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로 편지들이 오갔다. 직접 만난 것은세 번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소중한 사람 하나를얻었다고 생각했다. 학문과 시를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한 차례는그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화가인 사모님이 정성들여 가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집 안에 있는 사모님의 미술작품들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와 있는데마침 손님으로 온 어느 젊은 독일 학자가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말 전한 사람 면전에서 이리저리 전화를 해보았다. 사실이었다.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집 정원에서 새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다리속 혈관에서 혈전이 생겨 그것이 몸을 돌다가하필 폐혈관의 판막에 걸려 혈관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한 손을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 섰다 앉았다 하던 나는, 그의 시집에다 내가 시를 덧써 그에게부칠 때 복사를 떠놓은 것을 가지고 작은 수제본 시집을 만들었다. 맨 앞장에다 그분 이름을쓰고 ‘추모’라고 적었다. 다섯 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한 부는 마냥, 어디든 들고 다녔다. 조금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게쉥크템 가울, 지트 만 니히트 인스 마울 Geschenktem Gaul siehtman nicht ins Maul."
각운이 잘 맞아서 울림이 좋은 이 독일 속담은 직역하면 "선물받은 말(馬)은 주둥이를 벌려보지 않는다"이다.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의 지혜가배인 속담이다. 선물에 담긴 성의를 감사히 받지 못하는, 모자라고 못난 욕심 많은 사람들에대한 따끔한 일침이기도 하다.

그 아침에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며 그날 내가받은 선물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동안 받은 너무도 많은 선물들이 눈앞을 오고 갔다. 마침 반가운 친구가 전화를 해서 그 반가움에 생각은더욱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전화한친구에게 "소식이 큰 선물이네" 하며 오늘이 내생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친구가 놀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쁨이 네게도 조금 반사되기를 바란다." 내가 무얼 나누어 그런 말을 듣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염치없이 큰 기쁨이었다. 정말로 많은 선물을 받은날이었다.

무슨 큰 일, 무슨 큰 선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겠는가. 진정한 관심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온말로 서로 좀 기운 나게 할 수는 있겠지. 그럼으로써 실은 내 자신이 가장 기쁠 테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큰 선물이겠구나.

말馬을 선물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물할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 주둥이를 들여다볼 기회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마음의 말은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자신에게 선사하는 지혜야말로 ‘말‘ 선물에 비할 바 없는 큰 기쁨이다.

쿤체 시인의 팔십 회생신을 기지난여름에는념해서, 근처의 오버른첼 성에서 콘서트를 하고, 참석자들은 작은 한옥도 두루 둘러보았다.
쿤체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들을 우리 국악 연주자들이 가서 독일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했다. 유럽 각지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주었다.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는지. 다들 기뻐하고 감탄하고, 파사우 시장은 커다란 꽃다발을내게 안겨주기도 했다. 도나우 강 위로는 큰 무지개가 떴었다.

시심을 가진 사람이, 또 그런 사람을 아끼는사람이, 사람 못할 짓 하며 살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기쁘고, 쏟았던노고는 잊힌다.

이 부부는 전 세계에서 나온 괴테의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의 거의 모든 판본을 망라해서 가지고 있다. 내로라하는 괴테전문가들도 《헤르만과 도로테아》에 관한한 자기들을 찾아온다고 부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그런 장서가가 된 이유는 아주 소박했다. 남편의 이름이 헤르만이고 아내의 이름은도로테아여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부부가 만나고 보니 이름이 몽룡과 춘향이어서세상에 있는 《춘향전》 판본 및 관련서를 다 모아버린 셈이다.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그들의 생애가 그 책들로 하여 얼마나 빛났을까.

괴테 하면, 아직 그 글을 깊이 읽어볼 기회가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너무 거대한것 같고, 너무 잘난 것 같고, 뭔가 많은 것을 누렸을 것 같아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예컨대 그런 힘 있는 구절 하나가 삶을 누리기만 한 사람의 손에서 그저 우연히 나올 수 있겠는가.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고마울 뿐이다.

무슨 전투를 벌이겠다는 생각이 누가 애초에있겠는가. 그저 삶의 감당이 그토록 어렵고, 외연이 넓어지면 감당할 것도 그만큼 더 많을 것일 뿐이리라. 그런 전투, 삶의 와중에는 이런 힘있는 필적을 읽는 기쁨의 순간, 아름다운 사치도 있다.

시심을 가진 사람이, 또 그런 사람을 아끼는사람이, 사람 못할 짓 하며 살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기쁘고, 쏟았던노고는 잊힌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빛나는 이들은 내가 알기때문에 그렇게 귀하고 빛난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다 그렇게 귀하고 빛날것이다.
젊은이들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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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9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영애 선생님 글 열심히 읽고 계시네요. ^^ 아유 전 이놈의 19세기 여성작가들 좀 벗어나면 다른 책 읽게 될거 같아요. ^^

라로 2022-11-20 15:32   좋아요 0 | URL
굉장히 특별한 분이신 것 같아요, 전영애 샘. 이런 분을 직접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분이랄까요? 겸허해지는 느낌도 들고,, 바람돌이님도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19세기 여성작가 책은 대학때 영문학 시간에 좀 읽었는데,,한국어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