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아주머니네들과 저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데요?"
   R은 깍두기를 버적버적 씹으며 건너편 탁자 앞에 웅크리고 앉아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는 두 여자를 향하여 말했다. 그러자 두 여인 중 하나가 꿈에서 얼핏 깨어난 눈으로 R을 돌아보며
   "그래도 재미있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일지의 첫 장편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을 봤을 때와 거의 같다. 매체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삶의 '지리멸렬'함을 다뤘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느낌은 그런 추상적인 느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는데, 마치 인물들을 CCTV로 감시한 느낌이었다. <강원도의 힘>이 카메라의 역할이 CCTV와 같은 느낌으로, 인물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인물들의 짓거리를 보여주었다면, 『경마장 가는 길』은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에서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 사항을 문서로 작성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극단을 보여준다. 

   소설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R은 시간 강사 자리를 구하고 본가가 있는 대구와 강의를 하는 서울을 왕복한다. R은 프랑스에서 같이 생활한 J와 섹스를 원하지만, J는 계속 거부한다. R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힘들어하며, 부인과 이혼을 결심하고 J와 같이 프랑스로 갈 계획을 한다. 그러나 J의 우유부단함으로 R은 J와 함게 프랑스로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겪은 일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J에 대한 이야기- 그녀는 순전히 R 덕분에 박사학위를 땄고, R의 원고로 문학평론가가 됐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엔 이런 얼치기들이 교수, 평론가랍시고 위세를 떠는 경우가 꽤 있다 -를 조금 제외한다면, 소설의 내용은 이게 다다. 그런데 이 내용이 무려 680여 페이지에 걸쳐 서술돼 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런 일상의 지리멸렬한 묘사가 생각외로 재미있다는 점이다.

   여러 사건이 벌어지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 사건은 R과 J의 이야기다. R은 한국에 돌아오지만,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이질감을 느낀다. 프랑스에서는 '치질에 걸렸을 정도로' 논문을 쓰고 출판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생산적인 활동을 했으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시간을 버리는' 행동만 반복하고 있다. 어떤 일말의 불안감이 R을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R은 J를 원한다. R의 표현대로 J의 '자궁에 사정을 하길 원'한다. J는 R과 함께 프랑스에 있었고, 오랜 시간을 R과 같이 있었다. R에게 있어 J는 지금의 불안함을 해소시켜줄 존재이다. 그러나 J는 프랑스에서 R과 같이 지냈던 때의 J가 아니다. 그녀는 적당히 '서울'에 적응한 상태다. 조금 길지만, R과 J의 대화를 인용해보기로 한다. 그들은 R이 한국에 들어온 때부터 J와 헤어질 때까지 대화의 소재만 바뀔 뿐, 거의 흡사한 패턴으로 대화를 진행한다. 

   "내가 D 잡지의 이번 호에 난 C 소설가와 대담한 너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나도 안 보태고 말하는데 그 글의 첫 문장을 열 번은 읽었다. 그런데 내가 양심적으로 말해서 열 번을 주의 깊게 읽었지만 네 글의 그 첫 문장을 나는 끝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문장에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문장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문장이 통사론적으로 완전히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에 네가 C 씨에가 한 질문 '선생님의 소설들이 십 년 후에도 공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는 것도 틀려 있다. 이것은 물론 통사론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라 어휘 선택의 부정확성 때문에 틀린 문장이 되고 말았다. 네가 그 질문에서 C 씨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C 씨가 그 자신의 소설 작품들이 십 년 후에까지도 독자들에 의해 읽히고 또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겠지. 그렇다면 '공인'이라는 말은 부적확한 말이다. 공인이란 말의 뜻은 공식적으로 인정하다라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네가 한 질문은 '선생님의 소설들이 십 년 후에도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게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안 하고 하는 게 어디 있느냐"
   "알아요, 알아! 저도 다 알고 있어요."
   "너도 다 알고 있었느냐? 알고 있으면서 왜 너는 그렇게 썼느냐? 그것도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글에? 그게 나한테는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어쨌든 이번에 네가 발표한 글에서 가장 잘 읽혀 나가는 부분은, 그리고 전혀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부분은 내 논문의 몇 부분을 베껴 넣은 데더라."
   "알았단 말이에요! 제발 이젠 그만 하세요!"
   J는 다시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R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이렇듯 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너는 너의 그 이상한 문장들처럼 비논리적이다. 나는 지금 너에게 왜 네가 두 주일 전에는 날 따라 외국에 나가겠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는 그토록 바뀌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다. 그런데 너는 '저는 안 가요! 안 간단 말이에요! 안 간다고 하잖아요!'하고 소리소리 질러댄다. 그게 내 질문에 합단한 대답이 되느냐?"
   "그럼 제가 어떻게 말해야 해요?"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고? 그 경우 네가 만약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 싫다면 '그건 비밀이에요.' 혹운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묵비권을 행사하면 되는 거지. 그렇기는 하지만 원칙으로 말하면, 네가 그토록 가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나와의 인간적이 오랜 정분을 생각하면, 그리고 내가 지금 몹시 피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너는 성실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이 더 옳겠지. 이도 저도 아니고 무대까리로 '안 가요! 안 간다고 했잖아요!'하고 소리소리 지르니 내가 널 미쳤다고 할 수밖에."
   J는 웃고 있었다. R은 멀건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웃고 있구나. 너는 어떻게 웃을 수 있니?"
   "미쳤으니까 웃지요."
   "J야, 넌 왜 그렇게 됐지? 프랑스에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서울 와서 사니까 그렇게 되더냐? 나는 마음속으로 깊이 깊이 슬퍼하고 있다."
   "그럼, 저더러 어떡하란 말이에요?"
 

   J는 아무것도 혼자 결정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의 생각이 없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녀는 그저 R의 결정을 따를뿐이다. 아니, R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무장한 R을 상대하기에 J는 무력하다. 그녀는 그저 R과의 상황을 회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R과 같이 지내는 것은, R이 그녀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R과의 섹스를 거부할 때 뿐이지만, 그나마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너는 내가 이젠 정말 싫으냐?"
   그녀는 대답은 않고, 그 작은 입을 꼭 다문 채, 머리를 좌우로 두서너 번 저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이 있다. 너 그사이에 남자가 생겼니?"
   그녀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다시 머리를 좌우로 두서너 번 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문이 떨어지고 머리를 흔들기까지 약간의 시간적 틈이 있었던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R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러니?"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만 있었다.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니?"

   한국과 J,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시나브로 지쳐가는 R은 문득 자신이 겪는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J에게 자신의 소설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R의 입을 빌린 작가 하일지 자신의 소설론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됐지. 그동안 나는 흡사 내가 허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 가령 길에서 보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버스에서 듣는 대화들의 토막들이, 그리고 지금 저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나한테는 허구적으로 보여.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그 원인도 결과도 그리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
   J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뒤를 돌아보았다.
   "이 서울에서는 내가 길을 걸어가거나, 너와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이렇게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변소로 가 대변을 보거나, 길가에서 오줌을 누거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허구의 세계에서 기획되어 있는 행동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 R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느 소설가에 의해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 R이 지금 너, J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마저도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소설가에 의해 쓰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너에게 섹스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너는 회피한다, 이런 것도 나에게는 너무나 재미있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허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이라고 생각돼. 나는 이따금 내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해 두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나의 소설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걸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면 대단히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유형의 소설이 나오면 무식한 독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느 시대든지 참된 소설의 독자는 언제나 무식하게 마련이지."
 

   소설이 거의 끝나갈 때, 나는 두 번의 충격을 받았는데, 하나는 이 소설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글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었고(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 차이는 뭐지? 작가는 '지독한' 관찰자 시점으로 1인칭과 3인칭의 경계를 허물어놓았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에 R이 쓰는 소설이, 화자가 쓴 소설과 맞물려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소설 안의 소설이 소설 밖의 소설과 연계되어 반복되는 윤회구조. 왜 이 지리한 소설이 '한국문학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알린 소설'이라 소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생각할만한 것도 많이 있다. 일상의 충실한 복제가 예술의 숭고함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지리멸렬한 서술과 반복되는 상황, 그리고 갑자기 돌출되는 극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예술이 예술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예술이 그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여 위대한 예술로 여겨지던 소설이, 일상의 시대와 언어를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탈권위적이 되었다고나 할까? 구소련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와 맞물린 이 소설의 등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덧붙임: 

1. R을 [알]이라 발음해야할지, [아르]라 발음해야할지 난감합니다. 예전에 전 직장에서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R의 발음은 [아르]가 맞다고 해서, 수학교과서의 'r은'이 'r는'으로 모두 바뀌는 일이 있었지요. 문자로 표기할 때는 그나마 나은데, 이걸 녹음할 때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성우분께서 한사코 [알은]이라고 발음을 하셔서, 제발 [아르는]이라고 녹음해달라고 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민음사에서는 작가님의 의견을 존중해 R을 [알]이라고 표기한 것 같은데, 어떤 것이 맞는지 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117쪽 밑에서 9째 줄, "잔치가 끝나고 R와 R의 어머니와 아버지' 부분은 오타네요. ^.^;

2. 그러고보니 '경마장'에 대한 언급을 하나도 못했군요. 무책임하게 얘기하자면, R이 언급하는 '경마장'은 어떤 '이상향'이나 '도피처'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마장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떠올랐다는 그의 고백에서 어쩌면, 『경마장 가는 길』이란 소설을 쓰는 행위는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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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마장 가는 길』영화라는 형식을 무력화시킨 장선우식 농담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3-25 14:08 
       장선우 감독의 세 번째 영화(선우 완 감독과 공동 연출한 <서울 황제>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 <경마장 가는길>은 전적으로 원작자인 하일지 작가에 기대어 있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의 각색과 시나리오를 하일지 작가에게 맡겼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 소설과 거의 똑같다. 심지어 그 지난한 문어체의 대사까지 거의 그대로 진행한다. 장선우 감독은 이 소설을 옆에서 읽어주듯이 정말 그대로 영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