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간 영혼은 얼마나 큰 힘을 지닌 것인지! 그녀는 생각했다. 거기 바위 아래 앉아 편지를 쓰던 여인이 그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분노와 짜증을 낡은 누더기처럼 날려 보내고, 이것과 저것을 그리고 또 이것을 한데 모아서 그 한심한 어리석음과 악의로부터(그녀와 찰스가 그처럼 티격태격 다투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심술궂은 일이었는지) 무엇인가를 ─ 가령 이 바닷가의 장면을, 우정과 호의의 순간을 ─ 그 모든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살아남을 무엇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려 할 때면, 그 장면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마치 예술 작품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쉬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노라니, 영혼의 하늘을 끊임없이 가로지르던 해묵은 질문, 광대하고 일반적인 질문, 이렇게 긴장을 풀고 있는 순간에 되살아나기에 딱 알맞은 질문이 그녀를 굽어보며 머물러 그늘을 드리웠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게 다였다 ─ 단순한 질문이지만, 해가 갈수록 죄어드는 것이었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도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문득 정지하는 것이었다. 인생이 여기 멈출지어다, 램지 부인은 말했다. 「램지 부인! 램지 부인!」 그녀는 거듭 불러 보았다. 그 모든 것이 부인 덕분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창문을 열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그냥 혼자서 계속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계속 바람이 불어오기를 고대하며 초조해서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고, 매칼리스터와 그의 아들이 어쩌다 그 말을 듣게라도 되면, 둘 다 몹시 불편해질 것이었다.

아이들은 속이 상해서, 아예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들도 억지로 끌려 나온 터였기 때문이다.

죽기까지 폭정에 저항하자는 맹약으로 단결하여 배의 양쪽 끝에 앉은 채 말없이 잔뜩 성이 나 있는 아이들에게는 이따금 한두 마디씩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남자들이 한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에서 근육과 두뇌로 바람과 파도에 맞서면서 땀 흘려 싸운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남자들이 그렇게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여자들은 집을 지키며, 저 밖 폭풍우 속에서 남자들이 물에 빠지는 동안, 집 안에서 잠든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캠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오솔길과 잔디밭이, 자신들이 그곳에서 살았던 삶으로 촘촘히 짜인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사라져 버렸나를 생각하고 있었다.그 모든 것이 쓸려 나가 과거가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이제 이것이 현실이었다. 배와, 여기저기 기운 돛과, 매칼리스터와, 그의 귀고리와, 파도 소리 ─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는 시간이 잎잎이 켜켜이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에 쌓아 둔 무수한 인상들을 헤집으며 찾기 시작했다.

너는 이런 압박을, 이렇게 마음이 엇갈리는 것을, 이런 유혹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주머니를 더듬어 찾고, 이제 곧 책을 꺼낼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만큼 매력적인 사람도 없었다. 그의 아름다운 손, 그의 발, 그의 목소리, 그가 하는 말들, 그의 성급함, 그의 성깔, 그의 괴팍스러움, 그의 열정,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 없이 우리는 죽으리라, 제각기 홀로, 하고 읊어 대는 것, 그의 초연함. (그는 책을 펼쳤다.)

그의 무신경한 맹목성과 독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망치고 쓰라린 폭풍우를 일으켰던가를, 그래서 아직까지도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분노로 떨며 그의 명령들을, 때로 무지막지한 명령들을 상기하는가를. 이래라저래라 하고 휘두르는 것을,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불면 날아갈 듯하면서도, 여러 필 말로 끌어도 끄떡없어야 했다.

「저게 배예요? 통이에요?」 램지 부인이 물었다. 그러다 안경을 찾아 주변을 더듬곤 했다. 그렇게 안경을 찾아 쓰고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릴리는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문 하나가 열려 그 안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램지 부인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인간관계라는 극도의 모호함 속에서 쉬는 것이 기쁜 모양이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그에게 구멍 난 양말이란 여성다움의 상실이요 더러움이며 무질서였고, 하인들이 나가 버리는 것이나 대낮에도 정돈되지 않은 침대 같은 것 ─ 그가 가장 혐오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보기 흉한 것을 보면 부르르 떨며 시야를 가리듯 손가락을 펼쳐 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 바로 그렇게 손을 들어 앞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지치고 여위었는데, 그녀는 화려하고 무심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하고 릴리는 녹색 물감을 붓으로 찍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른바 그들을 〈안다〉거나 그들에 대해 〈생각한다〉거나, 심지어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지!

그렇게 길가에 앉아 있는 그와 그에게 도구를 건네주는 그녀는 분명 좋은 친구로 보였다.

당신이 바라던 바와는 전혀 딴판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답니다. 저도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해요. 산다는 게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렇게 생각하자 부인의 전 존재가, 그녀의 아름다움마저도, 잠시 먼지투성이 퇴물이 되어 버리는 듯했다

식탁보를 들여다보다가 나무를 가운데로 옮겨야겠다, 아무와도 결혼할 필요가 없겠다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었다.

정말이지 그의 우정은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누린 기쁨 중 하나였다. 그녀는 윌리엄 뱅크스를 사랑했다.

그들의 관계는 그런 식이었다.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아름다움에는 나름대로 불이익이 따랐으니 ─ 너무 쉽게, 너무 완전하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깨울 때는 말하고 싶은 것이 확실히 있어야 하는 법이다.

원하는데 갖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몸 전체가 뻣뻣하게 굳어지고 텅 빈 것만 같았다. 원하는데 갖지 못한다는 것 ─ 그런데도 원하고 또 원한다는 것 ─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쥐어짜고, 또 쥐어짜는지! 오, 램지 부인! 그녀는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하여간 그는 그녀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다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이었다. 수염에는 노란 얼룩을 묻히고, 시와 수수께끼 들을 지닌 채 자신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세상을 평온하게 항해해 가는, 그래서 누운 곳에서 잔디밭으로 손을 내리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건져 올릴 것만 같은.

세상 이치를 아예 외워 둘 수는 없나요?

안내자도 없고, 피신처도 없고, 모든 것이 기적일 뿐, 탑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뛰어들 뿐인가요?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이런 것 ─ 이렇게 놀랍고 뜻밖이고 알 수 없는 것 ─ 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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