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한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경마장 가는 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장선우 감독의 세 번째 영화(선우 완 감독과 공동 연출한 <서울 황제>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 <경마장 가는길>은 전적으로 원작자인 하일지 작가에 기대어 있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의 각색과 시나리오를 하일지 작가에게 맡겼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 소설과 거의 똑같다. 심지어 그 지난한 문어체의 대사까지 거의 그대로 진행한다. 장선우 감독은 이 소설을 옆에서 읽어주듯이 정말 그대로 영상화 시키길 원했던 것이었을까? 그럴 의도도 있었던 것 같지만, 꼭 그런것 같지만은 않다. 장선우 감독의 악동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하일지 작가의 『경마장 가는 길』이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알렸다면,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길>은 영화의 기존 문법을 거의 와해시키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R이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5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R은 프랑스에서 3년 반동안 같이 지내고, 논문도 대신 써줬으며, 한국에서 문학평론가로 데뷔시킨 J와 섹스를 하려 하지만, 계속 거부당한다. R은 부인과 이혼을 하려 하지만, 그 또한 거부당한다. R은 프랑스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하고, J와 함께 가자고 권유한다. J는 알았다고 했으나, 거부한다. R은 J의 비밀을 J의 부모에게 다 이야기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그가 쓰기 시작한 글은 소설 첫 장의 묘사와 똑같이 진행되고, 소설 제목은 『경마장 가는 길』이다.  

   소설은 J와 R의 아내 이야기 외에 '알랭드롱을 닮은 사내', '뚱뚱한 사내', 'E 교수', 'N 교수' 등과 R이 보낸 이야기와, R의 가족과 관련한 이야기가 J와 R의 아내 이야기의 분량과 거의 동일하게 삽입되어 있다. R을 중심으로 기록한 '개인사'라 봐도 무관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어떤 장르에 예속되기 보다는 탈장르적으로 보이고, 지독한 관찰자 시점의 서술로 인해, R을 비롯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장선우 감독은 이 지난한 이야기에서 R, J, R의 아내 이야기를 꺼내어 재구성시켰다. 이야기가 이렇게 모아지니, 이 영화는 'R이 J와 섹스를 하려는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장선우 감독의 유희가 시작된다.

 

 

   영화는 김포공항의 모습을 보여주고 "R(문성근)이 돌아왔다"는 장선우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R은 공항에 마중나온 재희(강수연)- 소설과 영화 크레딧에는 'J'라고 나오지만, 문성근 씨의 발음은 '재희'로 들린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강수연 씨가 기고한 평론의 이름을 보면 '정재희'라고 쓰여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기호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R뿐이고, 이 영화의 화자인 장선우 감독은 오직 R만을 이해못하는 타자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의 차를 타고 하룻밤을 지낼 여관에 간다. 

   영화는 크게 3개의 공간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R이 잠을 자고(그의 집은 대구에 있는데, 그는 서울에 일 때문에 자주 올라온다) 재희와 섹스를 하는 '여관'이라는 공간이다. 두 번째는 거의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다방'이라는 공간이고, 세 번째 공간 또한 거의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재희의 '차 안'이다. 영화는 거의 80% 이상을 이 공간에 할애하고 있다. 

   여관, 다방, 차 안의 공통점이라면, 이 공간은 창작자나 등장인물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의) 모든 영화의 공간은 감독의 의지가 개입된다. 공간에 배치된 자잘한 소품과 그 위치까지도, 감독의 의지가 개입이 된다. 특히나 그 공간이 주인공이 기거하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의 사건이 전개되는 주요 공간인 여관, 다방, 차 안은 감독의 의지가 개입될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사적 공간인 동시에 공적 공간인 셈이다. R과 재희가 같이 있는 여관, 다방, 차 안의 공간은 그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하더라도 똑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한마디로 미장센의 무력화. 장선우 감독은 하일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의 미학적 기능에 딴지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의 허무주의에 가까운 이런 미학적 '자살'은 훗날 <거짓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영화는 거의 '여관방'밖에 나오지 않는 포르노니까. 

 

 

   육화된 대사 또한 재미있는 요소다. R은 재희에게 장광설의 이야기를 한다. 이 '지나치게 진지해서 우스꽝스런' 대사가 문자화되어 있을 때는 그나마 진지하게 읽을만한 구석이 있긴 한데, 이게 '문성근'이라는 배우에게 육화되어 나올 때, 그 우스꽝스러움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영화를 보다가 킥킥거리기는 다반사고, 벌떡 일어나서 배를 잡고 끅끅거린 것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는 R과 재희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화가 좀 진행된다 싶으면, 카메라는 다른 쪽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다 대화가 끝날 때 쯤 다시 등장인물을 비춘다. 이 이야기의 관찰자이자 화자인 하일지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R과 J의 이야기와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빠짐없이 다 서술한 반면, 이 영화의 화자인 장선우 감독은,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지겨워져서 딴청을 피우는 쪽이다. 그는 R과 재희의 현학적인 대화(그래봤자 '한 번 하자'는 얘기다)보다는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른 아침 모텔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중년 커플들, 단란주점에서 손님들을 배웅하는 아가씨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설파하는 전도사와 '멸공'차량 등 -에 더 관심을 가진다. 장선우 감독은 이 포스트모던한 소설을 가지고 영화라는 형식을 계속 무효화 시키고 있는 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보다 1년 앞섰고, 도그마 선언보다 4년 앞섰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 <경마장 가는길>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의 오독으로 보이길 원한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타이틀 '경마장 가는길'이 띄어쓰기가 틀린채, 견고딕체로 쓰여 있다. 영화의 마지막, R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 밖의 광경을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글의 제목은 '경마장 가는 길'이고, 영화의 타이틀이 다시 한 번 나오는데, 제대로 된 띄어쓰기에 바탕체로 쓰여있다.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 끝에가서 소설 안 소설과 소설 밖 소설이 맞물려 다시 시작하는 소설이라면, 영화 <경마장 가는길>은 영화로 다시 돌아가기 보다는, "감독이 오독한 <경마장 가는길>을 다 보셨으니, 이젠 제대로 된 『경마장 가는 길』을 읽으시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장선우 감독은 132분 동안 관객을 상대하며 시종일관 낄낄거린 셈이다.  

   불쾌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그의 의도가 우리를 '경마장'으로 안내하는 방식이 아닐까? 경마장이 실제로 있건 없건간에. 

 

 

 

 

*덧붙임: 

1.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라면, 인물들에 대한 배우의 해석이겠지요. 소설에서 때론 이지적이고 근엄해보인 R은 영화에서 꽤나 찌질하게 보입니다. 소설에서 '아무 생각 없는 것 처럼 보이는' J는 강수연 씨의 해석으로 다소 '적극적'인 여성으로 보입니다. 

 

2. 역시 장선우 감독님도 원작소설의 이 대사를 상당히 재미있어 하신 것 같습니다. ^.^;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니?" 

 

3. 그러고보니 R의 아내로 나온 김보연 씨를 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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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5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오래전 본 영화!
얼마전 본 '실종'에서 사이코패스 역의 섬뜩한 문성근을 봤는데
저 찌질했던 역할의 문성근 얼굴도 저땐 비교적 푸릇하네요.
저 대사 기억나요. 너의 이런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냐?ㅎㅎ

Tomek 2010-03-25 18:30   좋아요 0 | URL
<실종>은 내용이 무서워서 못봤어요. 역시 문성근 씨는 그런 위악적인 역할이더라도 '먹물'행세 하는 역할이 근사한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경마장 가는길>에서 먹물병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ㅎㅎ 영화에서 자주 봤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

순오기 2010-03-2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볼 때 '한번 하자'는 얘기를 저렇게 지루하게 풀어가야 하나? 생각했던 1인.^^
좀 지루하고 재미없게 보면서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소설은 안 봐서 몰라요...
영화리뷰의 양대산맥인 프레이야님과 토멕님!^^

Tomek 2010-03-29 10:03   좋아요 0 | URL
지금보시면 더 재미있으실지도 모르겠어요. ^.^;
헤헷~ 고맙습니다.

novio 2010-03-3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고전도 있네요.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아시는지 놀랄 따릅입니다. 정말 영화 전문가시네요. 다른 분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 느껴집니다

Tomek 2010-03-31 15: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아인스에서 한국영화컬렉션을 싸게 팔때 구입해서 하나씩 천천히 보고 있는거예요. 일종의 재고소진이랄까. 영화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쓴 글들은 제가 읽어봐도 재미가 없는걸요. novio님이나 다른 분들의 글들은 읽는 재미가 있는데 말이죠. 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지루해하는 글을 쓰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이러니 뭐 말 다했죠. ^.^;
좋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pjy 2010-04-1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죽거리길 좋아해서 소설보면서 이 대화는 요지가 모냐..이러면서 보다가 말다가~ 한참 삼천포로 빠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ㅋㅋ

Tomek 2010-04-12 10:39   좋아요 0 | URL
결국엔 '한 번 하자'로 귀결되는 모든 대화였죠. ^.^;

혁궁 2012-04-2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경마장 가는길을 보았습니다
R과 J의 대화 중 괜한 장면을 보여주는 등 쇼트를 왜 나누지 않았나 햇는데
이런 뜻이 있었군요 알고보니 매우 혁신적인 영화네요 글 잘봤습니다!

Tomek 2012-04-23 09:57   좋아요 0 | URL
그냥 제 생각일 뿐, 어떤 의미였는지는 감독만이 알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