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품절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더 많이 있는 법이란다.-12~13쪽

로자 아줌마의 잿빛 마리카락도 떨어져내리는 석회덩이처럼 자꾸 빠지고 있었다. 뿌리가 약해서 머리통에 제대로 붙어 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대머리가 될까봐 몹시 걱정했다. 이렇다 하게 내세울 거라곤 쥐뿔도 없는 여자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21쪽

그때 내 나이 벌써 아홉 살쯤이었는데, 그 나이면 행복하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색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이다.-28쪽

나는 수시로 표정이 변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가 하면 매번 말을 바꾸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55쪽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63쪽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69쪽

나는 로자 아줌마가 평소에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 일들을 꿈꾼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또 그 나이에 그녀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76쪽

사는 동안 겪는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게 마련이니까.-78쪽

내 친구 르마우트 역시 창녀의 자식이었는데, 그애는 늘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는 비밀이 많은 게 어울린다고 말하곤 했다.-81쪽

카츠선생님은 심리적인 것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했다.-83쪽

사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희망을 걸게 마련이다.(중략) 나는 교회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는데, 그건 진정한 신앙생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86쪽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91쪽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93, 95쪽

너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된다.-97쪽

자기 혼자 불행해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100쪽

사실 나는 이상한 일이란 것을 별로 밎지 않는다. 일들이란 게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112쪽

생일 축하니 뭐니 하는 것도 모두 꾸며낸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115쪽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이다.-116쪽

요사이에야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오래 상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122~123쪽

나는 딸기와 피스타치오 열매를 얹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는 곧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역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세상에서 최고다.-137, 140쪽

인생이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아직 아름다운 인생을 찾지 못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142쪽

미소라도 지어야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147쪽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148쪽

모모야, 항상 명심해라. 엉덩이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 중 가장 신성한 것이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야.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하면 안돼. 내가 죽더라도, 그리고 네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엉덩이뿐이라고 해도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아라.-150~151쪽

하밀 할아버지는 로자 아줌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올라와보고 싶어했지만, 여든다섯 노인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칠층까지 오는 것은 무리였다. 두 사람은 하밀 할아버지가 양탄자를 팔고 로자 아줌마가 몸을 팔던 시절부터 삼십 년을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 엘리베이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시를 적어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어했지만 이제 눈이 어두워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하밀 할아버지가 읊어주는 걸 내가 듣고 암기해서 전하는 수 밖에 없었다.


노인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152, 154쪽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닮지 않았고 아무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158쪽

그럴 때면 화장이 엉망이 된 얼굴로 기진맥지니한 채 돌아와서는 수면제를 먹고 곯아떨어졌다. 그걸 보면, 뭐든 익숙해지면 힘들지 않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인 모양이다.-160쪽

나이가 들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마지못해 찾아오는 자식들말고는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줄어들게 마련이다. (중략) 그녀는 여자로서 선물을 받을 수 있던 시절에 받은 부채를 손에 든 채 안락의자에 앉아서 넋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중략) 그의 눈은 왜 무얼 하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뭐 그런 표정을 담고 있었다.(164)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164)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 노인들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내가 흥분할 일도 아니다.(164~165)-162~165쪽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롤라 아줌마만큼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세네갈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일을 조물주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건 불공평한 일일뿐더러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녀에게는 입양할 권리조차도 없었다.여장 남자들은 너무 특이한 존재들이라서 그런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롤라 아줌마는 가끔씩 그 점에 대해 매우 섭섭해했다.-167쪽

회교도인들은 사람이 아주 늙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면 그 사람에게 존경을 보낸다.-175쪽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는 유태인도 더는 유태인이 아니며, 그때부터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잘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틀림없이 더 구역질나는 무엇일테니까.-196쪽

왈룸바씨는 말을 아주 잘했고 항상 추창처럼 말했다. 그의 얼굴은 흉터투성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존경받게 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아직도 벨빌에 살고 있으니 조만간 보러 가야겠다.-198쪽

나는 조라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203쪽

이런 경우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려고 이곳 칠층까지 걸어 올라오지는 않을 테니까.-205쪽

아버지인 척하면서 요구사항까지 들고 나오는 그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215쪽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상다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사람이 덮어써야 하는 건 언제나 있는 흔한 일이니까.-228,229쪽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232쪽

나딘은 부엌으로 가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내 빌어먹을 생-이건 내가 그냥 되는 대로 지껄여보는 소리다.--에서 먹어본 것 중 최고로 맛있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때문에 기분이 좀 나아져서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240쪽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242쪽

나는 점점 더 흥분해서 열심히 말했다. 잠시라도 말을 멈추면 그들이 더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중략)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245) 선택 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246)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몇백만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246)-245~246쪽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5쪽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화장품을 잊었다는 것을 때달았다. 그녀는 그렇게도 여자가 되고 싶어했는데. 지겹지만 세번째로 다시 칠층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로자 아줌마에게는 정말이지 필요한 것도 많았다.-297쪽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중략) 사랑해야 한다.-307쪽

계속해서 내게 여러 아이디어와 주제들을 가져다주는 샘물을 왜 말려버리려는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내가 자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해서 환상속에 사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자르라는 인물이 구체화됨으로써 나의 신화적 존재는 끝장이 났다. 당연한 귀결로, 몽상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327쪽

모모는 말한다.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라고.-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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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17: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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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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