 기록으로 보아, 두건덕의 다스림을 받는 명주의 백성들은 양제 때보다 훨씬 윤택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건덕은 “나(두건덕)는 수의 백성이고 수는 우리의 군주이다. 지금 우문화급이 시역을 하였으므로 바로 나의 원수니, 내가 토벌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양제를 죽인 우문화급을 쳤고, “성으로 들어가서 우문화급을 산 채로 잡아서 먼저 수의 소(簫)황후를 알현하였는데, 말하면서 모두 칭신(稱臣)하였으며 소복을 입고 양제에게 곡(哭)하면서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그는 하(夏)라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황제를 칭한 것은 아니었다), 스러져가는 국가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바친 유일한 군웅이기도 했다.
p.372
우르 우르 → 우르르 / 우르르 우르르 (출처 불명의 의태어 수정)
p.375
“뭐야? 관음보살님의 석장錫杖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관음보살 → 관세음보살
중국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관음보살(觀音菩薩)로 불리게 된 것은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하고 난 후, 즉 이세민(李世民)의 世를 피휘(避諱)하기 위해서다. 피휘란 군주의 이름을 피한다는 뜻으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교문화권의 옛 관습에 따라, 때에 따라서는 글자 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요원전』의 시대적 상황에 볼 때, 아직 이세민이 즉위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관세음보살로 불려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세음보살’이란 말이 오역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바로 잡은 것이 바로 현장 스님이라는 점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권3을 보면 북인도 오장나국(烏仗那國, Uddiyana)의 한 사원에서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보살이라 불리는 불상을 한 기 보는데, 바로 그 불상이 우리가 아는 관세음보살이다. 현장이 기록한 오류 정정은 다음과 같다.
唐言觀自在。合字連聲,梵語如上;分文散音,即阿縛盧枳多譯曰觀,伊濕伐羅譯曰自在。舊譯為光世音,或云觀世音,或觀世自在,皆訛謬也。
당나라 말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하는데 글자를 합하여 연달아 소리를 내어 발음하면 범어(梵語)는 위와 같아진다. 단어를 나누어 하나씩 발음을 내어볼 때 아박로지다(阿縛盧枳多)는 번역하면 관(觀)이고, 이습벌라(伊濕伐羅)는 번역하면 자재(自在)이다. 구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음(觀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자재(觀世自在)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장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너무 어려워, 그 주석에 주석을 단 첸원중 교수의 설명을 빌리면, 아발로지저습벌라는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 아발로키데스바라’의 음역인데, 이 낱말은 avalokita(‘본다’는 뜻의 아발로키타)와 īśvara(‘자유자재’란 뜻의 이스바라) 두 음절의 합성어이다. 산스크리트 문법에 따르면, 앞 음절의 끝 모음 ‘a’와 뒤 음절의 첫 모음 ‘ī’는 반드시 붙여서 ‘e’로 읽어야 하는데, 이 명칭을 처음 번역한 사람이 이 두 개의 모음을 잘못 읽어 Avalokiteśvara를 avalokitasvara로 보았고, 여기서 ‘svara’를 ‘목소리’ 즉 음성의 뜻으로 풀이했다. 이래서 ‘보다’와 ‘음성’을 하나로 붙여 ‘관세음’이라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오류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의 힘은 무서운 것인지, 오랜 시간 관세음보살로 받아들인 불교도들의 힘인지 아니면 고집인지, 관자재보살은 여전히 관세음보살로 받아들이고 있고, 당태종 때 피휘로 영향 받아 관음보살로도 굳어지고, 심지어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의 차이에 대한 해석도 나와 있는 형편이라, 현장 스님은 이걸 어떻게 생각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석장(錫杖, Khakkhara)은 비구18물(比丘十八物) 가운데 하나로 승려들이 길을 나설 때 짚는 지팡이로 유성장(有聲杖), 성장(聲杖), 명장(鳴杖) 등으로 불린다. 승려들이 밖에 나가서 길에서는 지네, 독사 등 해충을 막고, 소리를 들은 미물들이 피하게 함으로서 살생을 피하며, 걸식을 할 때는 이것을 흔들어 소리를 내서 비구가 온 것을 알리며, 노승이 몸을 의지하는 것으로도 사용하는 등 승려들의 생활 용구로서의 역할과 지장보살의 상징물, 천수관음보살의 지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들고 다니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수호전』에서 화화상 노지심이 들고 다니는 선장(禅杖)이 바로 석장에서 파생된 무기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삼장법사
화화상 노지심
참고로 비구18물이란 출가생활의 기본인 수행자의 일상 필수품으로, ①양치할 때 쓰는 가는 나뭇가지(칫솔), ②손 씻을 때 쓰는 비누, ③세 가지 가사, ④물병, ⑤발우, ⑥방석, ⑦석장, ⑧향로, ⑨물거름 천, ⑩수건, ⑪머리 깎는 칼, ⑫불붙이는 부싯돌, ⑬코털 제거용 칼, ⑭간이 의자나 침상, ⑮경전, ⑯율장, ⑰불상, ⑱보살상으로 구성된다.
p.378
손오공과의 대결을 준비하는 금각대왕의 모습
손오공과 전투를 벌이려는 금각대왕의 모습은 『서유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頭上盔纓光燄燄,腰間帶束彩霞鮮。
身穿鎧甲龍鱗砌,上罩紅袍烈火然。
圓眼睜開光掣電,鋼鬚飄起亂飛煙。
七星寶劍輕提手,芭蕉扇子半遮肩。
行似流雲離海岳,聲如霹靂震山川。
威風凜凜欺天將,怒帥群妖出洞前。
머리에 쓴 투구 끈이 불꽃처럼 빛나고, 허리를 질끈 동인 디에 채색 노을빛이 선명하다.
몸에 걸친 미늘 갑옷에는 용의 비늘이 기왓장처럼 포개지고, 그 위에 덧입은 붉은 전포는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 같다.
고리눈을 부릅뜨니 그 광채가 번갯불처럼 빛나고, 강철 같은 구레나룻이 흩날리는 연기 속에 어지러이 나부낀다.
칠성보검 칼자루를 가볍게 거머쥐고, 파초선 부챗살이 어깻죽지를 전발쯤 가리었다.
몸을 쓰는 품이 흐르는 구름장 해악(海岳)을 떠나가듯 하고, 목청은 뇌성벽력이 되어 산천을 뒤흔들어놓는다.
하늘의 장수를 얕잡아보는 늠름한 그 위풍, 분노에 찬 기세로 요괴의 무리를 휘몰아 동굴 앞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