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물론 그만하면 견딜 만해 보이는 게 마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어쩌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여기 이 방에 갇혀 살면서 남은 청춘을 다 바쳐 남의 고통을 지켜보고 때로는 신경질도 받아주어야 하다니!

불운을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는 원래 상황을이상화하기엔 너무 무미건조한 성격이라 불운을 과장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태도와 나라는 존재와 내 손길이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위안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분노에서는 늘 이성이 느껴졌다. 그녀는 사나울 때조차도 논리적이었다.

그녀를 시중드는 일이 내 의무였고, 그녀의 아픔이 내 고통이었고, 그녀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내 희망이었다. 그녀의 분노가 내게는 벌이었고, 그녀의 관심이 상이었다.

단단한 진주라도 되는 양 소중히 간직했던 인간에 대한 작은 애정은 녹아내리는 싸락눈처럼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쉽게 만족하고 있던 양심으로부터 내 작은 의무를 빼앗겨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구는,"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시기에 갈가리 찢기고 엉망진창이 되나봐. 우리 중 연약한 사람들이 끓어오르는 화산에서 분출되는 지구의 병든 숨결에 시들어버려 병에 걸리는 거고."

"오늘밤에는 추억에 잠기고 싶구나." 그녀가 말했다. "추억은 내게 가장 좋은 친구야. 지금도 막 추억이 깊은 기쁨을 주고 있어. 내 가슴속에 따뜻하고 아름답던 날들이 되살아나고 있구나. 공허한 생각이 아니라 한때는 현실이던 과거 말이다. 이미 썩어 문드러져서 무덤의 흙과 섞였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이제 막 젊은 시절과 그때의 생각과 희망이 되살아나는구나. 내 일생을 바친 사랑, 유일한 사랑, 내 생애의 거의 유일한 애정이.

그를 잃고 내가 겪은 고통만 한 아픔을 겪은 여자도 없겠지만 그를 사랑하며 느꼈던 황홀감만 한 기쁨을 누린 여자도 없을 거라는 걸.

이처럼 단 한 사람만을 오랫동안 깊이 사랑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된다면 나는 구원받기 힘들겠지. 루시, 너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니? 나의 목사가 되어 말해보렴."

신은 자비롭지만 우리가 늘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된단다. 우리의 운명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행복하게 해주도록 애써야 해.

마치몬트 여사가 내게 유산을 남기려고 했다가 그럴 시간도 없이 그 전날 밤 죽었지만 그녀의 육촌뻘 되는 상속자가 내 임금을 제대로 지급했기 때문이다.

고독과 가난과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스물셋도 안된 젊은이 특유의 활기와 기운이 넘쳤고, 가볍지만 힘차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든 별로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렇게 하면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거창한 계획은 몸과 마음을 열에 들뜨게 하는 법이다.

뭘 좀 먹고 난롯가에서 몸을 데운 후 내 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을 때까지는 잘 버텼다. 그러나 침대 옆에 앉아 베개에 엎드리자 끔찍한 압박감이 엄습했다. 내 처지가 유령처럼 날 덮쳐왔다. 나는 아무 데도 어울리지 않고 쓸쓸하고 희망이 없는 처지였다. 이 거대한 런던에서, 여기서 혼자 무얼 하고 있는가? 내일은 뭘 해야 하는가? 내 인생에 무슨 전망이 있는가? 이 세상에 친구라고 누가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쎄인트 폴 성당 바로 아래 있구나."

곧 고전적인 분위기의 패터노스터 거리에 이르렀다. 존스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책방에 들어가 작은 책을 한권 샀다. 내게는 무리한 사치였지만 언젠가 이 책을 배럿 부인에게 주든지 보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상 뒤에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장사꾼 존스 씨가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쎄인트 폴 성당 앞에 이르자 나는 안으로 들어가 돔까지 올라갔다. 런던의 강과, 다리와 교회 들이 보였다. 고풍스러운 웨스트민스터 사원2과 초록빛 템플 가든3 위에 태양이 빛났고, 그 위로 이른 봄의 아름답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특히 여동생 "샬럿"에 대한 언급이 많았는데, 그 여동생은 경솔하게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려는 것 같았다.

더 늙고 못생기고 기름기가 흐르며 어깨가 딱 벌어진 사람이 그 아름다운 아가씨의 남편, 즉 그녀가 앳된 것으로 미루어 아마 새신랑인 듯했다. 이 사실에 나는 몹시 놀랐고, 그런 결혼에 비참해하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울 정도로 까부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더 놀랐다. ‘그녀의 웃음은,’ 나는 생각했다. ‘미칠 듯한 절망에서 나온 게 분명해.’

이런 어린 여자 혼자서 여행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곳은 영국뿐이라고 외국인들은 말한다. 그들은 영국인 부모나 후견인의 과감한 신뢰에 대해 무척 놀란다. "어린 아가씨들"에 대해, 혹자는 이런 용기를 남성적이라거나 "부적절하다"고 하고, 혹자는 적절한 "감독"을 태만히 하는 교육제도와 종교제도의 무기력한 희생자로 여긴다.

돌벽이 있다고 감옥이 되는 건 아니고
철창이 있다고 새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네.

몸이 건강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 특히 자유의 날개를 빌릴 수 있고 희망의 별빛의 인도를 받는 한, 위험과 외로움과 불안한 미래는 우리를 짓누르는 악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이 구부려놓은 활, 희망의 무지개18가 황홀한 빛을 발하며 부드럽고 장엄하게 북쪽에서 남쪽까지 걸려 있었다.

팬쇼 양처럼 경박하고 조심성 없는 성격에다 예쁘고 연약한 몸매를 지닌 여자들에겐 인내심이 전혀 없다는 걸 그후에도 나는 여러차례 확인했다. 그런 사람들은 맹탕인 맥주가 천둥을 맞으면 시큼한 맛이 드는 것처럼 힘든 일이 생기면 심술을 부리는 것 같다.1

나는 잃을 것은 없고 딸지도 모르는 내기를 하는 셈이었다.

친구 하나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그 얼굴, 젊은 여자에게뿐 아니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사도를 베푸는 성품이 배어나던 그 목소리를 회상하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위안이 되었다. 그는 진정한 영국 신사였다.

"사촌 오라버니," 베끄 부인이 말했다. "의견을 말해줘요. 관상을 볼 줄 알잖아요. 저분 관상을 좀 봐주세요."

"저 여자를 고용해. 좋은 성품이 지배적일 때는 행동으로 보답할 거고, 만일 나쁜…… 아냐, 됐어! 사촌 누이야, 언제나 채용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거다.10" 그러고는 "잘 있거라"11 하고 인사한 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내 운명의 결재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베끄 부인은 그날밤 바로 날 채용했고, 신의 가호 덕택에 나는 그 외롭고 황량하고 적대적인 거리로 나서는 일은 면했다.

벌써 자존심이 발동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부엌에 남게 되리라고 어느정도 예상했다가 그러지 않고 ‘까비네’로 불리는 작은 내실로 안내되자 안심이 되었다.

그날밤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이끌려와 뜻밖에 잠자리를 찾은 것이다. 철새와도 같은 무방비 상태에 얽히고설킨 구름 같은 모호한 희망을 품고 런던을 떠난 지 겨우 마흔여덟시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독자들이여, 열쇠들은 옆방 화장대에서 밀랍에 본이 뜨인 후에야 돌아왔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는 숱이 너무 많아 나는 어떻게 손질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흔살이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흰머리 하나 없었다.

"감독"과 "감시",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못 미덥다고 여학생들을 구속하고 무지몽매한 상태로 둔다거나, 꼼짝달싹 못하도록 감시하는 게 정직하고 겸손한 여성으로 키우는 최선책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아는 것 같았다.

나에게 종종 위엄 있고 우아하게 이야기한 후에 그녀는 ‘침묵의 신발’7을 신고 나가 온 집 안을 유령처럼 미끄러져 다니면서 열쇠구멍마다 들여다보고 문마다 뒤에서 엿들으며 모든 곳을 감시, 감독했다.

베끄 부인은 아주 대단하고 아주 유능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힘을 펼치기에 그 학교는 너무 좁은 영역이었다. 국가를 통치하거나 격동기 국회의 국회의장이 되었어야 했다. 누구도 그녀의 기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고, 누구도 그녀를 신경질나게 하거나 짜증나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누구도 그녀보다 더 기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서 수상과 검찰총장을 겸임할 수도 있었을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단호하고 신의 없는데다, 은밀하고 교활하며 냉담하고, 조심스럽고 속내를 알 수 없고, 날카롭고 비정하며 그와 더불어 완벽하게 품위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녀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계속 날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가늠하는 중이었다. 내가 목적에 알맞은지 평가하고, 그녀의 잣대로 내 가치가 대략 얼마나 될까 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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