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SE [워너 9월 11900원 할인전]
워너브라더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이 얘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기 싫었던 화려하고 멋진 삶을 열망하던 주인공 헨리는 부와 권력을 약속하는 범죄에 빠져들어서 신나고 화끈하게 산다. 헨리 주위에는 그런 헨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특한 아내 카렌과 범죄동료들인 지미와 토미가 있다. 또 범죄의 길을 안내해 주는 보쓰 폴리도.
헨리에게는 아쉽게도 꽃도 영원히 아름다울 수 없고 좋은 날씨만 이어질 순 없는 법.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점점 규모가 커진 그들의 범죄행위는 그들이 쉽게 구워삶을 수 있던 동네 경찰의 손을 떠나 에프비아이 쪽으로 넘어가고 파국이 다가온다.
결국 헨리는 폴리와 지미를 고자질해서 살아남는다. 토미는 라이벌 갱들 손에 죽는다.
삶의 씁쓸함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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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봄날, 가지각색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눈물난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름답고 풍요롭고 낭만적인 풍경
일 뿐이어서, [아 정말로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 ] 하는
식의 감탄사 섞인 한마디를 내뱉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꽃들
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이 다만 자연의 아름답고 평화롭고 신
비로운 섭리 때문이 아니라,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을 위한 <사랑
뺏기> 싸움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저
절로 숙연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지니는
무서우리만치 처절한 고독감을 실감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보존>과 <개체보존>,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치열한 삶의 투쟁을 벌인다. 무엇이든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야
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극한적인 경우에 어떤 동물들
은 자기 자식이나 어버이를 잡아먹기까지 한다. 바로 개체보존의
본능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죽더라도 씨를 남겨 자손을 번식시키
겠다는 욕구 때문에 벌이게 되는 치열한 사랑뺏기 싸움은 바로 종
족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봄철에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것은 이 종족보존의 욕구를 충
족시키기 위한 자웅의 결합을 목적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와
꿀로써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 함이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하여
그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꽃나무들은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려고 갖은 애를 써가며 [날 좀 봐 줘요, 날 좀 사랑해 줘요]
하고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는 셈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본능>, 이보다 더 큰 욕구가 있을 수 있을까.
식욕의 충족에 기여하는 식물의 <열매>라는 것이, 결국 자웅교배
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개체보존의 본
능보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우선이요, 종족보존욕구의 결과인 <사
랑받고자 하는 본능>은 가히 처절하리만큼 잔혹하고 매몰찬 성격
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면 <사랑은 주는 것>이라느니 해
가며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 누군가에게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
랑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물론 환상과 동경에 가득 차서 들뜬
마음으로 시작한 사랑이 권태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무자비한 싸움
과 저주 끝에 헤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완(未完)의 사랑>이
아름답다 아니, 더 나아가 아예 상대방과 사랑의 상호교환을 염두
에 두지 않는 <짝사랑>이 장미빛 순정을 지속시키기엔 더 어울릴
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문학작품들 가운데는 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어디론가 떠나가 버려 영영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영화로 더 유명한 <나의 청춘 마리안느>나 독
일 낭만주의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의 [호반(湖畔)]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인생을 살아나가다 보면 그렇게 <주기만
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설사 그런 사
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사심 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려면 먼저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아 본 체험이 있어야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무조건 주기만 하
는 <내리사랑>을 베푸는 경우가 바로 좋은 예가 된다.
일반적으로 <모성애)란 어떤 여성에게나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
려져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요즘도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고, 남편이 싫어지면 자식을 버리고 가출해
버리는 유부녀도 많다. 또 자식을 남 보란 듯이 잘 키우기는 키운
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리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엄마
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겉보기엔 가문 좋고 학벌 좋은
집안의 자식들이, 외형상으로는 의젓하게 성장한 후에도 잠재의식
깊숙히 자리잡은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과 사회윤리가 강요하는
<당위적 효도>의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며 정신적으로 황
폐한 삶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요즘도 남자가 결혼을 할 때가 되면, [좋은 아내를 맞으려면 먼
저 장모를 보고 나서 결정하라]는 말을 주위에서 하는데, 그 말은
확실히 옳은 말이다.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여자
는 역시 남편이나 자식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여자가 되기 쉽
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자식에게 뿐만이 아니라 남편(모든 남
자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역시 <애기>이다)에게까지도 포근
하고 따뜻한 내리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행복한
가정생활이 유지되고 나아가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사랑과 평등에
기초하는 행복한 삶이 보편화될 수 있다.

어린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야 한다는 것, 만약에 그
것이 안 되면 사춘기나 20세 전후의 나이에라도 이성에게서 충분
히 사랑의 공급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사랑을 받
느냐 못받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심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나는 나의 어머니의 경우를 통해서 더 확실
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8.15 해방과 6.25동란 등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한창
때의 나이를 모진 풍파와 참담한 고생으로 시달리며 보냈다. 우리
집안은 개성이 고향인데 개성이 6.25 이전에는 남한에 속했다가
휴전 이후엔 북한 땅으로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실향민이
되었고, 그래서 주변에 친척들조차 거의 없다.
어머니는 3남 2녀 중의 맏딸인데, 6.25를 전후하여 남동생 셋이
다 20대의 나이에 군대에서 죽었고 여동생도 병으로 죽었다. 외할
아버지도 해방 전에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머니가 이 장사 저 장사
로 생활을 꾸려나가느라 어머니는 사실 모친의 자상한 사랑올 그
리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어머니는 4O 전에 홀로 되었기 때문에 남편복도 없는 사람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이상하리만치 심성이 당당하
고, 맑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정말로 내게 주기만 하는 사랑, 보
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내리사랑을
베풀어 준다.
말하자면 나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셈인데, 어머니의 극성스
런 자식 집착이라든가 흔히 모자간에 생길 수 있는 모친고착(母親
固着)의 컴플렉스에 의한 애증병존의 심리 같은 것을 별로 느껴
본 적이 없다. 물론 양친부모 밑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난 아이보다
는 아무래도 <외아들 티>가 배어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0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어머니의 사이는 확실히 편한 관계였고 절대로 <효도>나 <윤리>로
억지로 맺어지는 부담스런 관계가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나는 최근 심리주의 문학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
서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 가며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어렴풋하
게나마 해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시절에 모친의 사
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외할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이모
를 편애하는 편이어서 아버지 사랑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한다),
사춘기 때부터 20대의 나이에 걸쳐 많은 이성들에게서 듬뿍 사랑
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자식에게도 아
낌 없는 내리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이후의 고생과
풍파에도 불구하고 심성이 삐뚤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지문이 안 찍혀질 정도로 일만 해왔고, 1.4후퇴
피난중에 나를 낳은 이후에는 산후병으로 시달려서 외모를 가꾼다
거나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래서 내 어린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엄마의 이미지는 <몸빼> 입고 머리에 흰 수건 두른 고
생에 찌든 여자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여성으
로 평가하거나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또 나는 집에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자
상한 아들>이 못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청춘시절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차츰 철이 들어가면서, 환갑을 넘기며 늙
어 가는 어머니가 불쌍하게(?) 여겨져서 가끔씩 이 얘기 저 얘기
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갖고 있는 그 당당한 <스
타의식>과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줄 아는 푸근한 마음의 여유가
어머니의 청춘시절에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데서 연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어머니는 꼭 미국 만화영화에 나오는 자그맣고 귀여운
할머니 요정같이 생겼다. 늙기는 늙었으되 귀엽고 싱싱한 여자다
움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슬슬 말을 붙이면 기분이 좋아 옛날 얘
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데, [내가 한창 땐 정말 예쁘다는 소리 하
나는 실컷 들었지] 하며 어머니의 전성시대(?)를 흐뭇하게 추억한
다. 집안이 어려워 소학교만 마치고 이 일 저 일 하다가 백화점
점원으로도 일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 얼굴 보려고 일부러 찾아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키인데
도, 그때는 날씬한 미인으로 소문나 남자들한테 꽤 시달린 모양이
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비
록 풍파를 많이 겪긴 했지만 여자로서는 행복한 사람에 속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이성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사랑의 충전량(充電量)만
갖고서도 평생 동안 안정된 정서를 갖고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다.

내가 어머니를 통하여 깨닫게 된 진리가 또 하나 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성적(性的) 기쁨의
교환이나 마음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에게서 주
목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성(性)에도 별로 관심이 없
고(내가 보기에 사상의학적으로 볼 때 소양인이다. 소양인은 섹스
에 둔감하다), 여성의 옷 치장이나 화장에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여자의 야한 화장이나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에
집착하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한다. [내가 젊었을 땐 분을 전혀 안
발라도 화장을 많이 한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라고 말하면
서 고왔던 피부를 자랑해 대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선천적으로 비
교적 좀 예쁘게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누구에게나 해
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 현대미의 기준이 <예쁜 여자>보다는 <멋지고 개성적인 화려
한 여자>에게 더 점수를 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우리
여성들은 좀 더 남에게 주목받기 위해서, 남의 시선을 많이 끌어
들이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남성도 마찬가
지겠지만, 아무래도 여성이 남성보다 <마음껏 야하게 치장할 권
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 여성은 <주는 사랑>이나 모성애
를 베풀기 위해 더욱 더 이성의 사랑을 많이 받아들여 충전시켜
둘 필요가 있는 점에서, 우선 여성들에게 그 실천이 절실히 필요
하고 또 용이하다는 생각이든다.
봄철에 피어나는 꽃들은 지극히 화려하고 선정적인 색깔들을 지
녔다. 또한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남의 주목을 받아 보
려고, 사랑을 받아 보려고 애를 쓴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우리
인간이라고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마음이 고운 여자>, <지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 이런 것들
은 다 조작된 허구요 헛된 신화다. 우선 남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보는 것, 그것이 섹스보다, 정신적 사랑보다, 지성보다 더 중요하
다. 모든 만물은 다 음기(陰氣)는 양기(陽氣)를 , 양기는 음기를
끌어들임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가며 그럭저럭 살아나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난 자연미보다 인공미(人工美)를 좋아하고, 인공미 가
운데서도 무시무시하고 그로테스크한 화장이나 섬뜩한 느낌이 드
는 긴 손톱에 집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이 꽃들보다 우월
한 점이 있다면, 꽃들은 화장을 할 수 없는데 인간은 화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하면 줄 수도 없고, 사랑에 굶주리게 되면
심성이 삐뚤어지게 되어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이나
자식들의 인생까지도 망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결국 <이성에게서 주목받는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래서 이 봄철에 우리는 보다 야하게 치장하고 용감하게 화려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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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쓴 본치와 마찬가지로 파파쿠라 도서관 옛날책 정기 처분할 때 들고 온 책. 저자 이름은 크리쓰토퍼 뉴인데 80년대 중반 책이 나올 무렵엔 홍콩에서 철학교수를 하고 있었다. Christopher New. 아 참 책 이름은 그냥 샹하이다.

제임쓰 클라벨의 아시안 싸가 씨리즈 여섯 권과 콜린 맥컬로우의 로마 씨리즈를 읽으며 영어역사소설에 맛을 들여서 고른 책인데 생각보단 좀 밋밋했다.

주인공 존 덴튼이 잉글랜드에서 학업을 마치고 20세에 샹하이로 말단 세관공무원으로 가면서 시작되는 얘기는 아편거래에 손대며 부를 쌓은 덴튼이 주위 서양사람들 몰래 중국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훗날 폭력조직인 삼합회 보쓰가 되는 인물과 악연을 쌓으며 복잡해진다. 거기에 사업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 얘기랑 덴튼의 애들 얘기, 아내랑 정부 얘기, 아마라고 부르는 중국인 하녀들 얘기, 나중엔 일본 강점과 국민당 대 공산당 대결 얘기에 말려든 덴튼 가족 얘기로 확대된다.

그럭저럭 재밌었다. 읽기는 본치보다 먼저 읽었는데 독후감은 늦게 올리게 됐다. 5점 만점에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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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2-1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결 얘기에 말려든' 보다는 '대결에 말려든'이 나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안 봤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듯한-왜냐하면 난 드라마를 거의 안 보므로-하얀 거탑의 원작자인 야마자키 도요코 책 한 권을 방에서 찾아 읽었다. 파파쿠라 도서관이 정기적으로 헌 책을 한 권 20쎈트, 여섯 권 1달러 팔 때 집어들고 온 책인데 야마자키 도요코의 본치다. 본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오사까 사투리로 주인님, 도련님 뭐 그런 뜻인 거 같다. 쓰기는 60년대에 쓰여지고 80년대 초반에 영어로 번역된 소설이다. 작가의 초기 소설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조사를 좀 해 보니 야마자키 도요코 여사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현실감 넘치는 대중소설의 대가라고 한다. 벌써 여든이 넘은 고령인데도 아직도 글을 쓴다고 하며 작품들이 일본에선 많이 드라마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실력 있고 사물을 꿰뚫어 보는 솜씨가 좋은 작가라는 뜻이겠지. 대벌이라는 대하소설로 70년대말 80년대초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한다. 근데 대벌이 일본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한국에선 대망이란 이름으로 첨 알려졌으니까 일본 진짜 이름은 대벌이 아닐지도 모른다.

본치는 오사까에서 타비-일본 전통 버선-만드는 준재벌 집안 독자로 태어난 키쿠지를 중심으로 그의 어머니인 세이와 할머니인 키노, 그리고 다 성격이 다른 키쿠지의 다섯 정부情婦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다. 아내였던 히로코와 그 사이에서 얻은 아들 얘기랑 다섯 정부 가운데 이쿠코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쿠로, 폰타 사이에서 낳은 아들 타로 얘기도 나오고 사업 동료들 얘기도 나온다.

남자보다 여자가 드센 집안의 원치 않는 독자 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와 어머니의 등살에 시달리며 자란 마마보이 키쿠지가 오사까 상인 가문의 전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반항 겸 타고난 바람기에 대한 굴복으로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며 삶의 단맛 쓴맛을 맛보다가 마지막엔 팔자를 받아들여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바라던 오사까 상인이 돼 간다는 줄거리다.

약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비슷한 거 같다. 특히 끝맺음 부분이. 애쉴리와 레트와 사랑열병을 앓는 단계를 지난 스칼렛이 타라로 돌아가듯 2차 대전 막 끝나고 나서 무너진 집안을 다시 새우려고 키쿠지가 애쓰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는 결심 때문인지 네 여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대목에서 끝난다.

뭐 크게 감동적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1920년대 초에서 45년까지 오사까 지방 상인과 화류계 풍습과 일본 속담 같은 게 많이 소개돼서 그럭저럭 재밌게 읽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떨까 호기심을 갖게 하는 입문서로서 괜찮았다.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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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2-1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부분에 키쿠지가 다섯 여인이 아니라 네 여인에게 작별하는 까닭은 이쿠코는 이쿠로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죽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자. 영어로는 whistle-blower다.

호세 칸세코는 1988년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40-40클럽(홈런-도루)을 작성,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다. 한 때는 호타준족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2005년 8월 미국 야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책을 발간했다. '약물에 취해(Juiced)'였다. 칸세코는 책 발간에 앞서 이 해 2월 자신과 마크 맥과이어가 오클랜드 '배시 브라더스' 시절에 금지약물을 복용했고 엉덩이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고 털어 놓아 충격을 던졌다.

이 책이 발간됐을 때 반응은 한마디로 '동료들을 팔아 돈을 벌자는 속셈이다'고 폄하했다. 실제 그런 소지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칸세코는 메이저리그 16년 동안 통산 타율 0.266 홈런 462, 타점 1407개를 남겼다. 당시 ESPN 라디오의 '댄 패트릭 쇼'를 진행했던 댄 패트릭은 " 호세 칸세코가 만약 500호 홈런 이상을 때렸다면 이 책을 발간했을까 " 라며 순수성에 의문을 달았다.

500호 홈런은 그 때까지 만 해도 명예의 전당을 예약하는 보증수표였다. 금지약물복용이 드러나고 90년대와 현재를 '스테로이드 시대'로 구분지으면서 500호 홈런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예전 500호 이상 홈런을 때린 슬러거들은 전부 뉴욕 쿠파스타운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다.

13일(현지시간) 금지약물 조사위원회(위원장 조지 미첼 전 상원의)이 발표한 '미첼 보고서'에는 전·현직 메이저리거 86명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MVP를 7차례 수상한 타자 배리 본즈, 사영상을 7차례 받은 투수 로저 클레멘스의 이름이 나란히 포함되면서 현 메이저리그가 '스테로이드 시대' 한복판에 있음을 생생히 보여줬다.

패이 빈센트 전 커미셔너는 " 이번 약물 스캔들은 미국인들에게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블랙삭스 도박스캔들보다 더 충격을 줬다 " 고 개탄했다.

선수들 면면을 보게 되면 그동안 칸세코가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총망라 돼 있었다. AP는 금지약물복용자들로 올스타를 구성했을 정도로 메이저리그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포함됐다.

이쯤되면 칸세코를 동료나 팔아먹는 치사한 선수로 볼 수가 없다. 동기 자체는 불순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폭로로 메이저리그 스캔들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한 원인제공자가 된 셈이다. 요즘 칸세코의 주가는 한껏 올라가고 있다. '미첼 보고서'가 발표된 이날도 CNN 래리 킹 라이브쇼에 출연해 약물 관련 인터뷰로 메이저리그의 추악함을 폭로했다.

돈벌이를 하려고 했다는 단순 고자질쟁이에서 이제는 Whistle-blower가 된 칸세코다.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조중동과 삼성에 매달려 있는 경제신문들은 처음부터 엉뚱한데 초점을 맞추며 김 변호사를 깎아 내렸다.

삼성의 법무팀에 몸담았던 김 변호사의 폭로도 애초에 순수성을 담보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김 변호사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안겨 삼성 비자금에서 촉발된 수많은 차명계좌, 내부 비밀등이 잇달아 폭로되면서 내부고발의 파괴력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현재 김 변호사는 외롭게 싸우고 있다. 김 변호사의 폭로는 거의 사실에 가깝다.
대한민국은 실제 '삼성공화국'이다. 정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등 어느 부문이건 삼성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삼성의 로비는 대한민국을 흔든다. 그러나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삼성의 당근에 익숙해졌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공룡 삼성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 전반이 '좋은 게 좋은 거다'로 만연돼 있다.

노무현 대통영 역시 국회에서 '삼성 특검법'이 발의됐을 때 사회정의 실현에 무게를 두지 않고 '대통령 흔들기'라고 깎아 내렸다. 물론 삼성 특검법이 '대통령 흔들기'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의는 그게 아니잖는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양심선언으로 터진 내부고발은 당시에는 전혀 힘을 얻지 못했다. 되짚어보라. 이문옥 감사관, 현준희 주사, 이지문 중위 등이 그렇다. 내부고발이 터지면 해당기관의 방해공작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대부분의 신상과 관련된 헐뜯기로 맞서 내부고발의 동기를 불순하게 만든다. '성격이 문제가 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독불장군이다' '사생활이 복잡하다'등을 문제삼는다. 내부고발을 하고 불의와 싸우는 그들의 개인적인 물질적, 금전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생을 담보하는 고발이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한국 언론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우려는 내부고발자의 편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 지금은 삼성 편이다. 지엽말단적이고, 본질과는 전혀 다른 기사로 물타기를 해버리는 게 한국 언론의 추악한 몰골이다.

호세 칸세코와 김용철 변호사. 동기는 불순했지만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 칸세코는 또 하나의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그의 발언에 무게가 실려 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는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삼성과 검찰에 맞서고 있다. LA|문상열
http://sports.media.daum.net/nms/worldbaseball/news/general/view.do?cate=23790&type=&newsid=24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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