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예요. 개인 차원에서는 단기간 특정 효과를 볼지 몰라요. 하지만 지속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죠." 그는 광범위한 사회에서 거대한 침략 세력이 우리의 주의력을 크게 바꿔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환경의 변화만이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절제가 주요 해결책이라 말하는 것은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중력과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 각자가 자기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환경 변화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마술은 사실 집중력의 한계에 관한 겁니다

마술사의 일은(본질적으로는) 우리 주의의 초점을 조종하는 것이다. 사실 그 동전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쏠렸을 때 마술사가 동전을 옮겼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마술을 배우는 일은 곧 다른 사람의 주의를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마술에 얼마나 잘 넘어가느냐가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더 미묘한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약점과 한계, 맹점, 또는 우리가 갇힌 편견 같은 것들이요.

현실에서 우리는 잘 속는 고깃덩어리이며, 마술사가 파악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속아 넘어간다.

"마술사가 어떻게 마술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강점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마술사는 그저 우리의 약점만 알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내가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정말로 자기 약점을 잘 안다면 마술은 불가능할 겁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게 바로 권력이에요.

트리스탄은 엔지니어들이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를 더 많이 제안하고(더 많은 진동과 더 많은 알림, 더 많은 술수) 그에 대해 축하받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았을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디자인 때문이다. 우리의 산만함은 그들의 연료다.

그는 "인간은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할 때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라고 말했다.

"기술의 목적이 뭘까? 우리는 왜 기술을 만들까? 우리가 기술을 만드는 이유는 기술이 우리 안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끌어내 확장하기 때문이야. 그게 붓의 목적이야. 첼로도 그렇고, 언어도 그래. 이 기술들은 전부 우리 안의 어떤 면을 넓혀줘. 기술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냐. 우리를 더욱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거지."

보였다. "이 시간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인생 전체가 휙 하고 사라져요. 이 시간을 기후위기 해결에 썼을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하거나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썼을 수도 있어요. 그게 뭐든 더 좋은 삶을 사는 데 쓸 수 있었죠. 이건 그냥…"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내 어린 대자인 애덤과 그의 10대 친구들이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소셜미디어 사용이 늘면서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잃고 화와 적대감을 더 많이 표출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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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틸리는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지능을 타고나 열여섯에 옥스퍼드에서 첫 학위를 따고 박사학위를 두 개 취득했으나, 바로 그 지능 탓에 ‘세상’을 모르고 자라 상대방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슨 말이든 의심하지 않는 어리숙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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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컴브리아에서 겨울에 느끼는 혹독한 아름다움을 좋아했지만 이제 섑에서 산 지도 1년이 넘고 보니 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계절이라고 말할 자격이 생긴 듯했다. 어디에나 보이는 양 떼를 빼면 겨울에는 이 고원에서 생명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눈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나 혹독하고 색깔 없는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봄은 부활처럼 보였다. 날은 길어졌고, 잠자던 식물들이 따뜻해지는 땅을 뚫고 녹색 싹을 내밀었으며 히스들이 꽃을 피웠다. 지의류와 이끼로 가득한 이색적인 정원이 살아났다. 맹렬하고 얼음 같던 바람이 따스해지고 향기로운 산들바람으로 바뀌었다. 새들은 둥지를 틀었고 동물들은 번식했으며 공기 중에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다시금 감돌았다. 한 해 중 컴브리아 시골 생활의 아름다움과 느린 속도를 음미하게 되는 시기였다.

포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했으나,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할 때와 마찬가지였고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아들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겠다고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 자기 이름으로 구글에 검색해봤어, 스테프?"
플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아니라고 했다.
아니긴, 해봤잖아. 다들 그래. 포가 생각했다.

포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추호도 개의치 않는’ 유형이었는데도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쥐뿔도 모르는 사안에 대해 확고한 의견이 있는 게 부정적인 일로 간주되던, 좋았던 옛날이 떠올랐다.

포퓰리즘과 거짓 뉴스가 인구의 절반을 머리 빈 인터넷 트롤로 만들어버린 듯했다.

날씨는 전날과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밝아 보였다. 기분이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 재미있었다.

"우리 일은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택하는 거야." 그가 말했다.

포는 물러나는 게 옳은 선택일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입을 다무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한 책장에는 젠체하는 책들이 선별되어 있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고대 영어판 《베어울프》. 이 책들 중 어느 것 하나 책등에 주름이 잡혀 있지 않았고, 포는 그것들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책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연습한 듯 들리는 그 말에 포는 샤플스가 뭔가를 빠뜨리고 말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포는 증인들이 자주 그런다는 사실을 알았다. 증인들은 자기를 가장 좋게 비치게 하려고 했고, 공작처럼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샤플스라면 더욱 그럴 것이었다.

그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때로는 누군가가 나서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되도록 불쾌한 일을 맡아야 했다.

같은 남자와는 주먹을 주고받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는 보복을 하면 불균형하게, 인생이 바뀔 정도의 대가가 되돌아갈 거라는 점을 이해시켜야 했다.

1230년에서 2009년까지 칼라일 주교의 공식 거주지는 댈스턴 마을 인근의 로즈 캐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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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을 잘 못 견디는 그녀는 문제와 마주치면 불안해졌다.

그게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때 사람들은 그녀가 세 번은 확인했으리라 기대할 터였다. 그녀는 프로그램을 한 번 더 돌렸다.

경위는 정말 중요할 때만 전화하라고 했다. 하지만…… 뭐가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사람이 플린 경위인 마당에 그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너무 헷갈렸다.

그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걸어서 호텔에 갈 작정이었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좋은 책이나 읽자는 생각이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플린에게서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다운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그는 상급수사관이 첫 사건 현장을 수사 초기에 묘사한 내용부터 살펴보았다.
그것은 첫인상이 담겨 있었기에 가장 유용한 정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나중에 추가한 보고는 계산하고 판단해서 덧붙인 것이었다.

포는 생각했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고…….

포는 여성생식기 절개에 대해 조금 알았다. 그것은 여자아이 생식기에서 일부분을 제거해 아이가 성적 쾌락을 경험할 수 없게 하는 혐오스러운 관습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충실하고 순결한 상태를 지킬 수 있다고들 했다. 실제로 그 일의 피해자들은 평생 고통과 건강 문제로 고생해야 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여전히 상처를 가시로 봉합했다.

핸슨은 자기 결점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승급되지 않은 것도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자기를 적대시하는 거대한 음모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가 페이턴 윌리엄스 사건 때 탤벗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범죄분석섹션이 요즘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는지는 몰라도, 포가 보기에 그곳은 부재중 이메일만큼이나 매력이 없었다.

포는 차장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사실에 신경 쓰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쉬웠다. 누군가 자기 목이 달아날까 신경 쓰지 않으면, 권력자들도 자기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금세 깨닫게 마련이었다.

상급수사관이 논리적이고 철저하게 수사를 이끌도록 안내하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다들 범죄를 똑같은 방식으로 수사하게 된다는 것인데, 포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이 책으로 ‘비범한’ 살인범을 잡기는 무리였다.

포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틸리는 무례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잡담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뭔가 물어볼 때는 답을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살인 사건의 99퍼센트는 철저하고 체계적인 수사로 해결되었다.

관리의 기술이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게 관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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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독서는 자신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다.

독서는 지난 400년간 가장 깊이 있는 인류 사상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이 경험은 현재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독서는 우리에게 특정 방식의 읽기를 훈련시키는데, 바로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선형적 방식의 읽기다.

읽기는 더 이상 다른 세상으로의 즐거운 침잠이 아니라, 붐비는 슈퍼마켓을 마구 뛰어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잡아채서 빠져나가는 행위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면(화면을 읽는 방식이 독서에 영향을 미치면) 우리는 독서 자체의 즐거움을 잃게 되고, 독서는 매력을 잃는다.

아네의 말을 들으며 독서의 붕괴가 어떤 면에서는 집중력 감퇴의 증상이자 원인임을 깨달았다.

몸무게가 늘면 운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깊은 형태의 집중이 이토록 크고 빠르게 위축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졌다. 가장 깊은 층위의 사고가 점점 더 적은 사람에게만 가능해져서 마침내 오페라나 배구처럼 극소수의 취미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하면,(퀴즈쇼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든 드라마 <더 와이어The Wire>든) 특정 프로그램의 메시지를 흡수하기 이전에 이미 세상을 텔레비전과 비슷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신기술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새로운 규칙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매클루언은 정보가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방식이 정보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세상은 빠르고, 중요한 것은 표면과 겉모습이며, 세상만사는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세상은 복잡하며,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 가능하다. 세상은 천천히 사고하고 파악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처음에는 인기를 얻지 못한다. 나는 살면서 트위터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활동했을 때(팔로어와 리트윗의 측면에서)가 인간으로서 가장 쓸모없을 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관심이 필요했고, 지나치게 단순했으며, 독설을 잘 퍼부었다. 물론 트위터에서 이따금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보를 흡수하는 지배적 방식이 되면 사고의 질이 급속히 낮아질 것이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함께하는 것, 폭소와 따뜻한 포옹, 기쁨, 슬픔, 춤을 주고받는 것이다.

삶은 복잡하다.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깊이 숙고할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야 하며, 속도 또한 늦춰야 한다. 둘째, 다른 걱정을 제쳐두고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한 문장 한 문장, 한 쪽 한 쪽을 따라가는 경험은 가치 있는 일이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은 깊이 사고해볼 만하다.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처럼 복잡한 내면의 삶이 있다.

내가 책이라는 매체에 담긴 메시지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메시지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메시지가 인간 본성의 가장 훌륭한 면(깊이 집중하는 순간이 많은 삶이 좋은 삶이라는 사실)을 북돋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는 내게 자양분이 된다. 한편 나는 소셜미디어라는 매체에 담긴 메시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메시지들은 주로 내 본성의 추하고 얄팍한 면을 강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소셜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면(심지어 그들의 규칙에 따라 ‘좋아요’와 팔로우 수를 늘리며 잘해내고 있을 때조차) 지치고 불행해진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을 때의 내 모습을 좋아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은 싫어한다.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경험에 푹 빠져든다. 사회적 상황을 그려보고, 깊고 복잡하게 타인과 그들의 경험을 상상한다. 키스 오틀리 교수는 그러므로 소설을 많이 읽으면 책 밖에서도 실제로 타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소설은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우리가 가진 가장 풍성하고 귀중한 형태의 집중)을 키워주는 일종의 공감 체육관일지 모른다.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냈다. 막대한 영향이었다. 이것은 그저 교육을 잘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비소설 독서는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이먼드는 우리 각자가 오늘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작은 일부만을 경험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경험은 소설을 내려놓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중에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삶을 더욱 잘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정보를 읽으면 아마 더 박식해지겠지만, 이처럼 공감 능력이 길러지지는 않는다.

공감은 사람이 가진 가장 복잡한 형태의 주목이자 가장 소중한 주의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다수가 곧 공감 능력의 발전이었다. 다른 인종 집단도 자신들처럼 감정과 능력, 꿈이 있다는, 적어도 일부 백인의 깨달음. 그동안 자신들이 여성에게 행사한 권력이 불합리하고 심각한 고통을 낳는다는 일부 남성의 깨달음.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다는 많은 이성애자의 깨달음. 공감은 발전을 가능케 하고, 인간적인 공감의 폭을 넓힐 때마다 우리는 우주를 조금씩 더 열어젖히게 된다.

동화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더 좋지만, 길이가 짧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토막 난 파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는 무언가에 오랜 시간 집중할 때만큼 공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의식이 그 기술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파국적 종말로 향하고 있는 물과 진흙으로 된 행성에 살고 있잖아요. 이 문제들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어요." 그가 말했다. "이게 제가 공감 능력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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