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가 건너는 강>의 '패자부활, 혹은 불량인간의 위대한 탄생'편에서 불량인간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국민가수 조용필이다. 단연 조용필을 두고 불량인간이라고 말한다. 나름의 이유로 이 불량인간편을 자주 찾아 읽는다.
"조용필을 인터뷰한 월간 잡지 신동아의 박윤석 기자는 조용필이 혼잣말하듯이 '딴따라가 불량인간으로 취급받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더라. 면서 기자 자신의 심중소회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용필은 광복 이후 한국 가요계를 수놓은 대중 스타들. 그 숱한 불량인간의 반열 그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기타를 처음 잡은 그날 이후 최소한 70년대까지는 불량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도 전, 일찍이 그를 불량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그의 부모였다.… '우리 가문에 딴따라는 없다'는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고려대 영문과에 원서를 보내기는 했지만 고사장으로 가는 대신 가출, 잠시 다닌 음악 학원 친구들과 아마추어 그룹을 만들어 파주 일대 기지촌 클럽 주변으로 흘러들었다. 이만하면 불량인간의 전형을 이루고도 남는다. <책 속에서>
불량인간 조용필에 관한 글을 일부러 찾아 읽는 날은 대부분 아이 문제로 착잡한 날이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 사회가 아이에게 모범인간으로 못 박아 규정하는 것, 그리고 내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 사회에 모범인간으로 발 딛고 살아가야 이른바 성공하였다는 평을 들을 것인데 사회에서 바라는 모범인간이기를 내 스스로 거부해버린 터에 모범인간을 어떻게 길러 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모범인간과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 낸 모범인간, 불량인간과 사회의 지나친 규범이 만들어 낸 불량인간, 아이를 어떻게 키움이 제대로 된 그것인가? 내 아이는 장차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언제든 아이편이 되어 아이를 믿어 줄 수 있을까?'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에, 잡스러운 생각으로 서성이는 시간에 일부러 찾아 읽는 글들이 이 산문집에 꽤 많다. 써지지 않는 글에 대한 상념,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어정쩡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무엇이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어정쩡할 때 이 책을 꺾어 들고 아무렇게나 읽어 버리기 일쑤다.
아무렇게나 읽다가 그냥 문득 털어버리고 다시 나의 시간들을 가곤 하는, 이 책에 대하여 나는 왜 이런 무작정이며 막연한 습관을 들였을까. 편안함일 것이다. 쉽고 친숙한 사람에게 생각 날 때 찾아가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돌아오는 것만으로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는 것처럼, 아무 때나 찾아 읽고 편안해지거나 무언가 지금 해야겠다는 자발적인 힘이 돋게 하는 책이지 아마.
'내가 건너고 있으나 필경 다 건너지 못할 강에 대한 글 37꼭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산문집은 전체적으로 농익은 저자의 글맛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자의식을 높이 세우는 자존심 강한 글들이다.
첫 번째 '말의 강, 글의 강'에서 저자의 말과 글에 대한 살핌과 깊은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밑줄 그어둔 한 대목, 같이 생각하자는 의미에 덧붙여 보면.
…문제는 우리말인데 나는 우리말과의 씨름을 이렇게 하고 있다. 첫째는 사전과의 싸움이다. …사전을 열어야 말의 역사. 단어의 진화사가 보인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한다. …호치키스는 어떤가? 호치키스는 원래 기관총 상표명이다. 전쟁 끝나 기관총 잘 안 팔리니까 그 기관총 탄창에 총알 쟁여 넣는 기술을 원용해서 만든 것이 우리가 아는 호치키스다. 하지만 호치키스는 상표명이고 이 물건의 일반 명사는 '스태플러'다. 우리말로는 제책기라고 한다.
남의 번역을 시비하는 것은 되도록 삼가고 있지만 번역하는 사람이 사전 안 찾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뜻에서 하나만 시비한다. 나는 십수년 전 어떤 소설의 한국어 번역판에서 "그는 자기의 루거를 불태웠다"는 문장을 읽고 많이 웃었던 적이 있다. 원문을 확인 할 것도 없이 'He fired his Luger'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루거'는 독일제 9밀리 권총의 상표명이다. 따라서 그 문장의 정확한 번역은 "그는 권총을 쏘았다"가 맞다. <책 속에서>"
번역서 150여 권, 그리스 로마신화의 대명사. 이 산문집의 첫 번째 말의 강, 글의 강에 실린 글들은 이런 위치의 작가가 밥벌이의 무기랄 수 있는 말과 글에 대한 스스로 살핌과 함께 살핌의 글들이다. 번역이든, 자신의 순수 창작의 글이든 책임감을 가지고 번역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늘 들여다보는 거울을 같이 보는 그런 착각을 하며 수시로 들여다보는 글들이다.
두 번째 '풍속의 강, 세월의 강'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사유들인데 앞서 말한 불량인간에 대한 글도 두 번째 장에 있다. 책을 보면서 밑줄 긋기를 예사로 하다 보니 이 책에도 나의 밑줄 긋기는 어지간히 눈에 띈다. 20가지 주제마다 느끼는 것은 문제의식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혹은 타인과의 그 관계에 대하여.
사실 두 번째에서는 함께 생각할 공감의 글들이 많다. 정곡으로 찌르기보다는 예의 있게 말을 꺼내고 공감하고 같이 걸어가다가 은근슬쩍 툭~! 치며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절대로 아닌 거지.", "이럴 수야 없잖겠어." 이런 느낌의 글들이다.
지나친 형식에 의식화된 행사장에서 그 알아들을 수도 없고 쩡쩡 울리는 소리에 곤혹이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이다. 학창 시절에 죽으라고 길게 이어지던 교장선생임의 뻔한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며 공감의 박수를 보냈었다. 손가락의 인류학이라는 글도 자주 보게 되는 글인데 문득 다시 펼쳐보니 이렇게 메모해 둔 글이 보인다."손가락?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키보드에서 오늘도 혹사당하는 손가락에 대하여 나도 좀 더 생각해보자" 이런 메모와 함께 밑줄 그어둔 부분을 소개하면,
"내가 여러 차례 지적해왔거니와 우리는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는 기이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종교는 나와 틀려요 . '다르지' '틀리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나는 방향이 틀려요. '다를 뿐' '틀리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고, '틀리다'는 '옳다'의 반대말이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뜻인가? 나와 같지 않은 녀석은 '틀려먹은 녀석'이라는 것인가? 오늘부터라도 바로 쓰면 큰 병 하나 고치는 셈이 된다. <책 속에서> "
이 외에도, '굳은 살 이야기'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 내가 기도하지 않는 까닭' 등 많은 글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치부일망정 솔직히 인정하며 좀 더 깊은 인간의 길을 선택하는 글들이 참 좋다. 아무나 쉽게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유쾌하고 친숙한 글들에 잠시 빠져들다 보면 어정쩡하게 서성이는 시간들이 정리되는 이유가 아마 이건가 보다.
세 번째 '신화의 강, 문학의 강'은 저자의 신화작가로서 문학에 대한 얼마든지 더 깊어도 되는 문학에 대한 통찰과 사유인데 이제까지 다루었던 문학 소재의 인물들 그 함축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만난 조르바는 오히려 더 반가웠다고 할까. 조르바나 니코스에 관한 글 외에도 그간 신화문학인으로서 이윤기의 깊은 사유를 볼 수 있는 글들은 다른 책으로 이미 만나졌던 인물들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갖게 한다.
이 산문집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6년간 수필 전문 월간지 <에세이>에 '이윤기가 건너는 강'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모태로 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런 저런 일간지에 기고했던 글을 보강하여 한 권 분량으로 묶은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작가들이 여기저기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에 대해 그리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는데, 글쎄?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면 작가의 이런 저런 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
말과 글이 막히는 날이면 이윤기의 산문집을 본다. <무지개와 프리즘> <어른의 학교>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그리고 이 책이다. 언뜻 미국에 오래 생활했던 만큼, 또한 서양문명의 대표랄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표하는 작가라서 '메이드인 유에스에이화?' 그러나 절대로 인스턴트식의 맛이 아니다. 적당히 제대로 참고 기다린 발효의 맛, 깊고 그윽한 그 발효의 맛이 늘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