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 제천현녀는 현문玄門을 건너고 구천九天의 비문秘文은 진토塵土로 돌아가다
현문은 불교를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도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문맥에 맞춰 해석을 해보면, 불교와 도교 둘 다 맞는 것 같다.
먼저, 현문을 불교라 상정하자. 불교를 현문이라 하는 까닭은 불교의 교리가 깊고 묘하므로[玄], 절대의 이상경(理想境)인 열반에 들어가는 길[門]이라 이르기 때문이라 한다. 즉, ‘제천현녀는 현문을 건너고’라는 뜻은 ‘제천현녀는 열반에 오르고 → 죽고’의 뜻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지기에게 잡힌 지살의 사슬, 그리고 여자를 포기해야했던 자신의 사슬을 ‘죽음으로’ 끊어내는 것을 이야기한다.
다음, 현문을 도교라 상정한다. 제천현녀가 현문을 건넌다는 것은 제천현녀가 도교를 떠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무지기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중국의 전통 종교인 도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으로 보아, 용아녀가 죽기 전에 바랐던 ‘천축으로 가는’ 꿈을 (손오공이 대신해) 이룬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천은 하늘을 아홉 방위 구역으로 나눈 것으로, 하늘의 중앙을 균천(鈞天), 동방을 창천(蒼天), 동북방을 변천(變天), 서방을 호천(顥天), 서남방을 주천(朱天), 남방을 염천(炎天), 동남방을 양천(陽天), 북방을 현천(玄天), 서북방을 유천(幽天)으로 구분지은 것이다. 도교에서는 ‘일기(一炁)가 삼청(三淸)으로 나뉘었다’는 학설에 따라, 삼청천(三淸天), 구중천(九重天), 이십칠천(二十七天)을 두었고, 구중천과 이십칠천을 합쳐 삼십육천(三十六天)을 삼청경(三淸境)에 나누어 각기 12천씩 관할한다고 한다. 간단하게 얘기해, ‘하늘’을 뜻한다.
참고로, 고대 인도의 우주론을 살펴보면, 세계 최하위인 허공(虛空) 위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수륜(水輪), 그 위에는 금륜(金輪)이 있다고 한다. 금성지륜(金性地輪) 혹은 단순히 지륜(地輪)이라고도 한다. 산이나 바다나 섬은 이 금륜상에 존재한다고 한다. 금륜의 최하단을 금륜제(金輪際)라 한다.
p.294
“어... 어찌 된 영문이지? 산채가 당군에게...?!”
“대... 대왕마마... 이미 틀렸습니다...! 다... 달아나십시오!”
금각이 당군과 대적한 사이, 손오공이 은각을 비롯한 산채의 패거리를 모조리 학살했으며, 어부지리로 뒤를 급습한 당군이 산채를 차지한 상황이 발생했다. 금각은 『서유기』에서 동생 은각의 죽음은 물론, 어머니, 외삼촌을 비롯, 동굴의 수많은 요괴 수하들까지 모조리 죽는 것을 목격하는, 흔치 않은, 어찌 보면 참 기구한 요괴이기도 하다. (사실 요괴는 아니지만...)
금각이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은 『서유기』의 이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손오공이 ‘신외신’ 술법으로 자신의 분신들을 이용, 금각의 부하들과 싸움을 벌이자, 금각은, 파초선을 써서 동굴을 불태워버린다. 불길이 워낙 드세, 몸을 잠시 피한 사이, 손오공은 금각의 부하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스승과 사제들을 구해 동굴을 도망친다. 잠시 후 금각이 소굴로 돌아왔는데, “사면팔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뜨이는 것이라곤 모조리 참혹하게 맞아죽은 부하 요괴들의 시체뿐이다.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혀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터뜨렸다.(但見屍橫滿地,就是他手下的群精。慌得仰天長嘆,止不住放聲大哭道)”
p.297
“아우야...! 설령 온 천하가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고 해도 우리 형제의 결속만은 끊어지지 않을 줄 알았거늘...! 그런 애송이 때문에 네 목숨이 다할 줄이야...! 내 이 원수는 기필코 갚아주마!”
금각이 동생 은각의 죽음을 알고 절통해하는 부분 역시, 『서유기』에서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那老魔聞得此言,諕得魂飛魄散,骨軟觔麻,撲的跌倒在地,放聲大哭道:「賢弟呀!我和你私離上界,轉託塵凡,指望同享榮華,永為山洞之主。怎知為這和尚,傷了你的性命,斷吾手足之情。」滿洞群妖,一齊痛哭。
늙은 마귀가 이 말을 듣더니 혼비백산하도록 놀라 자빠졌다. 뼈마디는 사개가 물러나고 힘줄은 녹신녹신하게 풀어졌으니 제가 무슨 수로 서 있으랴. 금각대왕은 아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목놓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우님아! 아우님아......! 내가 그대와 하늘나라를 몰래 떠나 속세에 몸을 던지고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며 영원히 평정산 연화동의 주인이 될 것을 바랐더니, 저따위 중 녀석 하나 때문에 그대 목숨을 다치고 형제간의 정분마저 끊길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대왕이 통곡을 하니, 동굴 안의 부하 요괴 패거리들도 덩달아서 일제히 울음보를 터뜨렸다.
p.310
“저들에게 이 비문을 보일 수야 없지... 백운동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어...”
용아녀는 역사에 기록되고, 앞으로 기록될 천강・지살의 인명부를 지키는 것을 결심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도가 섞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하나는 (당연히) 손오공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명이 유출됨으로 해서, 이제 좀 진정 되가는 중국 대륙에 또 다른 피바람이 불 수 있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마치 『칼의 노래』에서, “길삼봉이 지리산 피아골에서 역모의 군사를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 실체를 얻자, 전국에 길삼봉이 창궐, “길삼봉이 누구냐”라는 질문이 “누가 길삼봉이냐”로 바뀌면서 그 존재하지 않는 길삼봉들을 죽이려 온 산천에 피를 뿌렸듯이.
용아녀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도참서(圖讖書)’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예언서인데, 『자치통감』권183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수양제 대업 12년 (616년)에 “근래 사람들 사이에 불리는 노래로 ‘도리장(桃李章)’이 있는데, ‘도리자(桃李子)여, 황후가 양주(揚州)를 두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르네. 여러 말을 하지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라고 하였소. 도리자란 도망한[桃] 사람 이씨(李氏)의 아들을 말하며, 황(皇)과 후(后)는 모두 주군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른다’는 것은 천자가 양주(揚州)에 있고 돌아올 날이 없어서 장차 도랑에 구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여러 말을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란 비밀이란 말이오.”라고 이현영(李玄英)이 이밀에게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는데, 즉, 수나라가 멸하고, 이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자리는 이밀이 아니라 이연이 차지하게 되지만. 어쨌든, 이런 확인되지 않은 도참서로, 수많은 효웅들이 수양제의 실정을 기회로 일어서게 되고, 전국이 초토화가 된 상황에서, 이런 불길한 인명이 유출된다면, 앞으로, 이 인명들을 핑계로 수많은 백성들의 피가 뿌려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제괴지이』「귀시(鬼市)」, 「연견귀(燕見鬼)」편에서 이런 도참서와 비슷한 예언서 ‘추배도(推背圖)’를 다루었는데, 아쉽게도 ‘방랍(方臘)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완으로 이야기를 맺었었다. 이는 2011년에 일본에서 완전판 형태로 재편집하는 과정에 약 50p 정도의 분량으로 남은 이야기를 맺어 ‘완결’을 맺었다는데, 평가는 그리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새로운 50p를 위해 본 걸 또 사야한다는 억울함이 그런 평가를 내리는데 한몫 하는 것 같다.
p.316
“지금 내게는 제천현녀의 힘이 없어... 그래도 백운동의 비밀을 지키려면... 대성이시여... 나에게 마지막...”
무지기는 수많은 인간들의 피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기는 이 인명부가 나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 인명부가 세인들에게 전해지면, 국가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그 명부에 올라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이며, 그 이름들을 핑계 삼아 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이다. 이 명부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도참서’와 같이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명부에 실린 대로, 천강이든 지살이든 시간을 두고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이 바로 무지기가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기는 용아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p.320
무지기의 눈에 박힌 은고봉
용아녀의 은고봉이 제천대성의 눈에 박히자 백운동이 무너진다. 이것이 제천현녀의 마지막,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바랐던 소원을 무지기가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신진철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흥미로운 것은 제천대성의 눈에 은고봉이 박히니 마치 마법이 깨지듯, 백운동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화과산에서 다른 공격에는 끄떡 않던 제천대성이 눈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점, 황허에서 보았던 눈을 잃은 무지기가 하급 요괴 같이 보인다는 말, 그리고 『오뒷세이아』에서 눈을 잃은 폴리페무스 역시 눈을 잃은 후 무언가를 감싸고 있던 오라가 사라지는 평범한 요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모로호시 선생은 『머드멘』에서 아엔의 눈에 화살이 박히자, 주술이 풀리는 것을 그린 바 있다.
p.322
“오공... 천축에 가보고 싶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위해 오행산을 벗어나지 못했던 용아녀가 죽기 전에 이야기한 것은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오공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용아녀의 말은 오공의 가슴속에 남는다. ‘천축’이라는 말은 앞으로 끊임없이 오공의 주위를 맴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