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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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예 사단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전쟁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두 달 반 정도 뒤에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했다. (중략) 나는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게 된 사람이었다.-13쪽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걱정은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14쪽

어쩌면 나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은 당신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중략)
이유가 무엇이든, 어떤 이유들이 겹친 것이든.(중략)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으로, 가장 착한 여자애들하고만 외출하고 토론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학교 야구팀에서 만능 내야수로 활약하면서 우리 동네와 학교가 정한 사춘기의 규범 내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문들에 화가 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친밀했던 아버지가 가게 안에서, 바로 자기 옆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이다.-15~16쪽

부모의 눈 밑에서 품행이 단정한 젊은이로 성숙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느냐는 말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분 좋게 해주었다.(중략)
"칼로 네 손만 자르지 마라. 그럼 다 잘되게 돼 있어." -16쪽

나는 그 일이 싫었다.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기쁜 마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17쪽

그것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일, 게다가 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9쪽

실제로 아버지는 미쳤다. 소중한 외아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삶의 위험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걱정 때문에 미쳐버렸다. 어린 소년이 성장하고, 키가 크고, 부모보다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 그때는 아이를 거두어둘 수 없으며 아이를 세상에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바람에 겁게 질려 미쳐버렸다.(중략)
나는 아버지의 무지와 비합리성과 직면했을 때 좌절감에 사로잡혀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20쪽

저는 밑바닥 생활에는 관심이 없어요. 엄마, 나는 중요한 일들에 관심이 있다고요.-22쪽

이제는 나를 당구장에서 찾아서가 아니라 거기서 찾지 못해 화를 내고 있었다.(중략)
도서관에서는 사기 당구를 친다는 이유로 큐를 맞아 머리통이 깨지지도 않고, 오늘 저녁 여섯시부터 내가 한 대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한 장을 읽는 과제를 한다는 이유로 칼에 찔리지도 않기 때문이다.(중략)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23쪽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에디가 집에서 세 시간이나 떨어진 스크랜턴의 당구장에 있게 된 걸까? 그것도 내 차를 가지고!(중략)
"세상은 자네 아들을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입맛을 다시고 있단 말이야."
-25쪽

"아주 작은 일. 아주 사소한 일이 정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요. 아버지가 그걸 증명하시네요!"-26쪽

나는 대학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꼈다.-27쪽

나는 어른, 교양 있고, 성숙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되려고 노력했다.(중략)
아버지는 내가 젊은 성인의 가장 작은 특권을 시험적으로 사용해본 것을 벌하려고 나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도 나의 공부에 전념하는 태도, 대학생으로서 누리는 독특한 가족 내 지위는 더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29쪽

이것이 위험하지는 않다 해도 좀 이상한 갈망이라고 여겼지만, 열여덟 살인 나에게는 완벽하게 말이 되는 것이었다.-30쪽

마치 전에는 운이 좋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종에 속한 존재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31쪽

"이봐, 유대인(Jew)! 여기!"하고 부르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그냥 "이봐, 너(you)! 여기!"였다고 믿기로 하고, 계속 열심히 내 할 일을 했다.-39쪽

나머지 우리에게는 아무리 쫓으려 해도 달아나지 않고 머리 위에서 윙윙대는 파리나 모기처럼 굴욕이 따라다녔다.-48쪽

한평생에 걸쳐 있는 자잘한 것들을 계속 주물럭거리려고? 인생의 매 순간을 그 자디잔 구성 요소까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중략)
사람마다 다른 사람의 내세와는 다른, 지울 수 없는 지문 같은 내세를 갖게 되는 것일까?(중략)
살아 있는 동안에만 삶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 삶에 붙어 있게 된다. 사실 죽음이 끝없는 무가 아니라 영원히 자기 자신에 관해 숙고하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한들 죽음이 덜 무서웠을까?-64~65쪽

여기서 망각되는 것은 기억이 아니다. 시간이다.(중략)
내가 어기에 있는지, 내가 뭐 하는 존재인지, 내가 이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지속되는 것 같다.-65쪽

어떤 신이 심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늘 행동을 집요하게 심판하기 때문이다.-66쪽

그런 깊은 수수께끼에 다른 설명은 있을 수가 없었다.-68쪽

내가 걸레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한테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 너한테 그걸 주고 싶었어. 내가 너한테 그걸 주고 싶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가?-76쪽

그것들하고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 무능력 때문에. 심지어 자살도 제대로 못해 그런 식으로도 내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니. 자책이 내 중간 이름이나 다름없어.(중략)
너는 방금 어른이 된게 아니야. 아마 어렸을 때부터 평생 어른이었을 거야.(중략)
너는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모파르나스의 다락방에서 살고 있어야 해. 우리 둘 다 그래야 해. 안녕. 아름답디 아름다운 남자여!-80~81쪽

나는 엘윈이 올리비아를 씨발년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내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83쪽

이제야 막 깨닫게 되는 것들.-85쪽

그런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사랑하게 되었다.-86쪽

어느 쪽이든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 계기가 흉터라는 것이었다.-87쪽

'내가 보기에 진정으로 심오하게 인간적인 사람이라면 영원한 벌은 믿지 않을 것 같다.' (중략)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113쪽

또 버트런드 러셀 같은 부도덕한 자가 내뱉은 합리주의적 신성모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면에, 그 쉽게 속아 넘어가는 면에 감탄할 필요는 없지만 말일세.-115쪽

그게 자네가 자네의 모든 곤경에 대처하는 방법이니까.-119쪽

어디를 가든 늘 너를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거야.-122쪽

하지만 그 아가씨가 자란 환경에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그런 건 절대 알 수가 없어.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실은 절대 알 수가 없어. 애가 빗나가면 먼저 그 가족을 봐야해.-182쪽

너한테는 양심도 있고 동정심도 있고 착한 마음도 있지. 그러니 말해봐라, 이 아가씨 문제에서 너에게 요구도리 수도 있는 일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니? 다른 사람의 약한 곳은 강한 곳과 똑같이 너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를 주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들의 힘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불안정한 사람은 너한테 위험해. 마키, 덫이야."-184쪽

너는 그러지마.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인생이 요구하는 거야.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감정은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감정은 가장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184~185쪽

그래, 이러기만 했다면 또 저러기만 했다면, 모두 함께 모여 오랫동안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 그의 아버지만, 플러서만, 엘윈만, 코드웰만, 올리비아만! 코틀러만--그가 우월한 코틀러와 사귀지만 않았다면! 코틀러가 그와 사귀지만 않았다면! 코틀러가 지글러에게 돈을 주고 채플에 대신 들어가게 하지만 않았다면! 그가 직접 채플에 가기만 했다면! 만일 그가 채플에 마흔 번 나가 마흔 번 출석표를 제출만 했다면 그는 지금 살아서 변호사 일에서 막 은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237쪽

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알랑거리는 찬송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신성한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도, 그 눈을 감고 하는 기도--썩어빠진 원시적인 미신! 하늘에 계신 우리의 어리석음! 종교의 치욕, 그 모든 미성숙과 무지아 수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둘러싼 광적인 경건함! 코드웰이 그에게 그래야만 한다고 했을 때, 코드웰이 그를 다시 사무실로 불러 마티 지글러에게 돈을 주고 대신 채플에 가게 한 것에 대해 렌츠 학장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그런 뒤에 훈련의 방식이자 속죄의 방법으로 마흔 번이 아니라 총 여든 번 채플에 참석해야만, 다시 말해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수요일마다 채플에 가야만 퇴학을 안 시키겠다고 했을 때, 마커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메스너답게, 다름 아닌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답게,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두번째로 이렇게 내뱉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좆까, 씨발."-238쪽

그래, 멋지고 오래되고 도전적인 미국의 "좆까, 씨발". 그것으로 정육점집 아들은 끝이었다. 그는 스무 살 생일을 석 달 남기고 죽었다. 마커스 메스너(1932~1952)는 그의 대학 동기 가운데 불운하게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 조인으로 끝이 났다. 채플을-238쪽

견디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면마커스는 그로부터 열한 달 뒤 와인스버그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랬다면 그의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동안 그에게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려 했던 것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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