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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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흙을 한 줌 쥐자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거세게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그 감정은 적대감이 아니라 적대감 때문에 빠져나올 수단을 찾지 못했던 다른 감정이었다.-21쪽

그 안에는 칫솔, 잠옷, 목욕가운, 슬리퍼가 있었고, 그가 읽으려고 가져온 책도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어떤 책들이었는지 기억이 났다.-25쪽

"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인 문제는 내가 알 바 아니니까요. 하지만 부인이 면회왔을 때 지켜봤어요. 그 여자는 기본적으로 없느니만 못한 사람이더군요. 따라서 나로서는 내 환자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52쪽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뭍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58쪽

어머니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곤란햇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이고 아버지였다. 그들은 다른 욕망에 물든 일이 거의 없었다. 이제 그들의 몸이 차지하던 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평생에 걸쳐 유지되었던 그들의 실체가 사라져버린것이다.-61쪽

어쨌든 자기 마누라가 그걸 끼고 있으면 그 남편은 단순한 배관공이 아닌 거지. 다이아몬드를 손에 낀 마누라를 둔 남자가 되는 거야. 그의 마누라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소유한 거지.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63쪽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일 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72쪽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그것은 진실이었고 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 오래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83쪽

그래서인지 매주 동지적인 명랑한 분위기에서 만났음에도, 대화는 어김없이 병과 건강 문제로 흘러갔다.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의 개인 이력이란 의학적 이력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의학적 정보 교환이 다른 모든 일을 밀쳐냈다.-84쪽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통증이 사람을 정말 외롭게 만드네요." 그러면서 다시 허물어지며 그녀는 두 손을 얼굴에 묻고 흐느꼈다. "정말 창피해요."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런 건 전혀 창피한 게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몰라요. 의존, 무력감, 고립, 두려움....그게 다 아주 무섭고 창피해요. 통증이 있으면 자신을 겁내게 돼요. 그 완전한 이질감이 정말 끔찍해요."-96쪽

갑자기 그는 무(無)에 빠져버렸다. 무라는 상태만큼이나 '무'라는 말소리에 빠져 길을 잃고 표류했다. 그러면서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험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역효과를 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도!-108쪽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그래?-127쪽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레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130~131쪽

혹시 노년의가장 좋은 순간이란 것이 바로 그것 아닐까---어린 시절의 가장 좋았던 순간들을 갈망하는 것? 그때 그의 몸은 관(管) 모양의 싹과 같았다.-131~132쪽

작업실 한쪽 벽에는 큰 판형의 미술책들이 꽉 들어찬 책꽃이들이 있었다. 그는 평생 그 책들을 모으고 공부를 했지만, 이제는 독서용 의자에 앉아 어떤 책을 펼쳐도 왠지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망상---그는 이제 그걸 망상이라고 생각했다---은 이제 그를 지배할 힘을 잃었다. 따라서 그 책들은 자신이 비웃음을 살 만한 가망 없는 아마추어라는 느낌, 자신이 퇴직 후 모든 생활을 바쳐온 일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을 굳혀줄 뿐이었다.-133`134쪽

그는 서로 베풀기도 하고 받을 수도 있는 친밀한 동반자에 굶주려 있었다.-141쪽

노년은 전투예요. 이런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149쪽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괴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167쪽

당시에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녀의 나날을 잘디잔 행복감으로 넘치게 해주려고 특별히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평범한 순간들이 마음을 가득 채웠을까? (중략)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170쪽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지금 살아 있기를 바라는 갈망,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갈망도 감당할 수가 없았다.-177쪽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쪽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지닌 그 소년의 활력은 어떤 것으로도 꺼버릴 수 없었다. 아, 그 거침없음이여, 짠물과 살을 태우는 태양의 냄새여! 모든 곳을 뚫고 들어가던 한낮의 빛이여. 그는 생각했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진 보석상 루페로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 전체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고향을,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를!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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