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이 출시되는 왕가위(王家衛)감독의 <열혈남아>의 한자 표기가 잘못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블루레이와 디브이디 공히 "旺角下問"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다. "旺角卡門"이 맞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원래 이 영화의 원제는 <몽콕하문>이다. 그런데 수입사에서 이런 이상야릇한 제목으로는 흥행이 별로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당시 유행한 홍콩 느와르 영화들의 분위기에 편승해 조금은 촌스러운 제목의 <열혈남아>로 개봉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국에서 빅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기이한 사실은 왜 <旺角卡門>이 <몽콕하문>으로 불리게 됐는지다. 이 제목은 일반 홍콩영화처럼 사자성어가 아니라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旺角'은 홍콩의 번화가인 '왕자오'를 가리키고 '卡門'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의 음차어이다. 해석을 하자면 <왕자오 (거리)의 카르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왕자오'는 영어식 표기인 '몽콕'으로 '카르멘'은 그냥 한글 음차 '하문'인 국적불명의 사자성어로 둔갑했고, <열혈남아>의 원제는 <몽콕하문>으로 굳어지게 됐다.

 

   아마도 <旺角卡門>이 <旺角下問>으로 둔갑하게 된 이유에는 제작사의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그런 게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몽콕하문을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검색을 하면 '卡'자가 대개 '?'로 표기된다. 그 '?'를 확인하기 귀찮아 '하'자 중 가장 유명한 '下'를 표기하고, 그 옆에 표기된 '門'자 조차도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아 '問'으로 표기한 게 아니었을까. (혹시 아래한글 자동 한자바꾸기로 돌려 첫 번째 변환 단어를 넣은 것은 아니겠지...) 기왕에 원제를 표기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표기하던가(IMDB나 Wikipedia 정도만 검색해도 정확한 제목이 나온다), 그도 아니면 검수라도 한 번 했으면 됐을 것을. 아니면 한글제목 옆에 작게 표기라도 하지, 아웃케이스, 슬리브, 디스크, 소책자 보이는 곳마다 오타를 큼직하게 박아놨으니... 이러다 <春光乍洩>은 <春光社說>로 출시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든다.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서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를 쉽게 교체할 수 있기 위해 통조림처럼 평평하게 만든 머리, 번개를 끌어들이기 위해 목에 박아 넣은 큰 못, 위압감과 순수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 우리가 생각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시작됐고 완성되었다. 이후에 제작되는 모든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화들은 이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잘못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오해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영화 포스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타이틀 밑에 그려진 괴물의 이미지는 ‘괴물=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이후에 나오는 속편들의 제목 또한 그런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아들, 집, 기타 등등.>) 그만큼 이 영화에 등장한 괴물의 이미지는 강력했다. 이 모든 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웨일(James Whale)의 비전과 잭 피어스(Jack Pierce)의 분장, 괴물을 연기한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다.

   페기 웨블링(Peggy Webling)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는 메리 셸리의 원작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친구인 앙리 클레르발이 영화에서는 헨리 프랑켄슈타인(Henry Frankenstein), 빅터 모리츠(Victor Moritz)로 서로 뒤섞여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정확한 이름은 ‘하인리히 헨리 프랑켄슈타인, Heinrich “Henry” Frankenstein’이다. 이 중 ‘하인리히’는 원작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신비에 빠져들도록 한 16세기 독일의 마술사이자 오컬트 작가이자 신학자이자 점성가이자 연금술사인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쉼, Heinrich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빅터 모리츠는 절친인 헨리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애인 엘리자베스 라벤차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원작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는 영화의 1/3을 할애하면서 감독의 역량을 맘껏 쏟아 붓는다.

   영화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는 없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악이라기보다는 백치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방금) 배운 논리에 따른 행동이었다. 공동체에 속하고 싶지만 남들과 같지 않아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괴물. 후에 팀 버튼(Tim Burton)이 창조해낸 수많은 사랑스런 괴물들의 모체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2014년 1월 21일 블루레이로 시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 설 다우리(J. Searle Dawley) 감독의 1910년 작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최초의 영화이다. 무성영화에 10분 남짓한 상영시간으로 원작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었는데(그 때문인지 영화 처음에 “셸리 여사의 소설을 자유롭게 각색”했다고 명시했다), 원작에서 차용한 부분 중 절반 이상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총 9개의 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신을 설명하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으로 떠난다.

#2 2년 후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신비를 알아냈다.

#3 실험 직전.

#4 완전한 인간 대신에, 프랑켄슈타인의 마음 속 악마가 괴물을 만든다.

#5 프랑켄슈타인은 그가 만든 무시무시한 피조물의 광경에 끔찍한 충격을 받는다.

#6 귀향.

#7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이 나타나고 처음으로 그 자신을 본 괴물은 창조주의 애인을 질투한다.

#8 결혼식 밤, 프랑켄슈타인의 착한 심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9 사악한 마음의 피조물은 사랑에 압도당하여 사라진다.

 

   이 중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과정이 흥미로운데,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마치 마녀처럼) 마법으로 ‘괴물’을 창조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랑켄슈타인이 창조가 과학이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악한 의도’로 ‘생명’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악한 행위를 설명하는 영화적 표현이기도 하다.

   워낙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에 프랑켄슈타인과 괴물과의 갈등이 단순해진 점은 있지만, 재치 있는 반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점, 그리고 ‘처음으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의 모습을 스크린에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2014년 3월 13일 유튜브에서 시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은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충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 200여 년에 걸친 세월동안 『프랑켄슈타인』은 연극, 영화, TV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너무나 많은 변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1831년 『프랑켄슈타인』의 2판이 출간될 당시 런던에서 다섯 편의 프랑켄슈타인 관련 연극이 상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끊임없이 매체를 바꿔가며 각색되는 이유는 시체를 살려낸다는 괴담에 있지 않을까. 음침한 실험실, 공동묘지에서 매일 재료를 취합하는 광기어린 과학자, 그리고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비극에 빠져드는 창조주. 하지만 이런 공포와 드라마틱한 비극은 이후의 각색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에 대한 묘사는 최소화되어있다. 작가는 창조의 신비, 경외 혹은 공포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그 이후의 문제, 창조자의 역할에 관심이 있다. 당신이 하나의 생명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완전무결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숨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흉내를 낼 수 있었지만, 신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흉내에 대한 대가는 가혹했다.

   계몽주의가 만연했던 18세기, 그리고 '천재'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회고로 진행되는 소설인지라 고루하고 만연한 문체로 진행되어 좀 지루한 감이 있지만, 감내하고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장이 천축으로 간 이유는 『십칠지론』의 원본을 보고 싶어서이다. 『요원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불교계는 지론종과 섭론종으로 나뉘었는데, 그 이유는 제8아리야식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었다. 왜 하나의 경전에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종파까지 갈리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중국의 종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는 중국의 고대종교가 어떻게 유교와 도교로 나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외래종교로서 불교가 어떻게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글이다. 하지만, 현장이 천축행을 결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자그마한 정보는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고대 종교

   고대 중국의 사람들은 황하(黃河)유역의 평원에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했었다. 괭이를 이용한 개간지의 사용이 쟁기를 사용함에 따라 영구 경작지를 조성하였고, 이로 인해 토지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런 토지를 바탕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단위인 영지(領地)가 이루어졌다. 토지를 단위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계층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세속조직과 종교조직의 모든 기본요소는 모두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처럼 영지였다. 세속사회는 가족집단과 영지의 소유라는 두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조상숭배와 토지신(土地神) 숭배를 토대로 삼았다. 이 두 숭배는 사회의 두 가지 근본사태를 종교적으로 전환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상과 토지에 대한 숭배는 모든 계층에 다 있었다. 귀족들은 신들에게 인간의 위계와 같은 신의 위계를 형성시키고, 그 위계에 맞는 숭배를 했다. 그것은 토지신의 숭배가 통치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토지는, 국가의 수호신이며 국가권력을 나타냈다. 죽음에 대해서도 토지신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기 때문에 땅의 지배자가 죽은 사람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그리 명확하진 않았지만, 분류한다면, 토지신이 다스리는 황천(黃泉), 상제(上帝)가 다스리는 천상(天上), 그리고 조상의 영혼이 머무르는 종묘(宗廟)가 있었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라는 명확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개념대신 인간세계의 위계와 같은 위계가 사후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천상에 올라가는 이는 보다 지배적인 위치의 소수(周나라 文王의 예)이고, 대부분은 황천으로 간다고 믿고 있었다(기원전 8세기 齊나라 제후 鄭伯의 예). 고대인들은 인간이라는 것은 혼(魂)과 백(魄), 그리고 형신(形身)이 합쳐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형신과 혼백의 분리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백은 묘에 위치할 수 있었지만, 하늘로 올라간 혼은 흩어지거나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혼이 머무를 장소인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조상이 되거나 제사를 받을 권리가 없었다. 제사를 받기 위해서는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한다. 장례는 귀족이 주도한 문화이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토지신과 조상의 문제는 지배권과 영토, 그리고 종묘와 사직으로 대표되는 지역과 혈족을 통한 정치적 신성(神性)이었다.

   반면에 농민은 문화적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라는 절차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고 나서 신성이 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농민의 제의(祭儀)는 농사와 관련되어있다. 생산력에 기반을 둔 종교와 밀접해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사회적 특징은 토지의 생산력(불을 붙이는 종교적 의식)과 가문의 생산력(야합이라는 제의적 절차)이 결부되어 토지신에 대한 축제를 벌였다. 축제의 주체는 생산자인 농민이었다. 귀족들의 제의가 토지신과 조상신에게 지내는 정치적 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면, 평민층(농민)의 제의는 농업 생산력에 기반을 둔 생산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 평민층의 제의는 귀족들의 제의에 독자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치적 룰에 예속되었으나, 조상에 대한 제의에서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 이 둘이 서로 결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달마다 그 계절의 수확물을 조상에게 바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신에게는 각기 제삿날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물론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의 제의가 고대 종교의 틀을 잡은 것은 확실하나,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한 공적인 종교였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갈망했고, 그래서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신과 인간의 특별한 매개자인 무인, 즉 무당을 찾아갔다. 무는 개인적인 신앙을 위한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에서도 이들을 관료화 시켰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위치였다. 이들의 자기 부정적 행위는 국가에서도 상당히 불안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고대 종교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농민층의 생산적 신성, 귀족층의 정치적 신성, 그리고 개인의 영역인 무의 초월적 신성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월적 신성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이었지, 공적인 위치에는 오르질 못했다.

   이런 것이 종교라는 큰 테두리에서 볼 때 중국 고대 종교였다. 그것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후(귀족), 제후를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신하(농민) 등 각 개인이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에만 따르는 특정한 사회집단의 종교생활이 표현된 것이었다.

 


 


고대 종교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로 갈라지게 된 까닭

   고대 농민의 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던, 인과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대로 토지신이나 조상에게 관련된 귀족의 종교는 인격신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바라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신의 인격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문명이 발달하고 지적으로 진보하면서 후자의 관념이 점차 확실한 지반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신들의 가호를 얻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풍성하고 정결한 제물은 영토와 주민을 위해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이처럼 봉건사회의 조직을 신의 측면에서 재현한 종교는 국가종교였다. 제후국은 정치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단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국들의 붕괴는 고대 종교에 치명타를 가했다. 고대 종교는 국가종교이기에, 국가의 붕괴는 종교의 붕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500여개의 제후국이 10여개의 대제후국으로 통합되자, 수백여 곳에서 거행되던 제사가 중심지 십여 곳에서만 거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제후국이 통합되기 전에는 제후국의 영토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참여 때문에 농민들에게 고대 종교가 살아 있고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제후국은 너무 넓어서 영토내의 많은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종교는 본래 제사 지내는 제후와 제사에 참여하는 농민의 결속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농민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사는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제사는 지배권의 상징을 확인하는 의례적 행사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고대 종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체세력인 기록자[史]계층이 출현한다. 바로 이 계층에서 철학적 운동이 일어났고 종교사상이 발전했다. 그들은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일을 맡아서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 통치이론을 만들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통치문제와 분리되지 않았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사가 점차 천박하고 무례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신의 인격성이 강조됨에 따라 신의 호의를 제물과 상업적으로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제사에서 제물을 완벽하게 바치기보다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들과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도덕을 갖추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신은 제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하게 되었다. 고대 종교에서 이러한 분화는 이 시기 중국 종교의 제의의 일반적인 경향에 상응하는 두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합리주의적인 태도와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태도이다. 전자는 종교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없애는 한편, 외형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주의자들의 시도였다. 후자는 공식 제사와 집단 제의에 결여된 것들을 보완하려는 개인적인 종교에 대한 추구였다.

   결국 이런 강력한 두 흐름이 먼저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선호하는 유교(儒敎)를, 그 다음으로 개인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도교(道敎)를 만들었고 도교를 넘어 후대에 불교(佛敎)가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유교는 정치적 신성 속에서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합리성에서 발전 된 것이고, 도교는 초월적 신성 속에서 개인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교와 도교는 생산적 신성과 정치적 신성, 그리고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발전하고 반성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을 하고 반성을 해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도교만이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유교 또한 샤먼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죽음에 관련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①선조와의 관계(과거) ②부모와의 관계(현재) ③자손, 일족과의 관계(미래)를 나타낸다. 유교는 이 관계를 흩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통합시킨다. 곧 ①조상의 제사, ②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 ③자손을 낳는 일, 이들 세 가지 행위를 포함하여 ‘효’로 삼았던 것이다. 효를 행함으로써 자손을 낳고 조상을 재생시키며 자신도 또한 언제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자손과 일족에 의해 이 세상에 재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생명론이 유교에서의 효의 본질이다. 유교는 이 위에다 가족윤리(가족이론)를 만들었고 또 그 위에다 정치윤리(정치이론)를 만들었던 것이다. 후세에 12세기의 신유교가 되면 그 위에다 다시 우주론과 형이상학까지 만들게 된다.

   이처럼 고대 종교의 양산은 생산적 신성, 정치적 신성,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반성하고 발전해서 양산된 것이 아니라, 이들 세 가지의 날줄과 씨줄의 촘촘한 의미망에 의해서 양산된 것이다.

 


 


◆불교(佛敎)

   이렇게 명확하게 갈린 양대 종교 사이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는 ‘새로운 형태의 구원’을 제시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불교가 서서히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도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이다.

   불교 경전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번역된 경전을 한자로 기록한 기록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도교도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불교 경전은 각각의 팀으로 번역 작업이 행해졌다. 각 팀의 구성원은 외국인 승려, 기록자(들), 통역관으로 이루어졌다. 작업은 외국인 승려가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그럭저럭 설명하면,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기록자들이 구어로 설명된 것을 한자로 초안을 잡는다. 외국인 승려가 중국어에 능숙하지 않을 때는 통역관이 개입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번역물을 검토할 때에는 외국인 승려가 배제되기 일쑤였고, 번역물은 기록자(들)의 용어와 사상, 해석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전문 용어들은 도교에서 빚진 것이 많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달리 한자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표의문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처가 보리(菩提)를 얻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도를 얻는다’는 표현은 명백히 도교의 것이다. 이 전통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원본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해석한 차이의 입장이 갈려 종파가 나눠지기도 했다.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는 바로 이 갈라진 해석들을 하나로 바로 잡고 싶은 욕망(혹은 소명)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불교는 도교와 이름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종교로 보이기까지 했다. 도교가 신선이 되어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불교는 부처가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도교에 비해 간단하며 저렴하기까지 했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곡물법, 양생법 등 실생활에서 지켜야할 규율이 많고, 단약 제조 등 돈이 많이 들지만, 불교에서는 (도교에 비해) 간단한 명상과 수행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겪으면서 불교는 도교와 유교에 버금가는 강력한 종교가 됐다. 그 이유는 끔찍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이연이 당(唐)을 세우기까지 약 400여 년에 걸쳐 전쟁과 착취가 빈번하게 지속됐다. 백성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지배계층조차 나라의 흥망에 따라 하루아침에 귀족에서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삶은 고통이었고 생명은 허망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고쳐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절망.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 끝없는 절망의 윤회를 끊고 피안(彼岸)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불교는 지배 세력들의 눈에 들어 수당(隋唐)시대를 거치며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종교는 정치와 윤리에 봉사해야 한다’는 유가사상이 스며들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은 불교만의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종교는 정치에 예속되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儒), 불(佛), 도(道)라는 세 가지 사상이 서로 공격하고 논박하는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서로 공존하고 협조하는 길로 접어들게 됐고, 나머지는 역사와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